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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어둡고
박 태 원
1. 이렇게 밤늦어
등불 없는 길은 어둡고, 낮부터 내린 때 아닌 비에, 골목 안은 골라 디딜 마른 구석 하나 없이 질척거린다.
옆구리 미어진 구두는 그렇게도 쉽사리 흙물을 용납하고, 어느 틈엔가 비는 또 진눈깨비로 변하여, 우산의 준비가 없는 머리와 어깨는 진저리치게 젖는다. 뉘 집 에선가 서투른 풍금이 찬미가를 타는가 싶다.
겁 집어먹은 발끝으로 향이(香伊)는 어둠 속에 길을 더듬으며, 마음은 금방 울 것 같았다.
금방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목구멍 너머에 눌러둔 채, 향이는 그래도 자기 앞에는 그 길밖에 없는 듯이, 또 있어도 하는 수 없는 듯이, 어둠 속을 안으로 안으로 더듬어 들어갔다·……
2. 에에홍 에에홍
소리도 언짢게시리 상여가 지나간다. 가난한 이가 돌아갔는가 싶다. 상여는 조그맣고 메는 이는 단 네 명.
외로운 이가 돌아갔는가 싶다. 상제,¹ 복쟁이 하나 없이 오직 뒤따르는 이가 두세 명.
그래도 에에홍 소리만은 격에 맞게 가난한 행렬은 눈앞을 지나, 차츰차츰 멀리 더 멀리……
그것이 완전히 시야에서 떠나자 거리는 벌판으로 변하고 벌판에는 불이 일어난다.
탐스럽게 새빨간 불길이다. 마음이 두려움보다도 먼저 아름다움을 느낄 불길이다.
향이는 이윽히 그곳에 서서 그 아름다움에 취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람은 갑자기 불어들고, 불어드는 바람에 불길은 세를 얻어, 넓디넓은 벌판이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한다.
향이는 문득 자기 신변에 그렇게도 가까이 미친 불길과, 또 그 불길이 가져오는 위험을 느끼고, 질겁을 해 뒤로 달음질치려 한다.
그러나 다리는 마음대로 놀려지지 않고 새빨간 불길은 더 좀 가까워 향이가 거의 울가망이 되었을 때, 문득 다시 들려오는 에에홍 소리.
돌아다보니, 바로 아까 그 상여가 불 속을 이리로 향해 나온다……
잠을 깬 뒤에도 에에홍 소리는 그저 귀에 있었다. 그 탐스럽게 새 빨간 불길은 그저 눈에 있었다.
향이는 잠깐 동안, 언짢고 또 야릇한 생각에 잠겨, 천장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뜻,
“참 꿈에 송장을·…… 송장을 보면 퍽 좋다는데·…….”
물론, 향이가 본 것은 상여요, 송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역시 상여는 그 안에 반드시 송장을 담았고,
“그뿐인가? 또 불을, 불이 활활 일어나는 것을 보아도 퍽 좋다니까……”
그래 향이는 눈을 깜박거리며, 이제 참말 다행한 빛이 그에게 있을 듯싶어 마음에 은근히 좋았다.
―이제 좋은 일이 내게 있으려나 보다―
좋은 일이?―
그러나 향이가 새삼스러이 곁을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그의 ‘사내’가 완전히 그에게로 등을 향하고 누워 있었고, 좁은 단칸방에 변통수 없이 맞붙여 깔아놓은 요 위에, 그래도 그들의 사이는 서너 자나 떨어져 있었고, 외풍이 심한 방 안에는 찬 기운이 휘돌고 있었고, 또 밖에는 철겨운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러한데 무슨―참말이지 그러한데 무슨 눈곱만 한 좋은 일도 이 속에서 생겨날 듯싶지 않았다.
다시 힘없이 고개를 돌리고, 힘없이 눈을 감고, 또 힘없이 한숨을 쉬고,
5. ‘삶’은 괴롭다.
그러한 것을 새삼스레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향이다.
