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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진화를 거듭하며
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과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03. 스트레스
50년 넘게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정신분석과 정신치료, 그룹치료, 다양한 학파의 정신역동학 분야에서 작업을 이어왔다. 또 영양과 두뇌의 화학작용, 정신병, 감정사이의 관계를 몇년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로 노벨상 수상자인 라이너스 폴링과 함께 쓴 "분자교정 정신의학 orthomolecular psychiatry"이라는 교재가 탄생했다.
또한
유효성이 입증된
대체요법들을 광범위하게 연구하고
적용해보기로 했다.
지난 35년은 의식자체의 본질을 파고들어가면서 여기에서 얻은 지식을 적용해 영성을 이해하는 작업을 해왔다. 영성 속에는 몸과 마음, 영혼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과의 관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영성은
임상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인 것일까?
아니면 모종의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스트레스와 그 예방이라는 문제에 역점을 두고 스트레스가 우리의 몸과 마음, 심리적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산업체나 산업계에서 작용하는 방식에도 관심이 많다. 우리 문화에서는 스트레스를 아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 더불어 이 장애가 미치는 영향도 잘 알고 있다. 지금부터는 스트레스에 대한 몸의 반응과 마음, 영혼과의 관계에 대해서 면밀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스트레스는
우리의 시각,
즉 우리가 마음에 품은 것과 태도,
믿음에서 비롯된다.
정서적인 스트레스는
단순히 세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우리 내면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로부터의
탈출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스트레스의 근원이
일반적으로 믿는 것처럼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이 평상시에
원인과 결과를 바라보는 방식을
뒤집어야 한다.
관찰해보면 알 수 있다. 원인이 세상에 있어서 결과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힘의 차원, 원인의 차원은 마음에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도 바로 이 마음의 차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고기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된다'
라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우리 전통문화에서는 이 점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말속에는 지금 내가 말하는 비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힘이 어떤 사건이나 저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온갖 사건들에 대한 경험을 창조하는 힘은 개개인의 내면에 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예방하는 법을 배우려면
'자신의 힘'부터
다시금 인정해야 한다.
스트레스의 여파를 치료하는 대신 스트레스를 미리 예방하는 방법들이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스트레스 완화 프로그램은 사실 스트레스가 이미 일어난 후 에 그 결과들을 다루는 방법이다. 예를들어 이완 프로그램은 몸안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방법이다.
말이
이미 마구간을 떠난
상황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되돌려
'몸이 절대로 긴장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
들도 있다. 그러면 의학적 모델을 토대로 스트레스를 다루는 다양한 방법들을 쓸 필요도 없어진다.
얼만전에 "스트레스와 심장질환"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받았다. 전체적인 믿음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였는데, 이 책의 내용은 스트레스가 저기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또한 스트레스는 실제로 삶에 내재하는 어떤 것이며 스트레스의 결과가 온갖 상징적인 의미들을 지닌 채 심장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었다. 책자에 실린 다양한 논문들은 생리작용을 통해 몸안에서 발생하고 드러나는 스트레스의 결과들과 심장질환을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의식안에서 경험되는 것이므로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들의 경험들로
증명할 수 있는 것,
임상학적으로 반복할 수 있고
내면의 경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는
임상학자의 시각에서
증명 가능한 임상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몸의 특성 중 하나는 지각력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에는 스스로를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팔은 자신의 존재 즉 자신이 팔임을 스스로 경험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팔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크기가 어떤지, 무엇을 하는지는 고사하고 자신이 현재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경험할 수 없다.
그럼
우리는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아는가?
오직
오감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몸 자체는 경험하지 못하지만 몸에 대한 오감의 보고는 경험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오감자체에도 자신을 경험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귓속에서 청각신경을 지나 고막을 자극하는 진동은 스스로를 소리로서 경험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몸의 경험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몸의 경험은
먼저 뇌속에 등록된다.
하지만
이 경험에 대한 인식은
뇌 자체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
즉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일어난다.
마음의 에너지 장 덕분에
뇌와 몸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흥미롭게도
마음 자체에도
자신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잘 들여다보기 전에는 이상한 생각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생각자체에도
자신이 생각임을 경험할 능력이 없다.
기억자체에도
기억임을 경험할 능력이 없다.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어떤 환상에도 그런 능력은 없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예를들어
상상력과 감정 같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는
의식이라는
더 크고 거대한 에너지 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 장은
훨씬 광범위하고
형태가 없으며,
모든 현상은 물론
변화까지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의식덕분이고
감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마음덕분이다.
그리고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감각덕분에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의식자체도
의식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보고할 수 없다.
무한하고 차원이 없는
더 큰 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장을 '주관적 인식의 경험적 앎'이라 부른다.
이처럼 인식이 실존과 존재를 동반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식을 할 수 있다.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앎은
이런 인식에서 생겨난다.
의식은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주고
마음은 몸에 대한 감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가장 고차원적이고 커다란 의미에서
'주관적인 인식의 능력이 곧
우리의 존재'
임을 알 수 있다.
모든 경험은
오직 의식안에서만
경험된다.
그러므로
경험의 장소와 근원에
직접적으로 말을 걸면
스트레스를 근원적으로 예방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1장에서 설명했듯 의식지도는 에너지 장과 의식단계에 근거한 수치모델이다. 에너지 장의 상대적인 힘에 점수를 매기고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경험에 따라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들어
지도 아래쪽에 죄의식이 있는데
이것은 자기혐오의 형태를 띠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이다.
죄의식이 있을때
세상은 고통의 장소로 보인다.
죄의식은 30의 에너지 장을 지니며
이보다 더 낮은 상태는
죽음에 가깝다.
30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600이상에서는
깨달음에 이를 만큼
높은 의식상태에 달한다.
