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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成長과 學問 秋史 金正喜는 金魯敬(당시 21세)과 金堤 郡守 兪駿柱의 딸인 杞溪 兪氏(당시 19세) 사이의 장남으로 1786년(정조 10)에 忠南 禮山郡 新岩面 龍宮里에서 태어났다. 고려말 충절을 지킨 桑村 金自粹를 중시조로 하는 慶州 金氏로 그의 5대손인 堧(연 1494-?)이 가야산 밑 한다리에 터를 잡아 子孫世居之地로 삼은 데서부터 한다리 金門으로 불린다. 특히 弘郁(1602-1654)이 鳳林大君에게 왕위가 넘어가는 과정에서 무고를 받아 죽은 昭顯世子의 妃 姜嬪의 寃獄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성리학적 명분론을 명쾌히 제시하다 장살당한 후 士林의 추앙을 받으면서 國中名門으로 성장했다. 특히 홍욱의 장증손인 興慶(1677-1750)은 영의정을 지내고 흥경의 말자 月城尉 漢藎(1720-1758)은 영조의 장녀 和順翁主에게 장가들어 왕실과도 인연을 맺게되었다. 추사는 伯父 魯永과 교유가 깊었던 朴齊家(1750-1805)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고조 興慶, 증조 漢藎, 조부 柱, 부친 魯敬이 모두 명필 소리를 들을 만한 필재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추사도 7세 되던 해에 쓴 立春帖을 본 蔡濟恭으로부터 장차 명필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기도 했다. 척족세도를 뿌리뽑기 위해 자신의 외척세력을 꺾은 正祖의 내척세력 정리 계획으로 추사 가문도 伯父 魯永이 파직 유배되는 등 가화를 입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仲父 魯成, 祖母 海平 尹氏, 伯父 魯永, 祖父 n柱가 잇따라 타계하자 추사는 백부 노영에게 출계하여 월성위가의 새 주인이 되었다. 정조의 훙거로 추사의 12촌 증대고모인 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월성위궁은 활기를 되찾았으나 연이어 어머니, 스승 박제가, 양모인 南陽 洪氏의 죽음과 첫 부인 韓山 李氏와의 사별 등 불행이 겹치는 어려운 시기를 학예수련으로 극복했다. 그러다 23세에 人物性同論을 주장하여 湖洛論爭의 단초를 연 魏岩 李柬의 고손녀인 禮安 李氏와 재혼했다. 이듬해에는 생원시에 합격하여 冬至副使로 燕行하는 생부 魯敬을 수행하여 子弟軍官으로 燕京으로 가게된다. 이미 스승 박제가로부터 들어 연경 학예계의 동정을 소상히 알고있던 추사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신예한 관점에 경도된 阮元과 사제지의를 맺고 금석학에 대한 진귀품을 열람하고 많은 도서를 기증받았다. 이에 감복한 추사는 자신의 별호를 阮堂이라하여 사제관계를 분명히 했다. 또한 연경학예계를 대표하는 翁方鋼의 金石 8만권이 소장되어 있는 石墨書樓을 방문했다. 추사의 천재성과 기백에 넘치는 학구열에 감복한 옹방강은 "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고 즉석에서 휘호하여 사제지의를 맺고 자신의 학통을 전수하려 했다. 추사는 옹 완을 비롯한 청조 학예계의 중추들과의 학문, 예술에 대한 담론을 통하여 자신의 학예수련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經學, 史學 및 佛敎를 비롯한 諸子百家와 天文, 地理, 音韻, 算術에까지 박통하고 詩文 書畵에 능한 것은 물론 金石考證과 書畵骨董의 감식에도 뛰어나 그야말로 다예다능한 一世通儒를 자처할 만하였다. 특히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하고 비의 글자를 審定하였으며 慶州 무藏寺碑 단편을 찾아내는 등 금석고증에 열중하여 1832년(47세)에 {禮堂金石過眼錄}을 저술하기도 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藝文館 檢閱과 奎章閣 待敎를 거쳐 41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庇仁 縣監 金遇明을 봉고파직하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5품으로 승급했다. 