아직도 나이 어린 향이가―, 향이는 이제 갓 스물이었고, 갓 스물이라도 생일이 섣달인 갓 스물이라, ‘만’으로 치자면 이제 겨우 열여덟, 그러한 향이가 벌써 ‘삶’의 괴로움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확실히 한 개의 애처로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물론 삶의 괴로움은 요즈음에 비롯한 것이 아니다.
향이가 네 살이나 그밖에 안 되었을 때, 어떤 노는계집과 손을 맞잡고, 만주라든가 어디라든가로 도망간 아버지는, 그뒤, 영영 소식을 끊었고, 아직도 젊은 어머니는 오직 향이 하나를 키우느라 십 년이나 연초 공장에를 다니다가, 이내 그 저주할 폐병을 얻어 돌아갔고,
오오 가엾은 어머니.
향이의 눈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
그때부터, 열세 살 되던 해 봄부터, 에누리 없이 외로운 향이의 몸 위에 고생살이는 달려들었다.
향이는 부리나케 고개를 뒤흔든다.
과거 팔 년간의 온갖 쓰라린 일, 온갖 슬픈 일, 온갖 괴로운 일을, 이제 또다시 생각 속에 되씹어보더라도 그것이 무슨 보람이 있으랴. 오직 그의 마음은 좀더 아프고 그의 앞길은 좀더 어두워질 것에 지나지 않지 않으냐.
뿐만 아니라 그는 이제까지 온갖 고난과 싸워오는 동안, 자기에게도 지지 않게시리, 혹은 좀 더하게시리 가여운 사람들을 알았다. 또 그러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뿐이 아니다. 나뿐이 아니다·……
물론, 결코, 향이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 괴로움 속에서도, 만약 그들이 구하려만 든다면 ‘기쁨’과 또 ‘위안’을―그것이 비록 얼마나 값어치 없는 것 이라 하더라도― 그 보잘것없는 ‘기쁨’과 똑같이 보잘것없는 ‘위안’을 능히 구해 얻고, 그리고 그것에서 잠시라도 ‘삶’의 다행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더할 나위 없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가난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그래도 그들은 그들의 주위에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또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고 있고·……
참말이지 ‘사랑’이, 따뜻한 ‘사랑’만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온갖 좋은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문득 향이는 견뎌낼 수 없는 외로움에 빠진다.
내게는 이 ‘가엾은 향이’에게는?―그래도 한낱 엷은 바람을 가지고 향이는 충동적으로 ‘그이’의 편을 돌아보았으나, 남자는 역시 그와 사이에 서너 자나 그만한 간격을 둔 채, 저편을 향해 누워 있었다……
4. 남자는 분명히
그가 자기와 이러한 생활을 시작한 것을 뉘우치고 있다.
요즈음에 이르러 때때로 뜻하지 않은 기회에 문득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향이의 눈앞에서 휘황한 오색 등불은 갑자기 그 빛을 잃고, 전기 축음기에서 울려나오는 그 소란한 재즈는 순간에 그 소리를 멈추었다.
이미 오래전에 빈 술잔에, 병을 들어 새로이 술을 권할 것도 잊고, 향이가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맞은편만 바라보고 있으면, 객은, 물론, 그의 마음속은 알아낼 길 없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구 있는 모양이야, 하나짱.”
그러면 향이는 이미 향이가 아니고, 얼른 ‘하나꼬’가 되어.
“우리 고이비도² 생각!”
그리고 그는 푸르고 또 붉은 등불 아래, 얄밉고 또 귀여운 웃음조차 웃어 보인다.
“그럼 계약제시로군. 경의를 표해야지.”
그러한 말을 하면서 무진회사나 그러한 데를 다니는 듯싶은 안경잡이는, 그 모양 없는 손을 하나꼬의 넓적다리 위에 슬쩍 놓는 것으로 경의를 표하려 든다.
하나꼬는 술 취한 이의 손이 좀더 다른 방면으로 움직일 것을 경계하며, 그래도 정 있는 듯싶게 술을 따라,
“자아 약주 드세요.”
그리고, 향이는, 근래로 분명히 자기에게 대해 냉정해진 남자를 생각하고, 순간에 그 마음은 언짢아진다.
