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프라이드 치킨이 세계에서 가장 맛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치맥을 생각하면 그럴만하다는 게 정석, 그런데 알고 보면 프라이드 치킨은 미국 흑인 노예들의 지옥같은 삶 속에서 만들어진거란다.
이에 대한 배경은 18세기 미국 남부,
그 중에서도 나중에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으로 유명한 켄터키주가 원조로 가장 유력하다.
당시 노예를 부리던 미국의 농장주들은 장작 오븐에 구운 닭요리를 즐렸다.
그런데 이들은 가슴살 등의 몸통과 다리만 먹고 나머지는 버렸다고 한다.
날개나 닭발, 목 등은 뼈가 많아 포크와 나이프로 발라 먹기 힘들어서다.
버려진 건 자연히 흑인 노예들의 차지가 되었다.
흑인들은 버려진 부위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굽자니 오븐이 없고, 그냥 먹자니 뼈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닭을 튀기는 것이었다.
마침 기름에 튀기는 요리법은 스코틀랜드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에 전파된 상태였다.
흑인 노예들은 이를 응용해 딥프라잉(DEEP FRYING)방식을 개발했다.
딥프라잉은 오늘날의 닭튀김과 거의 비슷하다.
기름을 아끼지 않고 펄펄 끓는 다량의 기름에 닭을 푹 담가 짧은 시간에 조리해 내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가능했던 이유는 켄터키에 돼지기름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켄터키주는 돼지고기의 고향이라고 불릴 정도로 양돈업이 중심이었다.
그래서 이 흔해 빠진 돼지기름을 노예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돼지기름으로 오븐을 대신한 흑인들은 곧이어 살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해결했다.
백인들이 먹다 남긴 닭고기에 밀가루 반죽을 입혀 튀겨낸 것이다.
그리고 들판에 널린 허브를 뿌려 냄새까지 먹음직스럽게 만들어냈다.
이덕에 흑인들은 고열량의 프라이드 치킨을 뼈까지도 먹을 수 있었다.
온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흑인 노예들에겐 이만한 에너지원도 없었다.
노예 해방이 되어서도 흑인들이 키울 수 있는 가축은 닭뿐이었다.
소나 돼지를 키우고 싶어도 백인이 독점하고 있어서 사료를 조달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인종차별도 여전해서 레스토랑을 드나들 수도 없었다.
흑인들은 어딜가든 도시락을 싸서 다녀야 했다.
이럴때 치킨은 장시간 보관이 가능하고 간편하게 먹을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프라이드 치킨은 흑인들과 애환을 함께 하면서 점차 소울푸드가 되어갔다.
한편, 백인들은 이 군침도는 프라이드 치킨을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다.
흑인의 음식이라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세기가 되어서야 백인 노동자들이 먼저 그 맛에 빠지게 되었고 켄터키에 살던 커널 샌더스가 KFC라는 프랜차이즈를 열면서 미국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프라이드 치킨은 전 세계인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수박도 흑인 노예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수박은 조롱과 비하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흑인들을 괴롭혀 왔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이런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기간 내내 그를 비방하는 백인들은 오바마와 수박을 합성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옛날부터 수박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수박의 풍성한 과즙으로 손과 입은 물론 심지어 옷까지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이다. 귀족 부인이 씨를 뺕어내는 것도 그리 우아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수박을 즐기는 아랍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은 늘 놀림감이 되면서 수박은 가난한 자들의 음식으로 인식이 굳어져 갔다.
미국에서 수박은 흑인들을 실은 노예 무역선과 함께 들어왔다.
값싼 수박을 먹이며 배로 실어온 것이다.
흑인 노예들은 자신이 일하던 농장 안쪽에 수박을 심을 수 있었다.
백인 농장주들은 은혜를 베풀듯 이를 허용했다.
노예선에서처럼 식량비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수박은 19세기 후반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갑자기 흑인을 멸시하는 상징이 되었다.
해방된 흑인들은 생계를 위해 수박을 재배하고 이를 시장에 내다팔았다.
개중에는 제법 장사에 성공한 흑인들도 있었다.
이 때부터 백인들은 흑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자립을 이루게 한 수박은 흑인들에게는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 다수의 백인에게 수박은 흑인에 대한 지배력 상실을 확인함과 동시에 위협으로 비추어졌다.
백인들은 즉각 수박을 빈곤과 더러움 그리고 게으름의 상징으로 만들어 나갔다.
수박이 재배가 쉽고 수박을 먹으면 주변이 온통 지저분해진다는 걸 강조한 것이다.
신문은 물론 그림엽서와 애니메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이를 반복하면서 수박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을 공고히 만들어 나갔다.
심지어 이때 유행한 말 중에 '임신한 흑인 여성은 씨를 품은 수박과 같다'라는 표현도 있었다.
그럼에도 수박은 이제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과일이 되었다.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라도 기피하던 유럽에서도 점점 더워지는 요즘 수박 없는 여름은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바베큐도 흑인 노예들이 만든 음식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백인들이 먹다 남긴 고기를 조리 시설이 없는 흑인들이 밖에서 장작불로 구워 먹은 게 바베큐로 발전했다는 것인데, 바베큐는 방목으로 인한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조리법으로 이미 미국 남부 백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다만, 바베큐는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요리를 담당한 것은 주로 흑인 노예들이었을 뿐이다.
오늘날 핏자만큼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음식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 출발은 역시 빈자들의 음식이었다.
태생지 자체도 식당이 아니라 이탈리아 나폴리 길거리였다.
로마 때부터 이탈리아에는 납작한 빵 위에 여러 음식을 올려놓고 먹는 전통이 있었다.