그기다가 純祖 27년 부터는 왕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추사가문을 각별히 생각하여 가문이 영화를 누리는 듯 했으나 왕세자의 급서 후 김우명의 탄핵 등 안동 김씨 세력의 맹공을 받아 생부 魯敬은 古今島에 위리안치되는 화를 당하였다가 순조33년(1833)에 풀려났으나 1838년에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추사 형제에 대한 처벌은 없어 추사는 51세되던 憲宗 2년에 成均館 大司成을 거쳐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때 헌종은 친정을 도모하면서 趙寅永을 右議政, 權敦仁을 吏曹判書에 중용하고 추사를 冬至副使로 임명하자 위기를 느낀 안동 김씨는 특히 청조 학예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추사의 燕行은 기필코 저지해야 했다. 그래서 尹尙度 獄을 재론하여 무고한 추사를 禁府로 압송하여 사지로 몰아넣었으나 다행히 조인영의 노력으로 감사일등하여 제주도 大靜縣에 위리안치되었다. 秋史 家系圖 自粹 (고려 충청관찰사 순절) 堧 (安州 牧使) 弘郁 (황해도 관찰사) 世珍 孝珍(황간현감) 斗星 斗井 斗奎 斗壁 (생원) (생원) (낭천현감) (영유현령) 興慶 愼慶 寅慶 潤慶 濬慶 淳慶 (영의정) (첨지중추부사) 漢楨 漢佐 漢佑 漢藎 漢亮 (연안부사) (월성위) (생원) 泰柱 恒柱 n柱 健柱 n柱 一柱 (출계) (우참찬) 魯永 魯成 魯明 魯敬 魯巖 (예조참판) (수원판관) (이조판서) 正喜 敎喜 正喜 命喜 相喜 泰喜 (병조참판) (이조참의) (출계) (강동현령) (호조별랑) 商懋 商佑 商默 商懋 (생원) (서자) (참봉) (출계) 翰濟 翰濟 有濟 2. 제주도 유배 추사의 유배지
옥리의 추국을 당하는 당시의 참담한 심정을 추사는 '행색이 욕된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없었고 그 다음은 나무에 꿰어 회초리를 맞는 욕을 당하는 고통인데 두 가지를 다 당하였습니다. 40일 동안 이와같이 참혹하게 당한 일이 고금의 어느 곳인들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그의 지우인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이런 곤욕에도 오히려 굳센 신념을 붓 끝에 올려 불굴의 의지를 태연히 화폭에 담는 자약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제주로 가는 도중 남원에서 그린 「모질도(`s圖)」이러한 당시의 추사 풍모를 대변해 준다. 제주도로 건너가는 뱃길에서 추사는 자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당시의 정경을 전해주는 문인 閔奎鎬의 표현을 빌어보면 「제주도는 옛날의 탐라국으로 바다가 그 사이에 있는데 매우 크고 또한 바람이 많아서 사람들이 건너가려면 항상 열흘이나 한달을 잡았었다. 공이 막 건너가는데 바람과 파도가 일어나는 중에 천둥과 번개가 곁들여 죽고 사는 것을쏛 예측할 수 없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어 부둥켜 안고 부르짖으며 도사공 역시 다리를 떨며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공이 꼿꼿이 뱃머리에 앉아서 시를 지어 높게 읊으니 소리는 바람과 파도에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곧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도사공아 힘껏 키를 잡고 저쪽으로 가라'하니 배는 이미 빠르게 달려가 아침에 떠났는데 저녁에 제주도에 닿았었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날아서 건너왔다고 하였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제주도에 도착하여 대정 배소를 찾아가게 되는데 추사의 예술가다운 감수성은 제주도의 남국 정취에 취하여 문득 자신의 처지도 잊고 망연히 이에 빠져들었다. 둘째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노정의 반쯤은 모두 돌길이라서 사람과 말이 비록 발붙이기가 어려웠지만 이를 자나자 조금 평평해지더군. 그리고 또 밀림의 무성한 그늘 속을 지나는데 겨우 한가닥 햇빛이 통할 뿐이나 모두 아름다운 나무들로서 겨울에도 푸르러 시들지 않고 있었으며 간혹 단풍든 수풀이 있어도 새빨간 빛이라서 또한 육지의 단풍잎과 달랐네. 