죄의식과 무감정, 슬픔, 두려움, 분노, 자만심은 모두 해롭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기 때문에 점수가 낮다. 예를들어 50의 무감정은 100의 두려움보다 에너지가 적다. 100의 두려움은 200의 용기보다 에너지가 작고 125의 욕망은 중립적인 상태 혹은 초연한 상태보다 훨씬 에너지가 적다.
간단한 근육 테스트같은 매우 일반적인 반법들을 사용해봐도 에너지 장의 수치는 똑같이 나온다. 이런 방법들은 에너지 장의 상대적인 힘과 방향을 확인시켜 준다.
피실험자가
분노나 후회, 슬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를 생각하면
에너지 장의 수치가 낮아진다.
이런 생각을 지닌
피실험자의 팔을 측정해보면
힘이 약해졌음을 곧바로 알 수 있다.
대뇌반구가 비동기화되고,
경혈에너지 체계가 혼란에 빠지면서
힘과 에너지를 즉시 잃어버린다.
진실을 말하는
용기의 차원에서는
에너지 장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상승하며
삶을 지지하고 강화시켜준다.
이 살아있는 에너지는
진실성 그리고
정직과 잘 어울린다.
이 땅에 살아있는
위대한 지혜의 스승들은
600이상의 에너지 장에 있다.
위대한 아바타와
인류의 구원자들,
신비가나 성인들은
700에서 1000에 이르는 에너지 장에 있다.
진실은
200의 에너지 장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가면서
영원히 증가하는 사랑속으로 확장되다가
진리와 만난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건강 역시
같은 양상을 띤다.
에너지 장이 위로 올라갈수록
몸도 자연히
더욱 건강해진다.
덕분에 즐거운 활동과
활력속에서 기쁨을 느낀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치유의 에너지 장(540)에서는
몸이 개인과 인간전체의 카르마에 의한 한계와
타고 난 기질에 따라
질병을 스스로 고치기 시작한다.
스트레스와 관련해서는
의식안에 이미 존재하는 조건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조건들 탓에
스트레스를 받는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낮은 에너지 차원의 태도에 공감하는 사람은
확실히 세계를 부정적인 곳으로
인식한다.
무력감이나 절망의 에너지 장에 공명하는 사람은
세상을 절망적인 곳으로 경험하고
삶의 모든 경험들도
이런 생각으로 인해 왜곡된다.
슬픔의 에너지 장에서는
후회가 가득하고
과거의 상실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이 세상을 슬픈 곳으로 인식한다.
신이 있다면 우리를 사랑하거나 좋아하지 않고 무시만 한다고 여긴다.
두려움의 에너지 장에서는
억압되어 있던 에너지가
드러난다.
무서움의 형태로
평생 품고 있던 에너지다.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미래를 끊임없이
걱정하기도 한다.
세상을 무서운 곳으로 보고
모든 것을
두려움의 형태로 경험한다.
당연히 신도 인간을 응징하는 두려운 존재로 여긴다. 언제나 욕망과 결핍감을 느끼는 이들은 세상을 불만스러운 것으로 경험한다.
분노에 찬 사람들은
갈등과 투쟁에 휘말리기 쉬우며,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도전처럼 여겨지는 것에
쉽사리 상처를 입기 때문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가 어떤 과정으로 스트레스를 저절로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었는지 의식지도를 기반으로 자세히 이야기 해보자.
'어떤 사람에게 고기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된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삶에 대한 자세와 믿음체계, 내면의 가치 등에서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것들은 의식안에서 작동중인 프로그램들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스트레스의 근원을 세상이 아니라
의식안에 있는 것들에서
찾아야 한다.
어떤 사건의 경험에
스트레스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의식 안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예들을 보면, 삶의 태도와 방식이 스트레스를 경험하는 체계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알 수 있다.
결혼한 딸 집에 존종 들르는 할머니가 있었다. 딸은 뉴욕시에서 50킬로미터나 떨어진 시골의 12만평이나 되는 숲 한복판에 살고 있었다. 적막하기 이를데 없는 곳이었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라고는 나뭇잎 부스럭대는 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 뿐이었다. 할머니는 뉴욕 동남부 지역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딸집에 가는 게 내키지 않았고 가끔 가더라도 가능한 한 짧게 머물렀다. 할머니가 견딜 수 있는 기간은 이삼일이 한계였다.
숲속의 평화와 고요가 미칠 것 같아서 도시로 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때까지 오래 견디질 못했다. 할머니의 아파트는 거리를 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문을 열면 누구하고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번접한 도시의 소음도 그대로 들려왔다. 하지만 온갖 소음과 폭력에도 할머니는 고향같은 뉴욕 동남부 한복판에 있을때 안정감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라면 스트레스를 받을만한 환경인데도 말이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뉴욕의 이 지역을 두렵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북적대는 사람들과
새벽다섯시면 들려오는
쓰레기 수거차 소리의 한복판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안도했다.
12만평이나 되는
숲의 고요와 평화속에는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았다.
프랑스의 범죄자 식민지인 악마의 섬도 비슷한 예다. 프랑스 정부는 시민들의 항의를 받아들여서 이 섬에 있는 감옥의 상당부분을 폐쇄했다. 그리고 죄수들이 섬에서 자유로이 돌아다니도록 허용했다. 끔찍한 감방을 나와 섬을 마음대로 걸어다니게 해준 것이다. 죄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죄수들은 밤에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 잠을 잤다. 죽음까지 불사하면서 몇년 동안 그토록 소리높여 요구하던 자유를 간신히 얻었는데도 두려움과 외로움, 불안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다시 감방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안정감을 되찾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감방은 더없이 위협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감옥보다 끔찍한 곳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방에서 무엇을 했나? 감옥에서 쓴 소설로 풀리처 상을 받기도 하는 등 경이로운 문학작품을 남긴 사람도 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감옥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도 감옥에 있는 동안 "나의 투쟁"을 썼다.