핏자의 원형이다.
이를 바탕으로 나폴리에서는 밀가루 빵 위에 돼지기름과 마늘, 소금을 올린 단촐한 핏자를 만들어냈다.
집에 화덕이 없던 나폴리의 어부들은 아침에 항구에 나와 길에 선 채로 이 핏자를 먹고 배에 오르곤 했다.
그래서 나폴리 최초의 핏자는 뱃사람의 핏자라는 뜻으로 '마리나라'라고 불렸다.
18세기 초반이다.
가난한 나폴리의 어부들은 한 판을 다 살 여유가 없어 한 두 조각으로 허기를 때우기도 했다.
어부들이 쉽게 사 먹을 수 있도록 미리 잘라 놓은 게 지금의 8조각으로 나뉜 핏자의 원형이다.
그마저도 핏자를 살 수 없는 어부들에게는 외상을 주었다.
대개 일주일 뒤에 갚는다 하여 나폴리 어부들은 마리나라 핏자를 8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나폴리 핏자는 당시의 요리책에 소개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음식 취급을 받지 못했다.
피노키오를 쓴 이탈리아 작가인 '카를로 콜로디는' 아예 '노점상에 어울리는 오물덩어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듯 쓰레기 취급을 받던 핏자가 파스타와 함께 이탈리아의 국민 음식이 된 것은 마리 게리타 왕비 덕이 컸다.
1889년 나폴리를 방문한 이탈리아 국왕의 왕비가 한 장인이 만든 핏자를 먹고 그 맛을 극찬했던 거다.
빨간 토마토, 흰 모짜렐라 치즈, 녹색의 바질로 토핑해 이탈리아 국기의 3색을 나타냈는데 이게 그 유명한 마리게리타 핏자이다.
이 후 핏자는 이탈리아의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에도 소개가 되었다.
2차 대전 당시 본토 핏자 맛을 봤던 이탈리아 주둔 군인들과 핏자 광이었던 이탈리아계의 여배우 소피아 로렌, 전설적인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 등에 의해 더 널리 알려지면서 핏자는 미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평양에도 핏자 점이 생길 정도로 명실상부한 세계 모든 사람의 음식이 되었다.
빈자의 음식이라면 영국의 피시앤칩스를 빼놓을 수 없다.
딱 봐도 차마 요리라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빈곤해 보인다.
흰살 생선튀김에 감자 튀김을 곁들인 게 전부니까.
거듭 말하지만 산업 혁명기에 살았던 일반인들의 삶은 영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무척 고되었다.
산업혁명의 덕을 봐 윤택한 삶을 살았던 이는 100년이 지나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오죽하면 칼 마르크스는 19세기의 영국 노동자들을 고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임금 노예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허구헌날 삶은 감자를 으깨는 멀건 밀가루죽으로 하루 16시간의 노동을 견뎌야 했다.
이런 현실에 두툼함 밀가루를 입힌 생선튀김과 감자튀김 요리의 등장은 마치 하늘의 구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거리에 서서 먹을 수 있으니 시간도 앆일 수 있었고 미국 흑인 노예들의 프라이드 치킨처럼 돼지기름으로 튀겨냈으니 열량도 만땅이었다.
더구나 마침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증기선과 증기기차가 신선한 생선을 대량으로 공급해 준 덕에 값도 쌌다.
그래서 1984의 저자 조지오웰은 영국에서 프랑스 혁명 같은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피시앤 칩스때문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충분히 일리가 있다.
1860년대 런던의 방직 공장 지대에서 시작된 피시앤칩스 열풍은 40여년이 지난 1900년대 영국 전역으로 퍼져 피시앤칩스 음식점이 3만개 이상이 되었고 태앙이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면서 빈자들의 보잘 것 없는 음식이었던 피시앤칩스는 순식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뭐니뭐니 해도 랍스터만큼 신분이 뒤바뀐 음식은 없을 것이다.
요즘 시대에 믿기 어렵겠지만 랍스터는 하인들과 심지어 죄수들에게나 먹이던 싸구려 중에 싸구려 음식이었다.
17세기 초에는 한창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였다.
매사추세츠주의 농장 하인들이 전면 파업에 나섰다.
빵 대신 랍스터를 준게 그 원인이었다.
주 정부의 중재하에 농장주와 하인 사이에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그 주 내용은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랍스터를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17세기 후반부터 죄수들을 미국으로 유배보냈다.
미국이 독립하고 나서는 호주로 보냈고, 암튼 이들의 강제 노동이 식민지 개척에 한몫을 했다.
100여년간 약 6만명이나 되었는데 이들의 식사 역시 허구헌날 랍스터였다.
당시 미국의 동부 해안가는 랍스터 천지였다. 그냥 줍기만 하면 순식간에 수백명분의 식량을 마련할 수 있었다.
얼마나 흔했던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걸 밭의 비료로 사용했고 캐나다 동부의 뉴런들랜드에서는 20세기중반까지 랍스터를 돼지 사료로 사용했다.
처음 미국에 온 정착민들도 해안가에 벌레처럼 쌓인 랍스터를 'BUG'라 부르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랍스터 이처럼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건 한마디로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조리법을 몰라서 그냥 물에 푹 삶아 줬으니 맛이 날리가 없었던 것
이러던 랍스터는 19세기 후반에 통조림의 개발과 철도 부설로 내륙지방에서 불티나게 팔리면서 점차 귀한 몸이 되어 갔다.
그리고 지금은 가난한 자들이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만큼 부를 상징하는 음식으로 격상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nUZL_wWE7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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