매우 사랑스러워 구경할 만하였으나 엄한 길이 매우 바쁘니 무슨 흥취가 있겠으며 하물며 어떻게 흥취를 돋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갇혀 살아야 할 집에 대해서도 「정군이 먼저 가서 宋啓純이라는 포교의 집을 얻어서 머물 곳으로 하였는데 이집은 과연 읍 아래의 조금 좋은 곳에 위치하여 있으며 정갈하고 윤택하였네. 온돌방은 한간이나 남향으로 눈썹같은 툇마루가 있고 동쪽에는 작은 부엌이 있으며 작은 부엌 북쪽에는 두간쯤 되는 부엌이 있고 또 광이 한간 있으니 이것은 바깥채일세. 그리고 또 안채도 이아같은 것이 있는데 안채는 곧 주인으로 하여금 옛과 같이 살게 하고 있네. 다만 이미 바깥채를 반분하여 나누었어도 족히 살만하니 작은 부엌을 온돌방으로 고치면 손님이나 종들이 또 들어가 살 수 있으며 이것은 변통하기 어렵지 않다고 하네. 울타리 두르는 것은 집의 형태를 쫓아서 하였는데 섬돌 사이에 또한 밥을 날라올 수 있는 곳을 터놓았으니 분수에 지나칠 뿐일세.」라고 기분좋게 묘사하고 있으니 이는 추사의 아름다움에 취하면 짐짓 모든 것을 잊고 그에 몰두하여 자족할 수 있는 예술가다운 천진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면이다. 김정희가 적거생활을 했던 대정읍에는 현대식 건물로 단장한 유적관리사무실이 들어서 있어서 약간 생경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유배 당시 그가 거처했던 건물은 잘 복원되어 있다. 앞쪽으로 추사의 謫盧遺墟碑가 세워져 있고, 그의 간단한 유품과 필적을 전시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당시 유배온 추사는 지역 유림들과도 돈독한 교분관계를 가졌는데 추사가 떠난 뒤 지역 유림들은 유허비를 세워 영원히 그를 가리고자 했다. 추사가 생활했던 초가는 안방, 건넌방, 사랑채 할 것 없이 제주의 여느 집과 다를 바가 없어서 그의 검소하고 소박한 일면을 보는 듯했다. 추사는 유배지 제주에 도착한 즉시 이곳 대정읍의 교리 송계순의 집에 거쳐를 정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다시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 복원돼 있는 자리다. 귀양살이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막내 아우 相喜의 주선으로 家藏의 각종 장서와 權敦仁, 趙寅永의 비호아래 문인 李尙迪(1804-1865)이 역관으로 중국에 왕래하면서 보내오는 신간서적을 계속 공급받아 학문 연구와 藝道에 몰두하게 된다. 이때 이상적의 우의에 감격하여 松栢의 절조로 그의 高節을 표현함으로써 감사를 대신한 [歲寒圖]는 拙撲無俗하여 한 티끌도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는 至高의 경지를 보여준다. 「지난해 晩學 大雲의 二書를 보내오고 올해에 또 藕전문편을 보내오지, 이는 세상에 늘 있는 일이 아니다. 천만리나 먼 곳에서 구하여 몇 년이 걸려 얻었으니 일시의 일이 아니다. 도도한 세상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쫓는데 마음과 노력을 씀이 이와 같아, 권세와 이익을 찾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한 사람을 따르기를 세상의 건리 따르는 것처럼 했구나.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이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도 멀어진다.'고 하였다. 그래도 도도한 세상 속의 한 사람인데, 도도한 권세와 이익의 밖에 초연히 벗어나 있으니,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은 것인다,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는 '날이 추워진 뒤에라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고 하였다. 소나무 잣나무는 사철을 두고 시들지 않는다. 날이 추어지기 전에도,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은 소나무 잣나무이다. 성인은 특히 날이 추워진 뒤의 소나무 잣나무를 칭송한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이 전보다 더함이 없고 뒤라 하여 덜한 바도 없다. 