악마의 섬과 대비되는 흥미로운 예로 '잃어버린 지평선'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속에서 로널드 폴만을 포함한 비행기 탑승객들은 히말라야 산맥에 임시로 착륙한다. 그들은 위기를 극복하고 천국같은 샹그릴라에 정착한다. 이곳의 에너지 장(540-600)은 매우 높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한한 평화의 장소인 것이다. 콜만이 연기한 등장인물들은 이 경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는 인물이라 환경의 도움을 받아 의식을 확장한다. 반면에 다른 탑승객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콜만 역을 제외한 여섯 명의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 다양하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꽤 흥미롭다.
전혀 준비가 돼있지 않은 몇몇은 낯선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른 몇몇 사람들은 얼마간 스트레스를 느끼다가 곧 적응을 하고 천국같은 상태로 받아들인다. 이렇듯 콜만이 연기한 인물과 대조적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낮선 경험에 극심한 혼란을 느낀다. 로널드 콜만의 형으로 나오는 인물은 불안을 느끼다 못해 거의 편집증적으로 변해 "현실세계"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
이처럼
모든 인물들이
현재의 자리가 아닌
자신의 개인적인 상태에 따라 다르게 반응했다.
이들의 경험은
환경이 아니라
각자의 의식수준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에콰도르를 떠날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키토를 출발하는 비행기는 일주일에 두 편뿐이었다. 나는 목요일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티켓은 몇달전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다. 탑승 수속을 밟으려고 보니 예약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게다가 그 주에는 비행기가 목요일이 아닌 토요일이나 돼야 출발한다고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런 상황이 웃기고 유쾌하게 여겨졌다. 고도 1만 피트 이상의 에콰도르 문화속에 있다보니 비행기가 늦게 뜬다는 사실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다가온 것이다. 누구도 이 문제로 화를 내지 않았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공황의 천정 가운데에 매달려 있는 시계가 여러 해 전부터 멈춰있었는데도 누구도 고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런 받아들임의 태도에서 좌절감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다. 태평한 사회분위기 탓인지 물질계의 정확함이 하찮게 여겨졌다. 그보다는 인간적 가치들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왔다. 인간적 가치때문인지 승무원들의 편의가 출발일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이런 상황을 언짢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이런 환경과 기대, 키토의 문화적 태도를 전혀 스트레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뉴욕에 있는 라구아디아 공항같은 환경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달랐을 것이다. 목요일에 떠나야 할 비행기가 토요일까지 출발하지 않으면 보나마나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토요일 11시 45분에 이륙 예정인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도착해보니, 활주로에 유일하게 서있는 비행기는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정오가 되자 사람들이 시에스타를 위해 활동을 멈췄다. 그래서 목요일 비행기는 토요일 오전 11시 45분에도 출발하지 않았다. 결국 오후 3시가 돼서야 출발했다. 모든 사람들이 시에스타를 즐기는 동안 비행기는 활주로에 그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시에스타가 끝나자 모두들 소지품을 챙겨들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제야 비행기가 출발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모두들 완벽하게 이완된 상태로 느긋하게 앉아있었다. 비행기 출발이 사흘이나 늦어져도 다들 평화를 유지했다.
참고) 시에스타(낮잠, 스페인어: la siesta, IPA: [ˈsjesta])는 점심을 먹은 뒤 잠깐 자는 낮잠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경험들에 스트레스를 이해하는 열쇠가 들어있다.
스트레스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가리키는 것은
의식안에서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킨 것에 대한
경험이다.
몸을
스트레스 반응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는 것은
마음속의 것에 몸이 반응하기만 할뿐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마음에 품은 것들,
기대나 삶의 태도를 바꾸면
스트레스를 예방할 수 있다.
비행기가 사흘이나 늦어져 생긴 스트레스를 다스리기 위해 이완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심장을 스트레스로부터 지키기 위해 심장동맥 운동프로그램에 가지 않아도 된다. 어떤 스트레스도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진정한 방법은
예방이다.
스트레스가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파악해서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예방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우리가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것의
근원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스트레스는
저기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비행기 시간표나
감옥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스트레스는 우리의 의식속에 존재한다. 의식지도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 급격하게 향상될 것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알고 있는 문제이므로 의식 안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의식지도 아래쪽에 있는 에너지 장은
파괴적이고 삶을 해롭게 한다.
이 에너지의 본질적인 성격이
스트레스로 가득한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 그 자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중립의 단계로 이동하면
우리는 스트레스가 없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인다.
540의 의식단계에서는
모든 것을
아름다움과 완벽성, 생명의 일체성, 무조건적인 사랑,
사랑스러움 속에서 경험한다.
의식지도에서 각 에너지 장의 상대적인 힘이 적힌 오른편을 보면 삶을 대하는 태도나 입장에서 생겨나는 감정들을 알 수 있다.
예를들어
죄책감의 단계에서는
비난이나 자기혐오의 감정을 겪는다.
삶을 파괴적인 것으로 경험하고
세상을 고통의 장소로 본다.
삶에 대한 무감정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절망의 감정을 겪는다.
이들은 절망속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에너지도 없다.
이런 세계에서 신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감정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충분한 에너지를 받으면
슬픔의 단계로 올라가
감정을 표현한다.
여기엔 분명한 생물학적 목적도 있다.
아이의 울음처럼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는
감정을 끌어올려 준다.
이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이 상실과 후회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을 슬픈곳으로 경험하고 낙담하다. 신도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낀다. 반면에 두려움의 억압된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들은 극심한 불안과 걱정을 안고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삶을 두려운 것이라 여긴다. 과거에 집착해 후회가 생겨나고 미래의 삶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삶이란 무엇일까?
