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먼지가 그립다 / 안경덕
하루 이틀 청소 건너뛰는 날이 잦아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집안 먼지를 그냥 보고 있지 못했다. 창문 섀시와 창틀의 먼지도 가끔 물로 씻고 닦아 냈다. 특히 울화가 찰 때는 때 묻지 않은 옷도 꺼내어 씻고, 집안닦달했다. 화가 난 일이 많을수록 집안이 더 훤하고 장독이 반들거렸다고 해야 옳다. 세월을 많이 먹은 덕분인가. 이젠 웬만한 일에는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조급하던 마음이 느긋해진 셈이다. 시집살이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 시절엔 기와집 삼 칸 대청마루를 하루에 몇 번씩 물걸레로 무릎이 아프도록 닦아야 했고, 명절이나 제사가 다가오면 몇 날 동안 집 안팎을 대청소하느라 심신이 고달팠다. 그뿐이랴. 들판 가운데가 시가 동네였고, 우리 집은 벼농사가 많았다. 그 짚은 소 두 마리의 겨울 양식이었고, 부엌의 땔감이었다. 불 땔 때 그을림 때문에 머릿수건을 푹 눌러썼지만 검은 먼지가 콧구멍도 시커멓게 만들었다. 집 옆 공터에 쟁여놓은, 집채보다 더 크고 높은 짚단 더미에 지레 질렸다. 사철 내내 짚으로 불 땔 생각을 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끼니마다 설거지할 때도 너른 시멘트 부뚜막과 무쇠솥을, 그릇 엎어 놓는 살강을 행주로 닦아 씻은 물이 얼마나 탁했던지 먹물 같았다. 시커먼 그 구정물만으로도 텃밭의 거름이 된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였다. 나도 찌드는 느낌이었다. 설거지할 때마다 그릇 씻듯 맑은 물로 마음을 헹구었다. 그건 하얀 먼지였던 것을.
이런저런 일들이 버거웠지만 한 친구보다 마음고생 덜 한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도시에 살았던 그 친구는 제 남편이 방과 거실을 손으로 쓰다듬어 먼지가 묻어나면 여자의 할 일을 운운하는, 어느 곳 어떤 물건이든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청결 검사로 스트레스를 주는 못난이라고 했다. 차라리 먼지 있는 집이 부럽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나는 눈에 보이는 하얀 먼지 때문에 그들 사이에 검은 먼지가 쌓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너무 꼭 맞은 신발을 신었을 때 발이 편치 않다. 아내에게 집안에 먼지 하나 없게 하라는 건 발 아픈 신발을 억지로 신게 하는 것과 무어 다를까.
먼지를 예사로 보는 것은 남의 허물을 눈감아 주는 것과 맥락이 같다면 어떨까. 아무리 새 옷도 털면 먼지가 난다는 속담이 있다. 굳이 흠을 들춰내면 무결점인 이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속이 꽉 찬 배추가 맛이 덜한 것처럼 사람도 너무 완벽하면 이미지가 덜 포근해 보인다. 집안의 하얀 먼지도 훈풍이 불 때 생기지 않던가. 깊은 산 속의 절간처럼 집이 늘 조용하다면 하얀 먼지를 구경할 수도 없다. 삶의 일부가 하얀 먼지 만드는 거라면 정 나눌 일이 많을수록 좋겠다. 나는 가족이 불어나 티격태격하며 하얀 먼지가 쌓이길 소망하지만 내게 덕이 모자라서인지 바람대로 안 되고 있다.
어린 날 하얀 먼지 풀썩거리는 이불 밑에서 동생들과 네발 내 발 발치기로 장난치지 않았는가. 동기간의 우애가 이불 밑 장난에서 싹을 틔웠다면, 친구 간의 우정은 고무줄 뛰기, 구슬치기, 땅따먹기, 자치기, 팽이치기를 마당이나 골목에서 먼지 풀풀 날리며 한 그 놀이로 꽃을 피웠다. 지금 생각해도 저절로 가슴 설레고 미소가 번진다. 또 방앗간에서 밀을 빻아 왔던 할머니의 반달눈썹에 얌전히 앉은, 밀가루가 새하얀 눈 같아 웃음을 참지 못했던, 그 추억도 먼지 나듯이 고개 든다. 순 우리 밀가루를 본 것이 그때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아버지는 해마다 가을 추수를 끝내고 한 되짜리 간장병 서너 개와 작은 된장 단지를 짚으로 촘촘하게 하나씩 둘러 샀다. 소달구지에 쌀 두어 가마와 간장 된장을 얌전하게 실어 놓고, 그 사이로 짚단을 끼우고 위로도 두툼하게 쌓았다. 일찍이 홀로되어 삼 남매의 가장인 둘째 고모 댁에 가기 위해서. 고모 집이 같은 면에 있었지만 십 리가 넘는 거리였다. 황토 들길에서 소달구지 바퀴와 소 발굽에서 풀풀 피어나는 뿌연 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그래도 나는 큰 남동생과 폭삭한 짚 위에 나란하게 앉아 소달구지 타고 가는 재미에 마냥 즐겁기만 했다. 달구지가 덜컹거려 동생 손을 정답게 꼭 잡았지만, 내 마음은 고모 집에 먼저 가 있었다. 고모는 살림이 부족해도 조카와 질녀에게 푸짐하게 달걀찜을 해 주어 어서 먹고 싶어서였다. 우리 집에서는 할머니, 아버지, 오빠, 여러 동생들까지 달걀찜이 돌아가고 어머니와 내 몫은 없었기에. 아버지는 유독 소고삐에 힘주어 이랴 이랴 외치며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한시라도 빨리 고모를 만나고 싶은 절절함이었다. 눈치 빠른 소의 걸음도 담방 담방 빨라졌다.
오늘따라 큰 눈을 껌벅 껌벅이던, 고마운 그 소의 모습이 선연하다. 달구지에 그득 실렸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도 더욱 생각난다. 오라버니를 환히 반기던, 선한 고모의 고운 모습 또한 눈앞에 어른거린다. 두 분이 다감하게 나눈 따습던 그 목소리도 귓가에 쟁쟁하다. 온기 묻은, 하얀 그 먼지를 먹고 자랐던 그날들이 자꾸만 그리워진다.
우리 삶에 치명적인 매연, 황사, 미세먼지가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지고 있다. 농도의 차이가 날마다 달라지는 몹쓸 이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티브이 뉴스와 신문 기사에 심심찮게 등장할 만큼 심각성이 두드러진다. 농도 짙은 미세먼지가 바깥을 희붐하게 심술부리는 날은 창문도 열지 못하고, 외출도 삼간다. 몸만 가두는 것이 아니다. 마음마저 검은 먼지로 덮을 기세다. 미세먼지, 그 이름도 일종의 신종이다. 신종이 좋은 것도 있지만,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있다. 정체불명인 신조어가 유행하는 것도, 네 활개를 치며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신종 코로나 19를 넘어 이젠 변이의 신종 바이러스들까지 합세하여 극성을 부린다. 검은 먼지로 인해 생기는, 신新자에 붙은 양면의 칼날이 무섭다. 저항할 수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슬플 따름이다.
부모의 공을 알 때쯤 부모가 아프다는 말처럼, 이제 나도 옛날이 좋았던 게 더 많다는 것을 알 나이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