그러나 전날의 그대는 칭찬받을 것이 없어도 오늘의 그대는 성인에게 칭찬받을 바가 없겠는가! 성인의 특별한 칭송은 한갓 뒤에 시드는 貞操와 勁節 때문만이 아니고 역시 날이 추워진 시적에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다. 오호라 西京(前漢)의 순후하던 세상, 汲i"과 鄭같은 현자들도 빈객과의 성쇠가 있었거늘 하경에 방문을 붙인 일 같은 것은 박절함의 극치이다. 슬프다. 완당 노인은 쓰다.] 이는 9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됫박만한 한간방에 갇힌 채 보내야 하는 그 인고의 생활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그 사이 30여년 동거의 정이 있는 부인 예안 이씨가 돌아가서 생이사별의 통한을 품게 되고, 종형 교희와 사촌누님의 부음을 받기도 하며 환갑을 적소에서 쓸쓸히 보내야 하는 처량함도 맛보아야 했다. 이러한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고통을 추사는 독서로 극복하고 서화로 승화시켰다. 따라서 그의 예술세계는 범상한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탈속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그의 작품은 청경고아하고 삼엄졸박한 특징을 나타내게 된다. 국왕 이하 諸名公들이 추사의 작품을 요구해 왔고 권돈인을 비롯한 친지와 申觀浩, 趙熙龍 같은 제자들이 명품의 감정과 작품의 품평을 자문하는 인편이 끊이지 않았으며 草衣와 小癡 許維, 秋琴 姜瑋 등이 문안하며 학문을 청하였다. 유배 생활중 부인 예안 이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애절하고 비통한 마음을 한편의 시를 지어 작고한 부인의 명복을 빌었다. [壬寅年 11월 13일 丁巳에 부인이 예산의 묘막에서 운명하였으나 다음달 15일 己丑 저녁에야 비로소 부고가 바다 건너 나에게 전해져, 지아비 김정희는 상복을 갖추고 슬피 통곡합니다. 살아서 헤어져, 다시 죽음으로 갈라서게 된 것을 슬퍼하고, 영원히 간 길을 쫓을 수 없어 한이 뼈에 사무쳐 몇 줄 글을 엮어 집으로 보냅니다. 글이 집에 도착하는 날 나는 부인의 영전 앞에 이렇게 고할 것입니다. 아아, 나는 차꼬가 앞에 있고 산과 바다가 뒤를 따랐으나 아직까지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아내의 죽음에 놀라 가슴이 무너져 마음을 잡을 수 없으니 이 어인 까닭입니까! 아아, 사람마다 모두 죽음이 있거늘, 오직 부인의 죽음만이 있으리오만 죽어선 안 되는데 죽은 까닭으로 죽어 지극한 슬픔과 기막힌 원한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 한은 풀어내면 무지개가 될 것이고, 맺히면 우박이 될 것이므로 족히 공자님의 마음이라도 움직일 수 있겠기에 차고보다 더 심하고 산과 바다보다도 더 심함이 있는가 봅니다. 아아, 30년 동안 효를 다하고, 덕을 쌓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고, 친구 아닌 남들까지도 감격하여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부인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떳떳한 일이라 하고 칭찬받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내가 말하기를 부인이 만약 죽으려면 나보다 먼저 죽는 것이 도리어 더 좋을 것이라고 했더니, 부인은 크게 놀라서 이 말이 내 입에서 나기가 무섭게 곧 귀를 막고 멀리 가버려 더 이상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세속의 부녀자들이 크게 싫어하는 것이겠으나 그 실상은 이런 것이니, 내 말을 끝까지 장난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결국 부인이 먼저 죽었습니다. 먼저 죽은 것이 무엇이 시원하겠습니까! 내 두 눈으로 홀아비가 되어 홀로 사는 것을 보게 할 뿐이니 푸른 바다 넓은 하늘에 한스러움만 끝없이 사무치구려.] 추사 학예관을 흠모하던 憲宗의 배려로 안동김씨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848년 9년간의 유배에서 풀린다. 