삶은
세상과 자신,
타인을 바라보는 시간,
신성에 대한 기대를 모두 포함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삶 자체는 무엇일까?
사건에서 일어나는 것이 삶일까?
에너지 장들은
사실 둥근 창과 같다.
이 창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안경의 색과도 같다.
슬픔의 에너지 장이라는 회색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슬프게 보인다.
이 에너지 장에 지배당하면
거리를 걸을때도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인다.
인간이나
인간이 지닌 조건을 생각해봐도
신문을 펼쳐봐도
모든 일이 절망적이다.
거리에서 노인이나 아이들을 보면
가망없는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그들의 삶의 여건이
너무나 절망적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슬픔의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들은
거리를 걸으면서
자신이 인식한 슬픔을 경험한다.
신문을 펼쳤을때도
이들이 보는 것은
세상의 가슴아픈 사건들과
인간이 지닌 조건의 슬픔뿐이다.
거리에서도 쓰레기통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노인을 보면 늙는다는 게 참으로 서글픈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아이들을 보면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참으로 슬프다며 안타까워한다. 이들은 삶의 고통을 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고통을 안고 있는 탓에 동정심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래서 아이들은 몹시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이다.
두려움의 장에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조건을
자신들의 세계에서 보고 경험하고 창조해낸다.
신문을 읽으면서도
살인이나 강도, 전쟁, 폭파 등의 사건들때문에
세상이 참으로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거리를 걸을때도
무엇이든 두렵게 받아들인다.
사고의 위험성을 보고
사람들이 거리에서
어떻게 발목을 접질리는지 본다.
그러면서
모든 곳에
경고판을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세상을
두려운 곳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모든 것에 이중자물쇠를 채운다.
강도가 한번도 든적이 없는 집인데도 이중자물쇠를 채운 마당의 이중자물쇠를 채운 차고 안에 이중 자물쇠를 채운 차를 숨겨둔다. 이처럼 내면에서 생겨난 두려움이 세상을 향해 두려운 모습을 투사시킨다.
두려움으로 물든 안경을 쓰고 있어서
모든 것이 두렵게 보이는 것이다.
신을 찾아도 두려운 신만 보인다.
두려운 세계의 신은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에너지 장에서 벗어나면
이런저런 욕망과 갈망의 에너지 장으로
옮겨간다.
욕망과 갈망은
사회교육을 통해 일어난다.
제 3세계 사람들이나
경제적으로 낮은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 중
의식지도 아래쪽에서 절망과 감응하는 이들은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 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들의 욕망이
커져갔다.
이런 욕망은
갈망이나 바람이라는 감정 형태나
중독으로 표현된다.
이때
의식속에서는
구속의 과정이 일어난다.
이들은
무언가를 원하거나 갈망하면서
이 세상을 불만스러운 곳으로
경험한다.
그리고
이런 끊임없는 좌절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갈망은
결코 만족할줄 모르는 사람을
만들어낸다.
무엇을 갖고 있건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바람이 충족되지 않으면
더욱 많은 바람들이 생겨나고
결국은 끊임없는
통제욕구에 시달린다.
당연히
세상을 대단히 불만족스러운 곳으로 보며,
길을 걸을때도 자동차나
이런저런 물건, 집 등
갖고 싶은 온갖 것들에서
눈을 거두지 못한다.
신문을 보면
원하는 것들이
더욱더 눈에 띈다.
이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고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한다.
획득에 대한
이들의 멈추지 않는 중독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킨다.
무언가를 향한
끝없는 갈망이
문제인 것이다.
욕망의 단계에서
분노의 에너지 장으로 올라가면
분노로 가득찬 세상을 경험한다.
이들은
분노로 가득차 있으면,
증오와 비난, 불평으로 들끓는다.
어떤 사건이든
일어나기만 하면
억압된 분노의 에너지를
터뜨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들은
세상을 경쟁적인 곳으로 본다.
또
분노의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신문을 읽을때도
이들의 내면은
보도된 사건들이 불러오는
분노와 격분 등으로 뒤틀린다.
거리를 걸을때도 화나는 것들이 무수히 눈에 들어온다. 도로표지판의 상태나 거리 전체 모습, 사방에 널려있는 신문지들... 아이나 노인들을 볼때도 그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화가 치솟는다. 그들이 불의와 분노, 경쟁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중고차 매장을 운영하는 길 아래편에 중고차 매장이 또 생기면 그 가게를 경쟁상대로 보고 내 가게의 매상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기지 않으면
지는 세상에 살기때문에
이들의 내면은
언제나 긴장되어 있다.
아직
조화와 협력이라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중고차 매장이 한데 모여 생길수록
모두의 사업이 잘되리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분노의 차원에 있는 사람은
세상을 위협적인 장소로
여기고 신도 싸움을 일으키는 존재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분노로 인해
원한을 품으며
매사 호전적이고
기꺼이 싸울 태세가 되어 있다.
항상
분노를 폭발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억압된 분노로
세상도
스트레스가 극심한 곳이라고 여긴다.
누군가 주차장에서 내 자동차 범퍼를 들이받기라도 하면 욱하고 분노가 치솟는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붓고 고소를 하겠다고 위협한다. 이런 사람들은 적에게 보복을 하거나 응징하는 일에 사로잡혀 있다.
자부심의 단계로 올라가면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더욱 많아진다.
더불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들도 늘어난다.
사람들은
자부심을 건설적인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자부심은
부정적인 감정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파괴적이다.
