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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02 7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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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배展: 실존의 휴머니즘, 회화의 휴머니즘
2017년 가을, 오원배의 열일곱 번째 개인전이 개최된다. 지금까지 40여 년의 화업을 쌓아오는 동안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었다. 탈을 쓴 모습으로, 금수와 같은 형태로, 때로는 알몸만 겨우 면한 헐벗은 몸으로 등장하는 그의 작품 속 인간은 단독자(單獨者)로서 세상에 대응하며, 주어진 환경을 애써 견디어 냈다. 한결같은 주제 의식을 견지하는 그의 작품 속에서 유난히 자주 모습을 보이는 인물은 바로 ‘청년’이다. 온몸을 뒤틀며 고뇌할지언정 정주(定住)하지 않는 자, 청년은 세상에 대한 첨예한 분투와 자기 극복의 의지를 분(扮)한 작가의 페르소나(persona)에 다름 아니다. 늘 청년 같은 작가 오원배. 그는 매 전시마다 다른 실험을 시도하며 양식의 변화나 매체에 대한 연구를 꾀하여 왔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압도적인 크기의 작품으로 전시장을 호령하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진단해 본다.
이번에 마주하게 될 그의 작품은 모두 최근 일, 이 년 사이 만든 신작이다.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대작으로 관객을 덮칠 듯 맞이하는가 하면, 1층 벽면에는 한 폭이 무려 32m짜리 종이 위에 호탕하게 그림을 그렸다. 인간 존재의 실존 문제를 다루어 온 작가이건만, 그의 화면에 처음으로 인조인간도 등장하였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환희의 춤을 추는 매끈한 금속체의 로봇. 그 뒤편으로 기계보다 더 기계와 같이 획일화된 몸짓으로 인간들이 줄지어 있다. 거대한 파이프와 가스통 사이로,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의 산업 현장에 유폐된 듯한 인간 군상의 모습은 마치 프리츠 랑(Fritz Lang)의 영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1927)>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전시장의 1층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집단화된 인간의 통제된 신체와 인조인간의 자율성이 강한 대비를 이루며 ‘휴머니티란 무엇인가’에 대한 짙은 의문을 제기한다.
이어, 전시장 2층의 작품은 인간 소외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배경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미로와 같이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계단, 온기 하나 없는 냉정한 공장의 철골 구조, 일거수일투족을 뒤쫓는 감시의 시스템 등 그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사회의 모습은 동시대적이면서도, 과거의 유물처럼 녹슬어 있고 또 미래의 풍경처럼 생경하고 삭막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나 담담하게 사회 전반의 구조를 꿰뚫어 보는 시선으로, 저마다 다른 장면을 포착한 작업은 기계적 시스템과 인간의 도구화라는 하나의 주제를 향하여 균질한 톤으로 꿰어진다.
3층 전시장은 오원배 작업의 기저를 살펴볼 수 있는 드로잉으로 채워져 있다. 1, 2층에서 보여준 ‘매크로(macro)’한 스케일의 페인팅과는 달리, 그의 드로잉에서는 도심 속 일상 생활 곳곳에서 포착해온 ‘마이크로(micro)’한 관찰력과 섬세한 감성이 돋보인다. 주변 인물과 소소한 사건을 속속들이 파헤치는데, 그 표현은 간결하고도 즉자적이다. 마주치는 모든 것을 화폭 속 이미지로 구상하는 작가의 오래된 습관으로 여기에는 어떠한 형식과 재료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의 드로잉은 매 순간의 조우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대상과 함께 호흡했기에, 이들은 마치 꿈틀거리는 유기체처럼 리드미컬하게 시대의 흐름에 반응한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오원배의 기존 작업이 소외된 인간의 개별적인 실존 문제를 파고들어 왔다면, 이번 작품은 범(汎) 인간종(人間種)이 당면한 존재 양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반적으로 기능적 효율을 극대화하는 사회 구조가 어떻게 인간을 도구화하고 집단 명령의 체계를 형성해 가는지, 그리고 기계 문명의 발달이 어디로 치닫게 되는지에 대한 성찰이다. 인간은 자신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각종 기계와 인공지능을 개발했지만 결국 그 기계들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인간과 기계 간의 전도된 관계를 그려내며 그는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라는 시대적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하지만 기계 역시 인간의 기능과 사고를 물질화한 것일 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인간이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힘이 행사되는 대상으로부터의 ‘소외’다. 계몽이 사물에 대해 취하는 행태는 독재자가 인간들에 대해 취하는 행태와 같다.”라고 하는데, 결국 인간 소외는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초래한 재귀적인 결과물이다.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오원배의 작품 속에서 휴머니즘의 지배/피지배의 구조에서 벗어난 존재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인간/기계(인간의 산물)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빗겨나 있는 나비와 같은 작은 생명체이다. 몰개성한 모습으로 획일화된 인간의 머리 위로 유유자적 날아가거나, 견고한 건축 구조에도 위축되는 기색 없이 앉아있는 이 생명체야말로 자연만큼은 인간의 논리와 삶의 양식에 차폐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동시에 인간의 억압은 오로지 인간 행위의 결과일 뿐이라는, 그러하기에 회복의 여지가 있다는 한 가닥의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지금껏 오원배에게 ‘그리기’는 철학적 실천과도 같았다. 인간의 존재는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가, 억압적인 외부 환경에서 인간은 과연 주체성을 발현할 수 있는가, 기계 문명의 발달과 함께 허물어지는 휴머니티의 경계는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등 그가 그려온 회화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반성이자 휴머니즘의 회복을 향한 몸짓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 전시에서는 한결 과감해진 색상과 더욱 단순해진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작품의 어조는 전에 없이 단호하다. 일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여럿일지라도 문제의 본질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통찰력과 원숙함이다. 사고가 깊어질수록 간결해지고 명료해진 그의 작업이 앞으로 어디로 향하게 될 것인지, 이번 전시가 그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하나의 궤적이 되기를 바란다.