남자의 마음이―, 일찍이 그렇게도 자기를 사랑하던 남자의 마음이, 단 반년을 못 가서 이렇게도 쉽사리 변해버릴 줄은 과시 몰랐다.
전에는 밤늦도록 마음에 없는 웃음을 팔고, 뭇 사나이들의 주정받이³에 마음과 몸이 함께 괴로웠어도, 그래도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곳에는 사랑하는 이의 따스한 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모든 시름을 없애주고도 남았었다.
그러자 지금은―, 지금은 그것이 없다.
남자는 본래의 그의 아내에게서 그렇게도 쉽사리 자기에게로 사랑을 옮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또 다른 여자에게로 마음을 주려는 것 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여자에게, 어떤 계집년에게·……
향이는 문득 줄 곳 없는 질투의 불길에, 혼자 마음을 태우며, 그러면서도 하나꼬는 한편으로 객이 어느 틈엔가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래 그는 재빨리 성냥을 그어 불을 붙여주고,
‘흥! 니가 그러면 내가 쉽사리 갈라설 줄 아니.’
속으로 그런 말을 향이는 중얼거려보고, 잠시 혼자 흥분도 해보았으나,
‘그렇지만 사랑두 없는 생활을 이대로 좀더 계속하면 또 무얼 하누.’
그러한 생각을 하면, 아주 더 늦기 전에, 깨끗이 헤어지는 것이 좋을 듯도 싶었다.
‘인제 서로 헤지나, 헤져버리나.’
그런 것을 혼자 생각하려니까, 한없이 제 신세가 가엾어, 향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머금고, 옆에서 안경잡이가,
“오늘 밤은 웬일이오, 하나짱.”
그리고 그 기회를 타서 그의 등 뒤로 팔을 돌려, 어깨를 가만히 잡아 흔들었어도, 향이는 얼마 동안은 하나꼬가 되는 일도 없이, 그대로 향이 채로,
‘인제 서로 헤지나, 여엉영 헤져버리고 마나.’
몇 번씩 되풀이 그 생각만 하고, 그리고 끝없는 슬픔 속에 빠져버린다.
5. 헤질 것을 생각하고
돌아다보면 그들의 반년간의 생활이란, 오직 괴로움만으로 가득 찬 것인 듯싶었다.
사랑이라는 것에 비로소 눈을 떠, 이 사내면 몸과 마음을 함께 허락해도 좋다고 생각한 그 사내에게, 이미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음을 향이가 안 것은, 그가 그의 마음과 몸을 엊그제 허락해버린 그 뒤의 일이었다.
사내의 입에서 처음으로 그 말을 들었을 때, 향이는 놀랐다. 너무 크게 놀랐다. 그것이, 남자의 그 말이, 자기 앞길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볼 마음의 여유도 없게시리 오직 놀랐다.
사내는 그의 눈과 눈이 마주칠 것을 피하며, 오직 한마디,
“향이, 용서 해주우.”
그래도 오직 향이는 크게 뜬 눈으로 사나이의 옆얼굴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흘낏 그를 보고, 얼른 다시 외면을 하며, 또 한 번 용서를 빌었을 때, 향이는 갑자기 그곳에 방바닥 위에 몸을 던지고, 그리고 느껴 울었다.
남자는 물론 그러한 것쯤은 예상하고 있어야만 옳았을 것이다.
또 사실 그는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여자의 느껴 우는 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 그것이 마치 뜻밖의 일이나 되는 것같이 그렇게 허둥댔다.
“잘못했소” “용서해주” “자 우지 마우”.·……그러한 말을, 낮게, 빠르게, 잇대어 말하고, 향이의 격렬하게 움직이는 어깨 위에 가장 자신 없는 손을 놓았다.
그러나 여자가 그것을 마치 무슨 징그러운 더러운 물건이나 되는 것같이, 진저리치게 몸부림해 물리쳤을 때, 남자는 저도 질겁을 해, 손을 떼고, 그리고 잠깐은 어찌해야 좋을 바를 분명히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얼마 있다, 그는 마음을 결(決)한 듯이 여자에게 대해, 자기의 진정을 토하려 들었다.