그리고
의식속에서 팽창의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자부심은 오만이나 경멸 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상당히 극단적이고 자신의 입장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며 분노에 찬 사람들처럼 변해간다. 옳음과 그름, 승과 패가 분명하게 갈리는 세계에 살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만 옳다고 생각한다. 내면에는 항상 스트레스가 자리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지위의 중요성이나 소유와 관련해서 모든 관계와 상호작용, 거래를 승패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신문을 잃을때도 모든 관련자나 보도된 인물들의 신분을 먼저 본다. 또 거리를 걸을 때도 옷에 붙은 상표나 주소처럼 신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들을 주로 눈여겨 본다. 타인의 모습을 포함해서 삶의 모든 것을 신분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일을 흥미로워한다. 이 모든 태도들은 희생자적 사고방식이 낳은 나약한 자세다.
진실의 단계 아래에서는
행복의 근원이
자신의 외부에 있다고 보는데,
이런 태도를 버리지 못하면
결국은 자신의 힘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면서
삶의 의미와 행복의 근원,
가치를 외부의 어떤 것으로
'저기"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태도는
결핍감에서 비롯된다.
저기 바깥에
그것이 있다면
그걸 꼭 얻어야 해.
그걸 얻어야 한다는 건
내게 그것이 부족하다는 의미니까.
그걸 얻는데 어떤 방해가 있을수도 있어하는 생각말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언제나 위험과 위협감속에서 살수밖에 없다. 외부의 무언가가 중요한 것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앗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힘을 세상에 넘겨줘버린 탓에 희생자적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흔히들
저기 바깥에
행복과 스트레스의 근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면 "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자체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경험일 뿐이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꿔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방법은
사실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스트레스와 관련된 진실을 인정하고
사실을 직시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는 순간
우리의 에너지 장은
달라진다.
중립의 더욱 긍정적인 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상황을 자발적올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룸으로써
힘을 다시 얻는다.
자신의 힘을 되찾아
진실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용기(200)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세상을 도전과 성장,
기회의 장소로 본다.
살아있음을 기쁘게 만드는
신나고 즐거운 일이 일어나는 곳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은
신문을 펼칠때마다
인류에게 온갖 기회들을 확인한다.
그리고
시도해 보고 싶은
다양한 해결방법들도 떠올린다.
이처럼
세상이 성장과 기회로 가득한
신나는 곳으로 여겨지면
다음과 같이 자문해보게 된다.
"나는 어디에 적합한 존재일 수 있을까?"
나를 표현하고 이 기회들을 경험하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기회의 세상에서
경험하는 신은
마음이 열려있다.
이런 열린 마음이
스트레스를 일어키는 것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자부심의 단계에서
스트레스를 주던 것이
용기의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성장을 위한 기회와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다음의 중립단계(250)로 올라가면
더욱 많은 힘을 가지며
이 힘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낮은 단계에서
부정적인 것들에 맞춰져 있던
안테나가
중립의 단계에 이르러
드디어 긍정적인 것을 향하게 된다 .
그러고 나면
삶을 긍정적인 방향에서
경험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곧 경험자이기 때문이다.
경험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은
우리의 의식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많은 입장들을 기꺼이 내려 놓으면
더 이상 방어할 필요가 없다.
방어는
자부심과
중요한 존재이고 싶은 욕구,
언제나 옳고 싶은 욕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나 고집불통,
광신자적인 태도는
결국 갈등을 유발한다.
이런 태도들의 바탕에는
내 입장이 옳으므로
너의 입장은 틀리다라는
오만한 믿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기꺼이 버리면
어느 정도 초연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상처받기 쉬운 성향을 초월하고
의식속에서 일어나는 과정덕분에
더욱 자유로워진다.
세상이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며
신도 자유를 선사하는 존재로 여긴다.
그렇다면 이런 긍정은 어떻게 표출될까? 이 단계의 사람은 취업면접을 받으러 갈때도 이렇게 생각한다. 취직이 되면 정말 좋을텐데, 하지만 안돼도 괜찮아. 즐겁게 찾아볼 수 있는 기회들이 또 있을테니까. 그래서 이런 사람은 고착되지 않는다. 특정한 어느 하나에 생존의 기반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자발성(310)의 단계로 들어가면
의식의 과정에 의도가 더해진다.
삶과 어우러지고 조응하며 하
나가 되는 긍정성(yesness)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우호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신도 영감을 주는
희망적인 존재로 여긴다.
신문을 보면서도
문제를 풀기 위한
인간의 모든 투쟁과 협력의 증거들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들이
파괴로 인식하는 것을
이들은 단지 힘의 군형을 위한
하나의 과정 혹은
작업으로 본다.
거리를 걸으면서도
세상을 우호적인 장소로 느끼고
사람들도 따스한 존재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에
더 이상 성공해야 할 필요가 없는
노인들까지 더욱 다정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래서
노인들에게 쉽게
다가가 말을 붙인다.
이처럼 자발성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더이상 피해망상적인 불신의 마음으로 타인들을 바라보지 않고 오만한 세상에서 어디에 서있는지를 알기 위해 타인들도 판단하지도 않는다. 젊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방인이나 노인들도 다정하게 바라보고 이들과 쉽게 관계를 맺는다.
수용(350)의 단계로 올라가면
경험의 근원이
자신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런
자각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삶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고,
어떤 상황에 놓이든 견딜 수 있음을 안다.
이들은 무인도에 떨어져도 1년후면 나무집을 짓거나 코코넛으로 조각을 할 것이다. 감옥에 갇히면 소설을 쓰거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길지도 모른다. 실제로 죄수들 중 교도소 출입 변호사가 되거나 법학 학위를 따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처럼
삶의 경험을 창조하는 힘은
내면에 있다.
수용의 단계에서
힘을 찾은 사람들은
신도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희망적이고 자비로운 존재로 인식한다.
