[초운에세이]
지금 나는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다
이른 아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시각이 6시가 막 접어드는 무렵이었다. 아래층
출입문을 나서자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아파트 실내에서는 바깥이 어떤지
기온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사람 몸보다 정확한 온도계는 없다. 안 되겠다 싶어 도로 올라
갔다. 가벼운 윈드 재킷을 하나 걸치고 다시 내려왔다. 서둘렀는데도 11층
집까지갔다 내려오는 데 5분여가 걸린다. 조금 걷다 보면 이내 땀이 날테지만 그때까지 짧은 시간
동안이 문제다. 나이 든 사람에게는 체온관리가 중요하다. 엄동설한 잘 넘기고 늦은 봄이 끝나가는
어중간한 철에 방심이나 부주의로 감기라도 다시 걸리는 날이면 그런 낭패가 없다. 감기란 놈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한다.'는 말이
있다.
옷이라는
게 그렇다. 더위 피하는 기능보다는 추운 기운 막는 역할이 더 크다. 더우면겉옷은 벗고 소매라도
걷어붙이면 될 일이지만, 처음부터 얇게 걸친 상태에서는 추위를 막고 싶어도 어떻게 손을 쓸 방도가
없다. 유비무환은 노인건강도 지켜준다. 늦은 봄철인데도 아침· 저녁 날씨는
계절과 관계없이 변화무쌍하다. '보리 가을에 햇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옛말이 있다.
그럼 왜 또 하필이면 '햇늙은이'일까. 고참
늙은이야 오랜 경륜으로 쌓은 삶의 노하우가 있어 그런 걱정 따윈 덜어도 된다는 말일 것이다.
녹음방초
우거진 5월은 일 년 중 가장 쾌적하고 살기 좋은 철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때가 요즈음이다. 아파트 단지며 하천가, 공원 할 것 없이 어디라도
가는 곳마다 잘 다듬어지고 가꾸어진 산책로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온 나라가
꽃동산이요 푸른 정원이 된다. 여기는 무릉도원이고 저기는
샹그릴라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을 생각할 일이다.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 한 번
성(盛)한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얼마
못가서 필히 쇠하여 지는 법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때를 놓치면 그만이다. 꽃은 보고 싶어도 한 해를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년 이맘때까지 내가 살아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데 있다.
요즘은
일 년 중 해가 가장 긴 철이다. 하루 스물네 시간은 사계절 모두 같다. 그런데도 활동하고
일할 시간은 지금이 가장 많다. 새벽 5시가 되기도
전에 날이 밝는다. 날이 새면 일어나야 한다. 부지런한
사람은 일찍 일어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생즉동(生即動)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활동한다는 의미다. 노인은 어떤가. 앉으면 죽고 서면 산다
했던가. 걷는다면 그건 금상첨화겠다. 오늘 식전두어 시간 동안
나는 송도신도시 공원 여섯 군데를 한꺼번에 섭렵했다. 아마 이런
위업(?)을 달성한 사람은 이곳 노인들 중에는 나
말고 거의 없을 성싶다. 달빛공원, 새아침공원,
신송공원, 해돋이공원, 미추홀공원 그리고 중앙공원 순으로
걸었다.
발걸음도
경쾌하게 꿈속을 헤매듯 나는 신나게 송도 일대를 휘젓고 다닌 셈이다.
나는참으로 행복하다. 이 세상에서 생활 인프라가 가장 잘 구축된 지상낙원에서 지금
나는 살고 있다. 매사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오늘이 있어 감사하고 살아 있어 감사하다.
오늘은 어제 눈을 감은 이들이 그렇게도 살기를 염원하던 그날이 아닌가. 사람들이 감사하고 조국이
있어 감사하다. 공원조성이 아무리 잘 되어 있기로서니 내 발로 걸어다니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생은 즐기는 자의 것이다. 한때는
대구 팔공산과 앞산이 내 운동장이었고, 지금은 인천 송도신도시가 내 삶의
무대가 됐다. 적자생존이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다. 지금은 나도 어엿한
한 사람 인천 시민이다.
김영대
(대구교육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