향이는 남자가 그의 아내와는 퍽 어렸을 적에, 열다섯 살이나 그밖에 안 되었을 적에, 부모들의 의사로 결혼하였을 뿐으로, 그 사이에는 눈곱만 한 애정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을 때, 그것이 대체 내게 무슨 상관이냐고 속으로 부르짖으며, 그저 느껴 울기만 하였다.
그러나 남자가 이제 조금만 기다려주면, 반드시 아내와 이혼하고, 그를 정실로 맞아들이겠노라 하는 것이며, 자기는 이제 이르러서는 결코 이 사랑을 단념할 수 없다는 것이며, 또 이제부터 어떠한 짓을 해서든, 결코 그를 불행하게는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며, 그러한 것들을 말하는 동안에도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 자기의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는 것을 맹세 지었을 때, 향이는 울기는 그저 울면서도, 그래도 분하고 또 슬픈 생각이 얼마나 덜어지는 것을 속으로 느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다른 무슨 수가 또 있을 것이랴·……
“우선 어디 방이라도 한 칸 조용한 것을 얻어, 둘이 살림을 합시다. 그저 나를 믿고 있수. 그저 나를 사랑만 해주우.”
그러한 말을 남자가 하고, 또 망설거리며 그의 등에 손을 얹었을 때, 그래, 향이는 결코 그것을 물리치려 들지 않았다.
6. 그러나 그렇게 하여
시작된 생활은 참말 기쁨과 참말 행복을 가지고 올 수는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제일에 그것이 무슨 크나큰 죄나 되는 듯싶어, 남의 눈을 피해가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언제든 향이에게는 재미적었다.
때로 그는 자기의 붕배(朋輩)⁴들이, 가정 살림을 차린답시고 얻은 사내라는 것이, 일개의 자동차 운전수나 철공장 직공이나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에 비겨, 자기의 ‘사내’가 중산 계급의 남자라는 것을, 마음 그윽이 자랑해보려고도 한다.
그러나 생각이 한번 남자의 가정에, 남자의 처자에, 미칠 때마다, 향이는 풀이 죽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쉬이 제 아낙과는 이혼을 하겠노라고, 남자는 거의 입버릇 같이 말을 하지만, 이미 자식을 셋이나 낳아놓은 아내를, 그냥 제가 싫다는 그러한 이유 하나만으로 내보낼 수는 없을 것이요, 당자나 당자의 부모는 말할 것도 없이, 우선 남자의 말에 의하면 무던이나 완고한 듯싶은 그의 부모부터가, 누구보다도 강경하게 그것을 반대할 것이다.
향이는 외롭게 단념하고, 문득 첩이면 첩이라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불행에 익숙한 사람은 욕심이 크지 않다. 하지만 그거나마도 가망이 없는 듯싶었다.
남자는 둘이서 이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도, 두 달이나, 석 달이나, 하숙 생활을 하며, 집에는 들러보는 일도 없던 것이, 이제는 혹 길에서 집안사람이나 일갓집 아낙네라도 만날 것을 두려워 해, 별로, 바깥출입도 없이, 두 사람의 사이를 어디까지든 비밀에만 붙이려 드는 것이, 언제 첩이면 첩이라고 어엿하게 자기를 내세워줄지 까마득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다 좋다고 해두자.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 비밀이 필요하다면 ㅡ.
7. 하지만 넓은 듯하면서도
좁은 것이 세상이었다.
남자의 집에 근 십 년을 두고 단골로 다니는 동대문 무슨 기름회사라든가의 기름 장수 늙은이는 그들이 들어 있는 안집에도 역시 사날에 한 번씩을 드나들었다.
그래도 그들은 대개 오정이 넘어서야 기동을 하였고, 기름 장수 늙은이는 오전 중에 다녀가는 것이 통례였으나, 아마 남자가 아침에 변소를 다녀 나오는 그 뒷모양이라도 기름 장수는 보았던 것일지 모른다.
그들이 그렇게 숨어 산 지 한 달도 채 못 되는 어느 하루 날 아침, 남자의 본 여편네는 그 늙은 기름 장수 마누라를 앞장세워 가지고, 사직동 꼭대기에서 와룡동 구석까지 자기 남편을 찾아왔다.