그러나 헌종이 후사없이 폭훙하자 안동 김씨 純元大妃는 강화에 유폐되어 있던 思悼世子의 서자인 恩彦君의 손자 元範을 순종에게 入承케 하여 보위에 오르게하고 수렴청정으로 대권을 장악했다. 이런 안동 김씨의 無法擅斷을 좌시할 수 없었던지 영의정 권돈인이 哲宗의 등극이 항렬에 맞지 않아 정당치 못하다고 문제를 재기했다. 이에 안동 김씨는 권돈인을 狼川에 유배하고 추사를 배후 발설자로 지목하여 1851년 66세의 추사를 北靑으로 유배하는 한편 두 아우 命喜, 相喜를 고향으로 내쫓았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린 추사는 藝道와 불교 신앙 생활에 몰두하다 1856년 철종 7년 10월 10일에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1867년에 문인 南秉吉이 {阮堂尺牘} 2권 2책과 {覃연齊詩集} 7권 2책을 간행했고, 1868년에는 문인 남병길과 閔奎鎬가 {阮堂先生集} 5권 5책을 간행했으며 1934년 김상희의 현손 翊煥이 {阮堂先生全集} 10권 5책을 간행했다. 3. 中國 書藝史의 흐름 書藝라는 예술 분야는 어느 문화권에도 존재하지 않는 중국 문화권 특히 유교 문화권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예술이다. 이런 중국 書藝史는 19세기 말 이래 활발히 전개된 殷墟의 발굴 결과 많은 金文과 甲骨文이 새겨진 靑銅器와 龜甲이 출토됨으로써 殷代(B.C 1401)로부터 서장을 열게 된다. 殷代의 문자는 물상을 형용한 象形文字로 圖畵的인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周代(B.C 1122)의 金文에서는 점차 문자 본연의 의미인 符號的 성격이 강화되고 東周(B.C 781)에 이르면 이런 현상은 가속화되어 春秋時代(B.C 722)에는 거의 도화적 성격이 사라지고 문자체제를 완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문자는 각국의 문화 성격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나타내었으니 西周의 옛땅인 秦에서는 宗周文字의 정통을 이은 유문을 쓰게 되고 孔子의 출생지인 齊魯지역에서는 古文을 쓰게 되었다. 따라서 殷周의 古銅器에 새겨진 金文이나 石鼓文은 유문계에 속하고 춘추시대 이후 戰國時代(B.C 403)에 걸쳐 齊魯지방에서 만들어진 고동기나 화폐에 새겨진 금문은 고문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秦이 통일 이후(B.C 221) 문자 통일을 위해 만들어낸 小篆體는 바로 석고문과 같은 유문(大篆)을 취하면서 획수를 크게 생략하고 고문의 특성도 일부 받아들여 개량한 발전된 서체였다. 따라서 회화성은 거의 다 사라져서 문자적 의미가 크게 강조되었다. 이는 前漢(B.C 206)으로 계승되면서 공식문자화하여 正書의 위치를 누리게 되는데 유교사상이 漢제국의 통치이념으로 확고한 기반을 다지는 武帝(B.C140-87) 때부터는 齊魯문화 전통을 이은 동방문자의 영향과 문자 발전의 당연한 추세에 의해서 정서인 小篆體 즉 秦隸體는 점차 도화적인 원형미를 상실하면서 方扁味가 강조되어 글자의 모서리가 예각으로 날카롭게 꺾이는 변화를 보여간다. 이렇게 이루어진 서체를 정서인 소전체에 예속한 時體라 하여 역시 隸書로 부르게 되었다. 서예는 유교 문화가 爛漫한 발전을 이루는 後漢(25-220)에 극성을 이루는데 이는 유교 윤리관이 근본 면목을 상실하면서 형식에 치우쳐가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조상에 대한 孝나 師長에 대한 염취를 과시하기 위하여 碑文치레를 경쟁적으로 해나갔기 때문이다. 비문 치레를 위해서는 명필 명문장이 요구되는데 명필을 요구하다 보니 楷正한 표현 이상의 예술성까지 희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속에서 紙筆墨의 발명과 개량으로 명필 능서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출현하여 삽시간에 서예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려놓은 것이다. 