김소라 (OCI미술관 선임큐레이터)
‘지금, 여기’ 인간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서술 없는 거대서사
인간군상을 통해 실존과 소외, 한국사회가 지닌 여러 문제를 천착해온 오원배는 이번 개인전을 통해 벽화에 가까운 신작을 발표한다. 마치 집단체조를 하듯 두 손을 앞으로 쭉 뻗거나 깍지 쥔 손을 머리에 올리고 있는 군상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길이는 32미터에 이른다. 동일한 동작을 취하는 여섯 무리의 인물 사이에 놓인 거대한 배관, 사다리가 놓인 높은 담장, 고압의 가스탱크 등이 화면과 화면 사이의 경계를 구획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공간을 나누는 기계설비나 담장이 갈색으로 채색된 반면 대부분의 인물들은 무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모델을 동원해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획일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대상의 배치와 표현에 있어서 공간감과 입체감을 최소화함으로써 화면에서 서술성 또한 축소되고 있다. 말하자면 시각적 독해가 쉽지 않다는 점이 이 거대한 드로잉의 특징이기도 하다.
화면에서 인물과 인물 사이의 거리는 최소화되고 대신에 그 자리를 넓은 여백이 차지하고 있으며, 인체드로잉 또한 인체의 재현보다 기본적인 형태를 드러내는데 치중하고 있어서 긴 화면의 각 장면들이 하나의 역사를 구성한다기보다 동일한 사건을 수평적으로 펼쳐놓은 것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특히 벽면을 꽉 채울 정도로 큰 화면이지만 마치 화면 아래로부터 솟아오르듯 대부분 상반신만 드러내고 있는 이 인물들의 특이한 동작에도 불구하고 거의 정물처럼 배치돼 있다는 점도 두드러진다. 게다가 표정이 없는 가운데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하고 있는 이 인물들이 모두 남성이란 점에서 전체주의 사회의 병영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정공간을 지시하지는 않지만 공장설비나 기계장치를 연상시키는 장비들 사이에서 몸부림치거나 프로그래밍된 동작만 반복하는 이 인간들은 조직과 규율에 길들여진 병사들일까, 아니면 대량생산 공정에 투입된 사이보그들일까?