8. 그때 세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소동을 되생각해볼 때마다, 향이의 마음은 견디기 어렵게 불쾌하고 또 우울하였다.
한 사내를 가운데 두고, 두 여자는 마치 행랑것들끼리나 같이, 거의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까지 하고·…… 구경(究竟)⁵ 그 여자에게 교양이 없는 까닭이었겠지만, 그 뒤부터는 향이는 고개를 들고 밖을 나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식하고 또 못생겼으니까, 남편의 사랑도 못 받는 것이지 하고, 그러한 것을 생각하는 일이 있어도, 문득 여자가,
“세상에 어느 남자가 없어서, 그래 처자 있는 사내를 농락하니.”
하던 말이 머리에 떠오르면, 향이는 으레히 가슴이 아팠다.
그 말은 일찍이 자기의 가엾은 어머니가, 주책없는 남편과 정이 든 계집에게 향해, 한 일이 있던 말이었다.
가엾은 아내와 또 가엾은 딸은, 자기에게서 떠난 무정한 남편, 무정한 아버지에게보다도, 오히려 더 큰 증오를, 거의 아무것에도 비길 수 없게시리 큰 증오를, 그 계집에게―자기들에게서 남편을, 아버지를, 영영 뻬앗아가고 만 그 계집에게 가지고 있었던 것에 틀림없었다.
향이는 가만히 한숨 쉰다.
지금의 자기가 바로 ‘그 몹쓸 년의 계집’인 것이었다·……
9. 순정을 다하여
한 사내에게 마음과 몸을 허락하였을 뿐으로, 오직 그뿐으로 원래는 아무런 은원도 없었던 한 여인과, 또 세 어린애들에게 한없는 불행을 주고, 그리고 자기는 언제까지든지 그들의 원한과 또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ㅡ, 그것은 오직 잠깐 생각만 해볼 뿐으로 견딜 수 없이 마음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남자가 언제까지든 자기를 사랑해주고만 있다면, 그러면, 향이는 그러한 온갖 아름답지 못한, 또 떳떳하지 못한 ‘지위’에서도, 모든 것을 꾹 참고, 그리고 결코 몸을 뻬치려고 안 할 것이다.
헤아릴 길 없는 어둠의 심연 속에, 걸핏하면 빠져들어가려는 제 마음을 향이는 신 (申飭)⁶하고, 곧잘 하나꼬가 되어,
“흥!”
경박하게 코웃음 치고,
“별 빌어먹을 년의 팔자두 다 있지.”
그리고 눈을 한껏 매섭게 지어 뜨면, 그 순하고 또 귀여운 눈도 어쩌면 그렇게도 표독해 보이는지 ,
“니가 대체 오늘 밤엔 웬일이냐? 뭣에 요렇게 성이 났니?”
거동이 느리고, 따라서 말조차 느린, 어느 은행 출납계 주임이라는, 매우 살찐 사나이가 가장 점잔을 빼고 말하면,
“흥! 서방질이 하구 싶은데 걸려드는 놈팽이가 없으니, 그래 화가 안 나겠수.”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그런 말을 하고,
“참 오늘이 월급날이로구료. 나 술 좀 사주.”
그리고 느린 이가 채 느리게 대답할 수 있기 전에 하나꼬는 홱 고개를 돌려.
“얘애 히데짱. 위스키 좀 가져와.”
가져오면 남들이 채 어떻게도 할 수 있기 전에, 자작으로 서너 잔이나 연거푸 들이마시고, 그리고 그대로 술 사준 이의 가슴 위에 가 쓰러진다.
10. 그러한 요사이의
향이였던 까닭에, 한 사내로부터 군산으로 놀러 갈 의향이 없느냐고, 그러한 꾐을 받았을 때, 그는 그것을 단번에 물리치려 들지는 않았다.