서예 예술은 곧 절정에 달하게 되고 그래서 격조높고 귀족적인 특징을 보이는 필체도 있고 격식이나 巧拙에 구애되지 않는 분방성을 보이는 것도 있으며 유연하고 정취있는 필치를 보이는 글씨체도 있게 되었는데 어느 것이나 붓을 들고 누르는데(부앙) 따른 좌우 삐침(波걸)과 대고 떼는데 있어서 돋우는 법(挑法)을 쓰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이는 지필묵이라는 재료의 공통된 성격에서 오는 자연스런 양식의 출현이라고 파악할 수 있는데 이런 서체를 八分書라고 부르게 된다. 팔분서가 일반화되어 正書가 되고 漢隸는 古隸라는 이름으로 사문자화하여 이제부터는 팔분서가 한예로 지칭되게된다. 이 시기 漢碑의 뛰어난 예술성이 淸代 중기의 碑派書學家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자는 예술 작품이기 이전에 문자적 기능이 있으므로 점차 속기나 정서의 발전은 東晉의 王羲之(307-365)에 의해서 마무리 되는바 그를 書聖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서체는 왕희지 이후 오늘날까지 거의 변화가 없고 다만 각 개인의 개성있는 글씨체인 필체의 변화가 있게 된 것이다. 필체 역시 왕희지체가 근본이 되어왔으니 楷書의 極則을 보인 初唐 삼대가인 虞世南(558∼638) 歐陽詢(557∼641) po遂良(596∼685)이 모두 왕희지 필법을 계승하였고 이들을 길러낸 唐 太宗이 왕희지체를 필법의 기준으로 삼자 이후부터 왕희지체가 祖本이 되었다. 이에 왕희지 글씨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그의 글씨로 法帖을 만들어 교본으로 삼게 되고 이런 것들을 계속 배껴가는 동안에 점차 원형을 상실해가게 된다. 그래서 원첩을 보고 글씨를 배운 사람과 모본을 보고 배운 사람은 서로 다른 글씨를 배운 것만큼이나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서풍이 달라지면 항상 다시 올바른 왕희지로의 복귀를 주장하면서 새로운 글씨체를 내놓게 되는 것이다. 元代 趙孟부(1254-1322)의 松雪體가 그렇고 明代 董其昌(1555-1636)體도 그러하다. 4. 朝鮮 書藝의 흐름 우리나라도 통일신라와 고려 문화의 극성기에 귀족적인 취향과 함께 유행했던 왕희지체는 元지배 이후 萬卷堂에서 趙孟부의 영향아래 중국 문화를 직수입하면서부터 松雪體로 점차 바뀌게 되는데 이 만권당에서 길러진 성리학자계열들이 장차 조선을 건국하게 되자 조선은 처음부터 송설체 일색으로 출발하게 된다. 麗末의 杏村 李암과 조선초 安平大君은 송설체의 대가로 꼽히며, 文宗, 成宗을 비롯한 姜希顔, 李澤, 李山海등이 배출되어 송설체는 조선 서체로 토착화되는 느낌마저 들게 되었다. 그러나 주자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이해되면서 자기서체의 형성이 이루어지니 自庵 金絿(1488-1534)가 왕희지체와 방불한 仁壽體를 이룬 것을 필두로 聽松 成守琛(1493-1564)의 聽松體를 비롯하여 退溪 李滉, 河西 金麟厚, 牛溪 成渾, 栗谷 李珥 등이 독특한 자가서체를 확립하여 송설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하에서 蓬萊 楊士彦(1517-1584)과 石峯 韓濩(1543-1605) 같은 대가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明의 멸망과 병자호란 후 조선제일주의적인 국수적 경향이 강해져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글씨에도 관심이 커져 金石拓本과 古法帖을 체본으로하는 새로운 서풍의 진작을 가져왔다. 眉수 許穆은 三代文字로의 복고를 신념으로 독특하고 奇古한 篆體를 창안하였는데 이는 그를 사숙한 玉洞 李서(1662-1723)에게 영향을 미친다. 조선제일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에 우리의 金石眞蹟에 눈을 돌리던 지식인들이 羅麗 金石遺文과 진적에서 왕희지체의 진수를 재발견할 수 있었고, 이때 왕희지 진적이라는 많은 탑본이 들어와 왕희지체에 대한 열망은 서예계 전반에 확산된다. 이런 속에서 이서는 {筆訣}을 지어 서예의 이론체계를 학문적인 방법으로 확립 제시하게 되니 이제까지 書論 부재상태에 있던 조선 서예계는 조선고유화의 물결을 타고 십사리 東國眞體로 기울게 되었다. 동국진체는 星湖 李瀷(1681-1763)의 이복형인 玉洞 李e(1662-1723)가 [樂毅論] [遺敎論] [黃庭經]등 왕희지 法帖을 祖帖으로하여 창안해 낸 글씨체인데 이 법첩들 자체가 조선화된 것들이었으므로 왕희지의 원적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이 서체는 白下 尹淳(1680-1740)을 거쳐 員嶠 李匡師(1705-1777)에 이르러 완성을 보데 되는바 典雅流麗한 조선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5. 추사체의 구현