더이상 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스스로를
충분한 존재로 느끼고
자신감을 갖는다.
기업체에서는
이런 사람을 채용해서
큰 계약을 성사시키고 싶어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한계는 물론이고
현실의 부침까지
받아들일 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부심에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한계를 인정하지 못한다.
예를들어 회사에서 "베네수엘라로 가서 계약을 마무리 지으세요"라고 했다고 하자. 그러면 수용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충분하다고 느끼고 자신감도 있기 대문에 이렇게 말한다. 저는 사실 그 회사하고는 일을 잘하지 못해요. 담당자하고도 사이가 썩 좋지 않고요. 벨기에라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어요. 거기가면 두배는 더 팔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아닌 짐을 베내수엘라로 보내시는게 어떨까요?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기꺼이 인정하고
분노에 휩싸이는 어리석음도
알아서 피하는 것이다.
국세청도 나름의 존재방식이 있다고 생각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을 피한다. 그것이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임을 인정하고 더불어 잘 살아간다.
이런 수용은 수동성과는 물론 다르다. 이와같은 의식의 변화는 경험의 근원이 자신임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이 인식으로
세상을
더욱 긍정적이고 조화로우며
희망적이고 따스한 곳으로
보기 시작한다.
힘을 회복하고 나면 다음 단계인 사랑(500)의 에너지 장으로 올라간다. 여기서 사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집착에서 생겨나는 감상적인 정서의 표출은 물론 아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묘사하는 사랑도 아니다. 타인을 향항 소유욕에서 생겨나는 감정의 흔들림이나 밀고 당기기, 힘의 다툼, 날 떠나면 죽여버릴거야 하는 식의 노래 역시 사랑의 요소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진정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집착의 결과에 불과하다.
무조건적인 사랑(540)은
생명과 함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생명은
보살피고 지지해주며
본질적으로 너그럽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인해
생명의 진모 가운데 일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뇌 안에서 엔도르핀이 분비되면서 내면의 어떤 상태, 즉 자신의 신체 및 자아와 함께 하는 방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세상도 사랑스럽게 보인다. 거리를 걸을때도 마음이 편안하다. 이들의 눈에는 겉으로 드러난 삶의 비루함 밑에 흐르는 사람이 모든 인간을 한데 묶어주는 사랑이 보인다. 덕분에 이들은 더욱 고차원적인 에너지 장으로 옮겨간다.
삶을
조화롭고 따스한 것으로 바라보면
스트레스도 줄어들고
상처를 받을 위험도 낮아진다.
이 단계의 사람은
용서의 마음과
감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 장의 의도는
사랑인데
모든 존재들에게
언제나 따스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이런 사랑을 경험한다.
타인에게 애정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도 보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단계의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완벽주의자들의 냉혹함과는
대조를 이룬다.
완벽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항상 스트레스를 느낀다.
판단하고 비난하는 성향 탓에
용서를 할줄 모르므로
자기 혐오와 죄의식을 품고 다닌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
이들에게는 스트레스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기만 해도 자신을 미워한다. 이런 완벽주의와 고집, 자신을 비난하는 성향에서 스트레스가 생겨난다. 요컨대 스트레스는 내면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반면에 마음이 열린 사람들은
자신과 더욱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용서의 마음은
타인의 인간적인 약점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북돋아주고
더불어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도 인정하게 해준다.
점진적인 내면의 작업을 통해
기쁨의 고차원적인 에너지 장으로 올라가면
실제에 대한 초기적인
자각에 다가간다.
자신은 경험자이지
경험자체가 아님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세상에 휘둘리는 대신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내면의 고요에서
모든 생명을 향한
연민이 일어난다.
생명이 지닌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과
완벽함에 대한 자각이 커지면서
생명의 일체성과 통일성도 경험한다.
이렇듯
한층 진화한 단계에 오른 사람은
신문을 읽을때도
인간이 지닌
사랑의 전체성을 경험한다.
인간본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신문에 온갖 기사거리를 만들어내는 바로 그것이야 말로 인간 의식의 진화와 진보적인 움직임의 표현이라고 본다.
거리를 걸을때에도
믿기지 않는 아름다움만을 인식하며
생명의 아름다움이
온갖형태로 멋지게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완벽한 모습으로
자신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장미를
볼줄 아는 것이다.
반면 덜 진화한 사람은 반쯤 피어난 장미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난 저런 장미 싫어. 저건 불완전한 장미야" 그러나 진화한 사람은 생명자체의 진화속에서 완전함을 보기때 문에 반쯤 피어난 장미도 같은 방식으로 바라본다.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고 활짝 핀 장미의 모습과 그 믿기지 않는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모든 생명의 내적인 신성함을 깨닫는 것이다.
의식의 단계를 보여주는
에너지 장들에 관한 설명을 읽으면서
이 에너지 장들이
우리 삶의 경험들을
결정짓는다는 점을
확실히 이해했을 것이다.
우리가 표현하는 감정은 물론이고
이 우주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신의 종류까지
이 에너지 장이 모두 결정한다.
이 모든 표현은
의식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다.
저기 바깥에는
스트레스를 일으킬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우리 자신의 입장이나 태도가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음이 열려있어 편안한 사람은
누군가 주차장에서
차의 범퍼를 들이받아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지 않는다.
여러분도 이미 경험한 적이 있겠지만
좋은 기분일때
사건은 다르게 받아들여 진다.
스트레스를 불러올 만한 일도 기분이 달라지면 전혀 그렇지 않게 다가온다. 누군가 내차의 범퍼를 들이받으면 대부분 크게 흥분한다. 하지만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은 흥분한 사람을 걱정해주며 이렇게 말한다.