그 사내는, 그 사내의 말에 의하면, 군산에서 목하 그중 큰 카페를 경영하고 있다 한다. 그리고 이번에 점포를, ‘일신’ ‘개축’ ‘대확장’하는 것을 기회로, 경성에서, ‘미인 여급’을 ‘특별 우대’로 ‘초빙’하려고, 바로 그 목적으로 상경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어느 틈에 어떠한 방법으로 조사하였는지, 하나꼬가 이곳 주인에게 이백칠십오 원의 빚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자기는 물론 그것을 깨끗이 청산해줄 것이요, 그 밖에 따로 의상 기타의 준비로 일백 환의 돈을 돌려주겠노라고 덧붙여 말하였다.
그러나 군산의 어떠한 곳임을 모르고 있는 하나꼬는, 설혹 그밖에 도리가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역시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아마 눈치 챘던 게지, 그 사내는, 자아 이걸 좀 보라고, 주머니에서 ‘그림 엽서’를 한 장 꺼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교롭게 군산 시가지를 촬영한 것이 아니라, 군산항의 대두(大豆) 수이출(輸移出)의 정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항구에 무턱대고 많이 쌓여 있는 콩 섬 더미를 그 사내는 알코올로 하여 매우 몽롱해진 눈을 부릅뜨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아니, 이거 말구·……”
허둥대며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나, 다른, 정말 군산 시가의 그림엽서는, 아마 또 좀 다른 여급들을 권유하던 경우에 소실되었던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만 그것을 단념하고, 그림으로 보여줄 수 없는 군산을, 말로써 방불케 하려 들었다. 결국, 그의 한 말을 종합해보면, 군산이라는 곳은, 경성보다도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좋은 곳인 모양이 었으나, 하나꼬가,
“내 갈 테야요.”
하고 말하였다고, 그 사나이가 자기 구변에 자신을 가지려 한 것은, 그러나 옳지 않았다.
향이는 군산이 어떠한 곳이든, 사실, 그러한 것이 큰 문제일 수없이, 오직 그는 근래로 좀더 싸늘해진 남자의 태도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11. 그러나 그 사내를 따라
군산으로 떠난다는 날이, 내일 모레로 닥쳐왔을 때, 향이는 역시 어찌하면 좋을지 망설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어젯밤에 그 사내는 또 찾아와, 돈을―, 다만 그것은 백 원이 아니라 칠십오 원이었으나, 그 칠십오 원을 그에게 주고, 그리고 그것으로 우선 옷이라도 준비하라고, 글피 밤에는 틀림 없이 떠날 수 있도록 차리고 있으라고, 몇 번씩을 다짐을 받고 갔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까지 된 이제에 이르러, 남자와 헤어질 마음은 도리어 없어지고, 그 칠십오 원이, 만약 그렇게 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면, 그 돈을 가져, 남자와 둘이서 단 한 이레라도, 마치 축복받은 애인끼리나 같이, 손을 맞잡아, 본정으로, 백화점으로, 또 극장으로, 모든 시름을 잊고, 가장 호화스럽게 돌아다녀보았으면 하고, 그러한 생각만 일어나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아무런 직업도 가지지 않은 남자에게, 달에 단 몇 원 수입이라 할 수입이 있을 턱 없이, 이제까지의 그들의 생활비란, 거의, 그, 들어 말할 것도 못 되는 하나꼬의 ‘팁’으로 대어왔던 것이라, 인제부터라도 남자에게 무슨 별 뾰족한 수 있을 턱 없고, 그러니 두 사람의 생활이란 역시 늘 한 모양일 게고, 더구나 남자는 분명히 마음이 변한 듯싶었고·……, 그러한 모든 것을 셈쳐보았으면서도, 그래도 자기의 그 남자에게 대한 떠나기 어려운 감정을, 향이는 아무렇게도 하는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언제나 다름없이 그에게 등을 향하고 잠들었고, 깨어 서로 얼굴을 대해도 거의 말 한마디 주고받는 일 없었고, 경제적으로 남자가 완전히 무력함을 알고 있는 주인마누라는, 한결같이 향이만을 졸랐고, 그리고 또 밖에는 며칠을 잇대어 궂은비만 내렸고·……
그러고 보니 이제 이 남자에게서 떠나는 수밖에 무슨 다른 도리가 그곳에 있을 듯싶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러한 생각만 하고
혼자 서러워할 것은 없을지도 몰랐다. 이제 그와 헤어져, 혹은 다행한 빛이 자기를 찾아들지도 몰랐다.