조선 성리학의 말폐 노정으로 인한 새로운 치국이념이 요망되던 시대상황과 학예를 겸비한 正祖의 右文政策에 힘입어 奎章閣의 신진재사들을 중심으로 北學派가 형성된다. 이들은 淸朝 考證學이 만들어 내는 예술지향적인 學藝一致思想의 학문 경향을 받아들여 無徵不信의 고증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金石學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한편 서예계에서도 조선성리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는 동국진체에 대한 부정론이 豹菴 姜世晃(1713-179) 등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었다. 이때 중국에서도 明末 무렵부터 성리학이 말폐를 드러내며 치세능력을 상실하자 이를 비판하고 實事求是와 明道求世를 외치면서 고증학을 부르짖게 되니 자연히 고증의 기초가 되는 금석학이 크게 각광을 받게된다. 康熙. 乾隆을 거치면서 금석학은 다만 經史考證이나 문자연구의 보조적 역할에 그치는 기초학문이라는 부용적 위치에서 탈피하여 금석자료 자체가 갖는 예술성과 역사성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금석학은 곧 서예사와 직결되어 書道金石學을 이루게 되고 서체 발전에 대한 방향제시까지 시도하게 된다. 그런데 서도금석학에서 자료로 삼을 만큼 예술성이 풍부한 금석자료는 실용적 가치를 중시했던 금문보다 과시의 목적으로 만든 刻石碑板 쪽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도금석학에서는 비문의 서체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를 碑學이라 부르고, 이런 학문의 발흥은 대체로 四庫全書의 편찬(1773-1782)으로 전기고증학이 일단 정리되는 18세기 후반기부터다. 특히 이 시기 燕京 학계의 태두로 藝苑을 주도하며 학예일치를 주장하던 翁方鋼(1733-1818)이 비문의 서체연구를 통하여 그 예술성을 재발견하려는 비학 운동을 활발하게 진행시킨다. 그래서 종래의 왕희지 법첩을 비롯한 필첩 위주의 서학을 보충해야한다는 새로운 서론을 제시하면서 자신이 이를 실천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왕희지 전적은 물론 초당 삼대가를 비롯한 당 이전의 전적도 실존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첩을 祖本으로 서법 수련을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碑石은 만들어진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므로 왕희지 시대 뿐 아니라 그 이전 秦漢 시대의 원적도 직접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에 법첩의 원형을 비탁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의 중요성을 역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비학연구 과정에서 왕희지체의 근원을 이루는 漢隸 즉 八分書의 예술성이 가장 탁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된 옹방강은 서도수련의 마지막 단계를 한예에 두고 이로의 소급 통달을 주장한다. 이는 帖學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는 아니며 오히려 전통적인 첩학을 바탕으로하여 비학을 포섭 겸수하려는 온건개혁론적인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鄧石如(1743-1805)가 秦篆漢隷만이 서법의 준칙이라하여 碑學絶對論을 부르짖고 첩학의 전통을 부정하려는 급진적인 행동을 보인다. 그러자 옹방강은 급진론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경계하여 등석여를 연경 학계에서 축출한다. 