작가는 이 장대한 벽화로 둘러싸인 가운데 벽면의 앞면과 뒷면에는 각각 관절부위가 접히는 사지(四肢)를 지닌 기계인간을 표현한 작품들을 설치할 계획이다. 앞면의 벽에 걸린 세로로 긴 작품에는 공장의 설비들이 조밀하게 자리 잡은 비좁은 공간에 배치된 로봇이 기계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는 반면 뒷면의 벽에는 세 개의 화폭을 가로로 연결한 캔버스에 서로 마주보며 마치 거울처럼 동일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여섯 기의 로봇이 그려져 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황금색으로 칠해진 이 금속성의 기계가 인간이 아니라 로봇임을 증명하는 A23, A25와 같은 일련번호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지구로 잠입한 복제인간(replicant)인 ‘넥서스 6(Nexus 6)’을 연상시킨다. 민머리에 신체의 각 부위가 조립된 듯한 특징을 드러내는 이 로봇이 비록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性)의 구별이 없다. 이런 점이 이 인간의 형상을 닮은 기계를 오토마타, 마리오네트, 로봇이거나 사이보그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이것을 꼭 기계인간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인간들은 <모던 타임스>에서 나사를 조이는 단일공정에 익숙해진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린 찰리 채플린처럼 기계의 일부가 되어버린 인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점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개성이 아니라 집단의 논리이자 기계적 생산의 논리이다. 반면에 종이에 검은색 안료와 오일바(oil bar)로 그린 벽화의 경우 기계는 아니지만 제도나 체제 혹은 사회적 환경에 의해 거의 기계처럼 작동하는 인간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기계의 작동과도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서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등장하는 인간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포드(Henri Ford)가 T형 자동차를 생산한 1913년을 원년으로 포드력(After Ford) 632년을 시대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인간은 부모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공부화에 의해 태어난다. 이 시대의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계급으로부터 직업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통제된 사회에 소속된 존재에 불과하다. 이들은 독재자가 공급하는 소마란 약을 복용하면서 모든 인간적 욕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에 걱정이나 갈등, 사랑 등의 인간적인 감정이나 배신을 겪지 않는 반면 의욕을 상실한 채 늙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통제된 사회인 『멋진 신세계』에서는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며, 예술도 종교도 없다. 단지 포드를 교주로 하는 유사종교만 있을 뿐이다. 인공수정된 채 인큐베이터에 의해 양육된 후 결정된 계급에 소속된 인간은 주어진 임무만 수행하면 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가족관계도 해체된다. 한 사람의 독재자가 통치하는 국가란 타율에 의해 결정된 삶을 살아야 하는 사회가 과연 지상낙원일까. 게다가 소마에 의해 조작된 만족에 젖어 사는 삶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사육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멋진 신세계’는 도래하는가?
그러나 오원배의 이 거대한 벽화가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이 만들어낼 미래사회에 대한 불안하고 두려운 예감을 담고 있지만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한 것과 달리 가까운 미래이거나 아니면 이미 우리 현실 속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 작품 속에는 ‘멋진 신세계’를 지배하는 포드주의가 아니라 어쩌면 그것보다 더 가혹하게 생존을 위협할 위기에 대한 불안한 전망이 깔려있다. 작가에 따르면 ‘제4차 산업혁명’에 의해 야기될 일자리 지형의 지각변동이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된 동기라고 한다. 제4차 산업혁명이란 개념은 2016년 1월에 개최된 다보스 포럼(World Economic Forum) 보고서를 통해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지만 그 뿌리는 2010년 독일에서 발표한 「첨단기술전략(High-Tech Strategy) 2010」의 10대 프로젝트 중 하나로서 제조업과 정보통신이 융합되는 단계를 의미하는 ‘Industry 4.0’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쨌든 과학자들과 미래학자들은 제4차 산업혁명의 주요 동인으로 모바일 인터넷, 클라우드 기술,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3D프린팅, 자율주행기술 등의 등장을 들고 있다. 이에 따라 인간과 사물이 정보통신기술(ICT)과 융합하여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는 ‘초연결성(hyper-connected)’과 ‘초지능성(hyper-intelligence)’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가 곧 도래한다고 한다. 당장 최근에 있었던 슈퍼컴퓨터와 이세돌과의 바둑대결에서 인공지능을 장착한 알파고가 인간을 누르는 현장을 목격한 우리로서는 가까운 미래사회에 대해 낙관할 수만 없다. 즉 인공지능이 보편화될 미래세계는 테크놀로지가 약속하는 유토피아라기보다 인간의 소외를 가중시키는 사회일 것이란 불안과 위기의식을 가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제조업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자동화공정에 따라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도 이러한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무한경쟁이 생존의 법칙인양 확산된 가운데 양극화현상 또한 심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년실업이 증가하는 현실과 함께 기후변화에 따른 여러 재해는 다가올 미래를 축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전망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역사적 유동성이 큰 시대에서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더 나은 ‘멋진 신세계’는 도래하는가?
많은 미래학자들은 제4차 산업혁명에 따라 상당한 일자리들이 사라질 것으로 전망하는 반면 정보통신기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 세 차례의 산업혁명의 역사를 복기해보면 제4차 산업혁명에 따라 노동의 변형은 일어날 것이지만 그것이 노동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에 의해 전통적인 노동의 급격한 변동은 불가피할 것이다.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예측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시간을 단축하며 상상했던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불안한 것일 수 있다.