향이는 문득 며칠 전의 그 꿈을 생각해내고, 혹은, 이번의 군산행이 온갖 좋은 일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눈을 깜박거려 본다.
더구나 남자의 처자를, 남자의 가정을, 염두에 둘 때, 그는 아무래도 그와 혜어져, 제 자신 새로운 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대체 어떠한 말을 가져, 사내와 헤어지나ㅡ, 이제 서로 갈라서자는 말을, 이제 그와 떨어져 군산으로 간다는 말을, 제가 먼저 입에 올려 말할 용기가 향이에게는 없었다.
그야 남자 자신, 이미 오래전부터 둘이 갈라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그것을 제가 먼저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으랴·……
향이는 생각 끝에, 남자에게는 떠날 때까지 결코 아무 말도 하는 일 없이, 오직 사연을 자세히 쓴 편지를, 그것도 경성에서 바로 떠나기에 미쳐, 그에게 부치리라고, 그렇게 마음을 정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의 마음은 서운하고, 또 슬펐다. 그러나 그와 함께, 잘했든 못했든 한 가지 일을 딱 결정을 냈다 해서, 역시 마음이 시원하기도 하였다.
15. 목포행 열차는
오후 열 시 오십 분 정각에 경성역을 떠났다.
플랫폼에 벨이 울리고, 다음에 기적 소리, 그리고 덜컥 차체가 움직인 다음, 열차가 궤도 위를 역 밖으로 미끄러져 나갔을 때, 향이의 가슴은 마치 큰일을 저지른 듯싶게, 털썩 내려앉고 그의 눈에는 순간에 이슬이 맺혔다.
아아, 그예 나는 서울을 떠난다. 그예 나는 그이와 헤어졌다. 나는 이제 일찍이 보지도 못하였던, 듣지도 못하였던 먼 곳으로 외로운 혼자 몸이 이렇게 밤늦어 도망꾼이 같이 떠난다.
눈물이 뒤에서 뒤에서 자꾸 흘러나왔다.
신중히 고려해볼 시간의 여유를 갖지 않은 사람이, 우선 일을 결행해놓고, 다음에 반드시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뉘우침이, 지금 향이의 가슴속에 있었다.
내 잘못했다. 내 잘못했다.
향이는 자기가 차에 오르기 전에 역에서 부쳤던 남자에게의 편지를 생각하고, 역시 자기는 그러한 방법을 취하지 말고, 직집 터놓고 남자의 진심을 물어보았어야만 하지 않았나, 뉘우친다.
용산 시가의 불빛이 어리는 차창 위에, 문득 기약하지 않고 ‘그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두 시간 지나, 그제도록 여자가 돌아오지 않을 때, 그는 역시 그렇게 늦은 여자를 염려할 것이요, 마침내 그 밤이 새고, 아침에, 여자 대신, 여자의 편지가 들어와, 여자가 자기에게서 영영 떠났다, 알 때, 그는 반드시 자기를 배반한 여자를 미워하고, 또 술퍼하고·……
‘참말 그이는 나를 미워하구, 또 슬퍼해주구 할까.’
향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차창 위의 일 점을 응시하였다.
어느 틈엔가 차는 한강 철교를 건너고 있었다. 술이 잔뜩 취한 ‘새 주인’은 동행하는 또 다른 두 명의 여급과 희롱하면서, 자리 위에 담요를 펴고 잠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나꼬와 같이 군산으로 끌려가는 두 계집들은 서울을 떠나는 것에 별 감흥도 감개도 없는 듯이, 연해 재잘거리며, 껌을 씹으며, 또 실과〔實果〕 껍질을 벗기며, 하고 있었다.
그러나 향이는 그들 축에 들려고도 않고, 오직 한 생각에만 잠겨 있다.
‘참말 그이는 나를 미워하구, 또 슬퍼해주구 할까.’
