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Ashes)가 된다는 것
서 영 복
일기장을 먼 나라로 보내주었다.
“그동안 나랑 함께해주어서 참 고마웠어. 이제 안녕!”
50년도 더 넘는 시간 동안 내 곁에 머물던 보물 같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진주 ‘일년살이’ 후, 5개월 만에 진주에 다시 내려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다음 달 공연을 앞두고 마을 노인들과 한창 연극연습을 하며 바쁘고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난주 어느 날 한밤중, 기억나지 않는 어떤 꿈을 꾸다가 잠이 깨었는데 갑자기 어지럼증이 일었다. 하필 남편은 정기 건강검진을 받는다며 대전 집에 다니러 갔고, 나 혼자서 어떡하나 덜컥 겁이 났다. 어지럼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져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구토까지 일어나니 어떻게든 화장실까지는 가야 했다. 숙소 아래층에 사는 집주인 이장님을 깨우기도 미안하고, 119구급차를 부르자니 조그만 시골 동네가 발칵 뒤집힐 것을 생각해 조금만 더 참고 견뎌보기로 했다. 작은 화장실 안에서 몇 차례 토하기를 반복하고 간신히 침대로 돌아와 날이 밝아지기를 기다리다가 아침 즈음에 잠깐 잠이 들었다. 일어나 시계를 보니 어지럼증은 다섯 시간 남짓이나 나를 괴롭히다가 사라졌다.
침착하게 정신을 차려서 옷을 대충 껴입고 면 소재지의 병원에 갔다. 시골병원이지만 꽤 유명한지 젊은 의사인데도 대기 환자가 많았다. 그는 나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이곳 말씨가 아닌 것을 곧 알아차리고 대전 집 주소를 확인하더니, 왜 진주까지 와 있는지를 물었다. 오래된 일기장을 몽땅 태워 없애려다가 일주일 넘게 밤마다 그것들을 읽는 중이라는 내 말에 옆에 서 있던 간호사를 내보낸다. 그는 아예 작정하고 내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외지에서 온 낯선 노인의 이야기가 그렇게도 궁금할 일인가. 그것도 환자가 많은 평일 오전 진료 시간에?
아니 무엇보다도 나는, 한꺼번에 없애려던 그 일기장들을,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어지럼증이 나도록 다시금 들여다봤던 것일까. 혹시, 그 안에서 과거의 나로부터 무엇인가 붙들고 싶은 게 남아 있었던 것일까. 진료 후 세 시간이 넘도록 병원 물리치료실 침대에 누워 링거를 꽂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서 내린 결론은 “그냥 날려 보내자”라는 것이었다.
결혼 전의 일기장, 그곳에는 몇 년 동안의 남편과 나의 철없던, 그래서 좌충우돌하던, 하지만 순수했고 아름다웠던 무지갯빛 이야기가 가득 차 있다. 초임지 시절 시골 자취방에서 밤마다 앉은뱅이책상에 엎드려 만년필로 써 내려간 핑크빛 사연들은 시시콜콜 유치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이 범벅되어 글씨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있다.
작년 초 2월인가, 코로나가 번지기 시작할 즈음 스스로 격리를 실천하며 집콕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인생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부엌 살림살이부터 시작해 장롱 속과 집안 곳곳 수납장을 정리했고, 다섯 개의 책장에 가득한 사진 앨범과 그동안 모아온 책들이 아파트 밖으로 줄줄이 실려 나갔다. 하지만 침대 밑에 쌓아두었던 47권의 가계부와 수십 권의 여행 노트, 그리고 꽁꽁 묶어 숨겨두었던 빛바랜 일기장 보관 상자를 어떻게 처리할까를 두고는 많이 망설였다. 그러다가 일기장은 태워서 보내주기로 마음먹고 이곳 시골살이에 데리고 온 것이다. 하지만 나무 장작 때듯 쿨하게 훨훨 태우지 못하고 한 권씩 다시 펼쳐서는 몇 날 며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그때 그 시간 속으로 몰입하게 되고, 내 몸이 먼저 그만 번아웃이 되어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된 것 아닌가.
이곳 진주의 숙소에는 나의 몸뿐 아니라 마음조차 따뜻하게 녹여주는 화목보일러가 있다. 집주인 이장님은 매일 저녁나절과 새벽녘에 보일러 안으로 통나무 장작을 넣어준다. 병원 다녀온 다음 날 오후, 기세 좋게 타오르는 화목보일러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 안에 나의 그것들을 미련 없이 던져 넣었다. 모두 기다렸다는 듯 활활 타올라 재가 되어갔다.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생후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 객지생활을 하며 엄마에게 쓰던 편지며 언니 오빠를 보고 싶어 하던 일, 처음 시작해보는 교단생활과 아이들과의 이야기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만 같아 눈물이 줄줄 흐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그냥 보내주자. 아름답고 예쁜 기억은 아름답고 예쁜 그대로, 슬프고 아픈 기억은 슬프고 아픈 그대로, 나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겠구나. 어쩌면 저 아이들도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몇 달 전 청도에서의 시골살이 때 목격했던 일이 떠올랐다. 숙소 가까이에 있던 빈집 한 채가 굴착기의 굉음 속에서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혼자 사시던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셨다가 그만 돌아가셨는데, 그 집 손자가 와서 백 년이나 되었음 직한 집 한 채를 쇳덩어리 짐승에게 쾌히 내어주고 말았다. 한 사람 아니 오순도순 된장국을 끓여 먹으며 하하 호호 웃던 가족들의 보금자리가 목구멍에 침 한번 꼴깍 삼키는 사이에 할머니를 따라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그래야 했다. 모든 것은 세월을 따라 함께 가야 했다. 나의 일기장은 나보다 앞서 날아갔다. 비로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재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일까? 아니다. 깨끗한 밥그릇 위에 앉으면 ‘재 뿌리는 것’이 되지만 꼭 필요한 곳에 쓰여 질 때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 되어 보배롭게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굽은 나무도 선산을 지키지 않는가.
시골살이하다 보니 재가 토양을 살리는 꽤 고마운 역할을 한다는 걸 알았다.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는 내 생의 나머지는, 타고 남은 재처럼 조용하게 앉아 흙을 살리듯 꼭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박수 받고, 칭찬받으며 빛나던 꽃들은 씨앗이 되어 재와 함께 땅에 묻혀 썩어져야 했다. 그래야 다시 싹이 나고 새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제 앞길의 인생 동안 내 기억 창고에는 아름답게 기억되는 수많은 씨앗이 살아 있는 것이다. 치만 죽어야 살 수 있다. 재가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