그러나 자신의 후배학자로 자신과도 교유가 깊을 뿐아니라 앞으로 청조 고증학을 대표할 阮元(1764-1849)이 [南北書派論], [北碑南帖論]을 통하여 등석여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게 되고, 등석여의 제자인 包世臣(1755-1855)에 의해서 비학절대론은 이론정립을 보게된다. 이렇게 중국 서학계가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고 있을 때 秋史는 연경에 가서 옹방강, 완원과 사제지의를 맺는다. 추사는 옹,완 二師의 참신한 서학이론에 크게 감명을 받고 서도금석학에 바탕을 둔 서도수련만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닫는다. 그래서 옹방강의 서체로부터 익혀 文徵明(1470-1559). 董其昌(1555-1636). 趙孟부(1254-1322). 米비(1051-1107). 蘇軾(1036-1101)을 거쳐 楷書의 준칙인 歐陽詢(557-641). 虞世南(558-638) 등을 익힘으로써 北碑와 南帖의 서체를 터득하였으며 다시 더 거슬러 올라가서 한예의 묘리까지 통달하는 서도수련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리하여 청조고증학의 난만한 발전 결과로 출현한 서도금석학 즉 비학의 제파 이론을 겸수하고 그 이론을 자신의 타고난 예술적 천품으로 서도에 구현해낸 것이 이른바 秋史體이다. 그러므로 추사체는 비파서학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경지를 이룩한 비파서의 결정체라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중국학계에서도 추사체에 대한 비상한 관심과 선망을 보이게 되고 다투어 추사의 글씨를 얻고자 하니 추사와 학연을 맺은 옹파의 제 명류 중에도 추사의 書額을 간청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는 국내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백여 년간 주름잡아온 동국진체의 여맥을 일거에 소거하고 秋史書派의 새로운 문호를 개설하기에 이른다. 이 추사서파에 속하는 인물로는 申緯, 曹匡振, 權敦仁, 金m根, 金命喜, 金相喜, 趙冕鎬, 申櫶, 李昰應, 閔奎鎬 등 명문 출신자들 뿐 아니라 자신이 이미 서얼이던 朴齊家를 스승으로 받들었던 것처럼 한미한 출신의 제자도 두게 되었는데 趙熙龍, 朴尙迪, 方羲鏞, 許維, 田琦, 金秉善, 吳慶錫, 金奭準 등이 그들이다. 6. 秋史 年譜 1786(정조 10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출생 1792(정조 16년. 7세) 蔡濟恭이 立春帖을 보고 글씨로 이름 날 것을 예언 1805(순조 5년. 20세) 부인 韓山李氏 卒(20세) 스승 朴齊家 卒(56세) 1808(순조 8년. 23세) 禮安李氏와 재혼 1809(순조 9년. 24세) 생원시에 1등으로 급제 생부 魯敬이 冬至兼謝恩副使로 연행함에 子弟軍官 으로 수행 1810(순조 10년. 25세) 阮元, 翁方綱과 사제지의를 맺음 1819(순조 19년. 34세) 문과에 급제함 1823(순조 23년. 38세) 奎章閣 待敎가 됨 1826(순조 26년. 41세)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비인현감 金遇明을 봉고 파직 함 1827(순조 27년. 42세)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곧 물러남 1830(순조 30년. 45세) 內閣검敎待敎兼侍講院輔德으로 재직 1832(순조 33년. 48세) {禮堂金石過眼錄} 저술 1836(헌종 2년. 51세) 成均館 大司成, 刑曹參判이 됨 1840(헌종 6년. 55세) 冬至副使에 임명되었으나 尹尙度 獄으로 예산 향저 로 하거했다가 체포되어 제주도 大靜에 유배 1842(헌종 8년. 57세) 후취부인 예안이씨 卒(55세) 1844(헌종 10년. 59세) 歲寒圖를 그림 1846(헌종 12년. 61세) [華巖寺上樑文] 짓고 [無量壽閣]. [詩境軒]의 편액을 씀 1848(헌종 14년. 63세) 유배에서 풀림 1851(철종 2년. 66세)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림 1856(철종 7년. 71세) 10월 10일 卒 1934 金相喜의 玄孫 翊煥이 편찬한 {阮堂先生全集} 10권 5책이 간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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