그러나 그러할 사람이면 그렇게 오랫동안을 두고, 자기에게 그 토록이나 냉정할 수 있었을라구·……
‘역시 결국은 그와 헤어져버리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자 뜻하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가장 아름다웠던, 가장 즐거웠던 ‘그이’와의 ‘하룻밤’이 떠올랐다.
달포 전이다.
아직 둘이서 등지어 잠자지 않았을 때, 하룻밤, 그는 그이에게 내일이, 바로 내일이 자기의 생일이라고 말하였다.
“내일이, 내일이 당신 생일이오. 허.”
그이는 자기를 그렇게도 힘 있게 안아주고, 그리고 이튿날 아침, 어디 가서 어떻게 변통하였는지, 오 원의 돈을 들고 그는 돌아왔다.
“오늘은 점에 나가지 말고 나와 둘이서 하루 즐겁게 놉시다.”
참말 얼마나 즐거웠던, 또 황홀하였던 ‘하루’를 그들은 가졌던 것이다.
가엾은 어머니가 돌아간 뒤, 자기의 생일을 함께 즐겨준 오직 한 사람의 ‘그이’였다.
’이제 누가 또, 누가 또·…….’
눈물이 암만이든 줄을 지어 그의 뺨 위를 내렸다.
’하지만, 그이의 사랑은 이미 식었고, 이제 둘이서는 이렇게 헤어지는 수밖에·…….’
그러자 그는 갑자기 속으로 외쳤다.
‘그것을 누가 아니. 참말이지 누가 아니. 그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니. 또 그이면 그이래두, 참말 제 마음은 모르고 있을 것을·…….’
문득 돌아보니, 저편 좌석에 가, 담요 위에 다리를 꼬부리고 누워있는 ‘새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호색한인 듯싶은 얼굴에, 야비한 웃음을 띠고 있다. 갑자기 기적이 그의 고막을 울렸다.
14. 영등포역 대합실
그중 구석진 의자에 가 향이는 조그마니 앉아서, 자기는 또 한 번 일을 그르치지 않았나, 뉘우쳐본다.
그러나 역시 자기 앞에는 그 길밖에 없는 듯싶었고, ‘그이’의 앞을 떠나, 자기에게는 아무런 바람도 있을 듯싶지 않았다.
이십 년 동안, 제 자신 그렇게도 아껴왔던 자기의 깨끗한 마음과 또 몸은, 처음이요 또 마지막으로 그이에게 바쳤던 것이 아니냐. 사랑이 엷어졌다, 사랑이 식었다, 암만 그렇더라도, 자기의 몸 위에 불행이 있을 때, 그래도 그것을 걱정해주고, 가엾어 해주고, 또 슬퍼해줄 사람은 오직 ‘그이’ 하나뿐이 아닌 것이 아니냐.
역시 ‘그이’에게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문득, 개기름이 지르르 흐르는 ‘새 주인’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것이 그를 제법 불안하게 하여준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에는, 이대로 나가는 수밖에 아무 도리가 없었고, 오직 ‘그이’의 사랑만이 부활한다면, 모든 것은 그들 앞에서 결코 큰 문제일 수 없을 것이다…….
영등포 역을 열한 점 사십 분에 떠난 열차는 십오 분 지나 경성 역에 닿았다.
15. 이렇게 밤늦어
등불 없는 길은 어둡고, 낮부터 내린 때 아닌 비에, 골목 안은 골라 디딜 마른 구석 하나 없이 질척거린다.
옆구리 미어진 구두는 그렇게도 쉽사리 흙물을 용납하고, 어느 틈엔가 비는 또 진눈깨비로 변하여, 우산의 준비가 없는 머리와 어깨는 진저리치게 젖는다. 뉘 집에선가 서투른 풍금이 찬미가를 타는가 싶다.
겁 집어먹은 발끝으로 향이는 어둠 속에 길을 더듬으며, 마음은 금방 울 것 같았다.
금방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목구멍 너머에 늘러둔 채, 향이는 그래도 자기 앞에는 그 길밖에 없는 듯이, 또 있어도 하는 수 없는 듯이, 어둠 속을 안으로 안으로 더듬어 들어갔다·……
-끝-
2016년 6월 3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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