"흥분할 것 하나도 없어요. 그래봤자 범퍼에 불과한데요. 뭐 둘다 보험을 들어놨잖아요. 큰 문제 아니에요. 정비소까지 차를 끌고가서 수리를 하는게 약간 성가시겠지만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에요"
진화한 사람은
이처럼 의식의 장에서 일어나는
상대의 혼란을 치유해주고 싶어한다.
누군가
내 차의 범퍼를 들이받았을때
부당한 세상을 향해
분노나 자기연민을 느끼는 것은
사건때문이 아니다.
상대의 코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욕구는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많은 분노 때문이다.
초연한 사람은
특별한 감정없이
이 사건을 해결한다.
타인의 감정을 염려하는 마음이나
타인의 불안과 두려움을 덜어주고
의지가 되어주려는 욕망은
내면의 변호에서 비롯된다.
저기
바깥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움푹 꺼져 버린 범퍼는
우리의 삶에
아무런 힘이 없다.
감정의 원인은
내면에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면
힘과 자율성을 회복해
자신이 희생자라는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타인을 판단하거나
자신은 옳고 타인은 틀리다라는
특정한 입장을 내려놓으면
내면의 평화는 저절로 생겨난다.
이런 자발성은
용서하고 이해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은
어떤 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타인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면
모두가 지는 세상이 된다.
이런 세상에서는
자신도, 회사도
잃기만 한다.
주어진 상황에
스트레스만 받는다.
설령
이긴다해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견뎌 내야 하므로
진정으로 이긴 게 아니다.
예컨대
돈이 많으면 좋겠다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돈이 생겼을때
이들에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거액의 복권에 당첨돼서
수백만 달러를 얻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당첨자들을 추적해보니 이들의 행복도가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형편없이 낮아졌음을 알아냈다. 원하던 바로 그것을 얻었지만 자살과 이온, 병, 약물중독 비율이 현저하게 증가했던 것이다. 이기기 위해 복권을 샀는데도 말이다.
어느 한쪽이 이기거나 지는 게임에서
이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상대를 패배시킨다는
의미다.
타인을 패배시키면
죄책감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긴 사람도 행복감을 느끼기 힘들다.
어느 한쪽만
이기거나 지는 상황에서는
내가 이기면
상대는 패배하므로
이런 상황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경쟁속에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존재한다.
적을 향한 두려움도 한 예다. 이로 인해 우울증이나 피해망상적인 태도가 나타날수도 있다. 요컨대 가장 낮은 의식단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진다. 이 단계는 희망없는 우울이나 피해망상적인 태도가 나타날 수도 있다.
요컨대
가장 낮은 의식단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진다.
이 단계는
희망이 없는
음울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만 이기거나 지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스트레스도 일어난다.
모두에게
유리한 관점에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엄청난 성공과 힘을 지닌 위치에
저절로 오른다.
이들의 마음속에
타인들과 도움을 주고 받는
삶의 방식이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경험하겠는가?
이런 사람은 친구가 집에 놀러와도 좋고 놀러오지 않아도 좋다. 친구가 온다고 하면 둘의 우정과 친구의 존재로 얼마나 즐거울지 생각한다. 동시에 친구가 오지 못해도 좋다. 따라서 상황이 어떻게 되든 잃은 것이 없다. 저녁을 먹으로 가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 좋고, 저녁을 먹으러 가지 못해도 자신의 삶을 향상시킬 다른 일을 할 여가를 가질수 있어서 좋다.
사업을 할때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를 품으면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성공은
삶의 향상으로 이어진다.
회사가 잘되면
고용인들도
더 잘살 수 있다.
회사가 잘돌아가면
사회에 더 많이 돌려줄 수 있고,
사회에서 쓸수 있는 제품의 질이 좋아지면
사회는 회사를 더욱 잘 뒷받침 해준다.
이렇게
사회가 회사를 잘 뒷받침해 줄수록
회사는 경제에 더욱 큰 보탬이 된다.
또
고용인들은
지원을 잘 받을수록
가족을 더 잘 부양하고
회사가 가족을 잘 살펴 줄수록
가족들도 회사를 더욱더 지지해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공하는 길은
상사를 성공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경쟁하는 대신에
상사를 성공하게 만들면
상사는 사다리 위로 올라가
우리가 승진할 기회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상사를 이기려는
의도로 경쟁적인 자세를 취하면
무의식적 불안과 고통,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적대적인 태도를
자발적으로 버리고
편단한 마음을 가지면
스트레스를 경험하는 일도 줄어둔다.
수용의 단계에서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인간의 본성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떤 대안이든 생겨나는 대로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국세청 직원이 방문하기로 하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진다. 스스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서 온갖 스트레스를 불러들인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스트레스는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존재할 뿐이다. 어느 해인가 회계 감사대상으로 뽑힌 적 있다. '음 내가 얼마나 잘해 오고 있는지 확인할 기회가 왔군"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감사받을 날을 행복하게 기다렸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낼 기회가 생긴거야. 나는 몇주동안 감사받을 준비를 했다. 멋진 공책을 사고, 특별한 자료들을 셀룰로이드 시트사이에 끼워넣은 후 전부 딱지를 붙여두었다. 국세청 직원이 흥미를 가질 거라고 회계사가 귀뜸해주었기 때문이다.
국세청 직원이 도착하자 나는 그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해 주었다. 서재로 안내한 후 가장 좋은 자리를 내주고 최고급 커피를 최고급 받침과 최고급 잔에 따라주었다. 환심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서 한 행동이었다. 회계 감사일이 얼마나 힘들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음을 쓰자 그가 정말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국세청 직원은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도 그만의 방식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는 다정하게 대화하면서 교감을 나누었다. 그는 정말로 멋진 하루를 보냈다. 그럴수 있게 돕고 나니 나도 하루가 유쾌해졌다. "오후 3시면 일어나야 하는데 정말로 가기 싫군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할일은 다 했습니다" 국세청 직원은 내게 다정하게 도움을 주었고 태도도 아주 긍정적이었다. 그의 의식속에 이런 태도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려면
위험부터 보는 버릇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음이 편안한 사람은
정말로 자신감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 본성의 부정적인 면이나 이것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들을 받아들일 줄 안다.
그래서 그것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면이나 기회들이 생겼을 때 제대로 대응할 수 있도록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혹시 모를 문제들'을 대비하고 기회를 창조한다.
막히는 차들을 뚫고 출근해야 할때
스트레스를 줄이는 간단한 방법 중 하나는
책을 한권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면
교통이 정체된 시간도
유쾌하고 반가운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차량들 사이에서 기다릴때도
즐거운 경험을 창조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
책을 읽으며
상황을 파악하고
삶을 즐기게 된다.
이웃집에 갔는데 "아이나 애완동물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이 있다고 하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웃 사람이 아이나 애완동물을 스트레스 요인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나 애완동물이 없을때 오히려 스트레스가 생긴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또 집안에서 텔레비전과 라디오, 전등을 전부 켜 놓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이들도 있다. 침묵을 좋아해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아예 켜지 않는 이들도 있다. 끊임없는 소음이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했던 것들도 스트레스를 일으킬 수도 있다.
물론
마음이 열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여러가지 다른 일들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기에
대처방안을 미리 짜둔다.
계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어쩌지?
만나기로 한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지?
처럼 상황이
예상과 달리 불리하게 돌아갈 경우를 감안해
대응책을 미리 세워두면
스트레스는 극소화되거나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
초기값의 법칙(law of initial value) 에 따르면
우리가 받는 영향은
자극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의 구조나
기존의 조건과 관련되어 있다.
자극의 강도뿐만 아니라
상호작용을 하는
유기체의 입장도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진정제 중 하나인 토라진 25밀리그램의 효과를 묻는 것은 약리학적으로 무의미한 일이다. 토라진 25밀리그램이 어떤 효과를 낼지는 환자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환자가 무딘 상태나 무감정의 단계에 있으면 25밀리그램의 진정제는 약간의 안정효과를 낼 것이다. 하지만 환자가 상당히 흥분돼 있는 상태라면 25밀리그램의 토라진은 아무효과도 없을 것이다. 한편 어느정도 불안한 상태의 사람에게는 커다란 반응이 나타날 것이다. 자극이 같아도 억압된 에너지와 태도, 믿음체계같은 환자의 현재 상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또 어떤 이들은
시끄러운 움악을 들으면 미칠 것 같다고 한다.
반면에
이어폰을 끼고 볼륨을 높여야
신이 나는 청소년들도 있다.
시끄러운 움악은
과연 스트레스를 불러올까?
원하지 않을 때의 특정한 자극이나 상황이 스트레스를 일으킨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맞는 말이다. 시끄러운 음악이 즐거움을 선사하고 기쁨과 살아있음의 상태를 더욱 북돋아 줄때에나 이런 음악을 듣고 싶어진다. 반대로 사무실에서 온종일 힘들게 일하고 나서 피곤하거나 지쳐있을때라면 시끄러운 음악은 스트레스를 불러온다. 어떤 자극이 스트레스를 불러올지 아닐지는 욕망이 결정하는 것이다.
원치 않는 것에 저항할때는
스트레스가 일어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을때는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내면에 있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간단하다.
삶에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
우리의 태도를 바꾸기만 하면 된다.
삶에 대한 사랑은
유머라는 에너지 장을 포함한다.
유머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삶 자체의 본질까지 웃어넘길수 있는
삶의 모든 희극성을 사랑하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들어있다.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익살꾼의 미덕이며,
이들은 대개 장수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은
돈키호테와 같다.
세상에서
자신의 투사물과
싸움을 계속 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모든 특질을 웃어넘기고
역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삶을 받아들이면
삶의 모든 희극적 요소로
유머의 토대를 만들 수 있다.
역설을 꿰뚫으면
그 속에서
유머를 얻는다.
삶을
기쁘고 조화롭고 편안한 것으로 경험할지
아니면 적으로 경험할지는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달려있다.
능력있고 평온한 사람들은
부러워하기보다는
우러러볼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수용이고
온전한 존재가 되는 길이다.
삶을 경험하는 태도의 근원이
자신임을 깨달으면
자신감과 확신이 생긴다.
요컨대 우리는 주인이 될 수 있다. 관리인이 나타나지 않아도 사실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삶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의식의 본질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고
내면의 생기를 즐기는데서 비롯된다.
저기 바깥의 사건들과 동일시하면서
이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때,
세상을 초월한 결과로 내면의 고요를 경험한다.
첫댓글 삶을 기쁘고 조화롭고 편안한 것으로 경험할지 아니면 적으로 경험할지는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달려있다.
고맙습니다
스트레스는 우리의 시각, 즉 우리가 마음에 품은 것과 태도, 믿음에서 비롯된다. 정서적인 스트레스는 단순히 세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우리 내면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로부터의 탈출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스트레스의 근원이 일반적으로 믿는 것처럼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이 평상시에 원인과 결과를 바라보는 방식을 뒤집어야 한다
원치 않는 것에 저항할때는 스트레스가 일어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을때는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내면에 있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간단하다. 삶에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 우리의 태도를 바꾸기만 하면 된다. 삶에 대한 사랑은 유머라는 에너지 장을 포함한다. 유머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삶 자체의 본질까지 웃어넘길수 있는 삶의 모든 희극성을 사랑하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들어있다.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익살꾼의 미덕이며, 이들은 대개 장수하는 경향이 있다
역설을 꿰뚫으면 그 속에서 유머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