오원배의 작품은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그림 속의 인간들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경계에 놓여 있다. 이 작품에서 특정한 개인의 삶에 대한 서술은 물론 그것에 대한 암시조차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개인의 서사를 대신한 자리에 ‘지금 여기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질문이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을 유신체제란 통제된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 집단의 논리는 악몽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왜 개체가 실종되고 전체가 개체를 지배하는 듯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개인용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SNS가 등장한 역사는 의외로 짧지만 아주 빠른 시간에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특히 스마트폰은 우리 신체의 일부가 되었고, SNS는 세계를 실시간으로 연결한다. 그렇다고 정보와 지식의 독점이 해소되고 권력의 분권화가 이루어졌는가. 그것이 국가이든, 자본이든, 기업이든 기술을 독점한 권력기구의 욕망을 직시하지 않는 한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할 것이란 낙관적인 희망은 그야말로 허망한 기대에 불과하다. 오원배의 작품이 이러한 권력기구에 의해 통제받는 인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작품 전체에서 그런 위기의식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내가 집단체조라고 표현한 이 청년들의 동작은 어쩌면 급변하는 사회에 부응하지 않은 채 여전히 평균적이고 체제순응적인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시스템에 고착된 교육제도가 강요하는 훈육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러한 양성시스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몸부림으로 볼 수도 있다.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갖추어야할 덕목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서 제도의 부품이 되어 제도가 잘 작동하도록 규율과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라면 대량생산체제에서 인간을 기계에 종속시키는 포드주의보다 더 나은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를 급속하게 재편하면서 이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노동시장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자본으로부터의 노동의 소외가 아니라 기술로부터의 인간의 소외란 문제 앞에 방치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시의 산책자
오원배가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작품 중에서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구성하고 있는 철골구조물, 복잡하게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건축구조물의 뼈대, 두꺼운 벽체 위에 앙상하게 드러난 지붕의 트러스, 도심을 차지하고 있는 빌딩 가운데로 마치 유령처럼 부상하고 있는 전신주, 감시카메라 등을 표현한 작품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다. 이 작품들은 모두 작가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포착한 풍경들인데 대체로 어두운 색조로 그려진 까닭에 인간의 부재를 강화한다.
먼저 감시카메라를 보자.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장소는 동작대교로서 교통정보 수집은 물론 범죄나 투신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설치한 카메라를 포착한 것이다. 가로등에 부착된 숫자판은 카메라로부터 전송된 영상을 통해 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신속하게 출동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카메라 덕분에 범죄발생율도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잎이 떨어진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와 시간을 암시하는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돌출된 카메라는 오로지 눈알만 번득이며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맹수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눈은 단지 포착과 기록만 할 뿐 감시의 주체는 ‘보이지 않는 눈’을 지닌 통제기관이다. 도시의 길목마다 설치된 감시카메라는 방범이란 목적을 내세우고 있으나 우리의 일상을 조밀하게 관찰하는 수많은 눈이란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롤러코스터의 구조물 역시 어두운 배경을 지닌 까닭에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여기에는 한낮의 놀이공원이 지닌 소란과 환성, 즐거움과 놀라움 대신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과 침묵이 지배한다. 롤러코스터란 놀이기구는 순환구조이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본 구조물의 종착지, 즉 우리의 시선이 빨려드는 끝은 미궁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정서는 광화문에서 발견한 전신주를 그린 작품으로도 연결된다.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전신주에 설치된 배전시설과 어지럽게 얽힌 전선은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시간의 지상에서는 눈에 띄지 않지만 주변의 불빛이 점멸된 시간에 위로 올려다보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건설 중인지, 철거중인지 애매하지만 교차된 강철빔이 그대로 노출된 풍경도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실루엣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모든 풍경으로부터 인간은 물론 살아있는 생명체도 추방되고 없다. 도시풍경을 그린 작품 중에서 살아있는 생명체가 등장하는 것은 고가도로와 교차하는 육교의 난간에 걸터앉은 까마귀 한 마리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 새의 역할이 궁금해진다. 인간의 실종을 알리는 메신저일까.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명에 의해 추방당한 자연에 대한 은유일까. 어쨌든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물을 그렸다는 점에서 인간은 증발한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인간의 흔적을 비워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작품들은 앞에서 언급한 인간과 로봇을 그린 작품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지만 모두 도시를 배경으로 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앞에서 말한 작품이 제4차 산업혁명에 의해 나타날 일자리 축소가 인간의 소외를 야기할 것이란 불안한 전망 아래 작업한 것이라면 이 작품들은 도시의 관찰자로서 작가가 도시를 산책하며 발견한 도시의 모서리 풍경이다. 이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는 나에게 ‘플라네르(flâneur)’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은 글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런데 산책자로서 도시를 산책하기에 장소와 시간이 낯설다. 게다가 앞에서 말한 제4차 산업혁명을 다룬 작품과의 거리도 현격하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설치된 전시장을 방문한다면 이 두 유형의 작품이 작가의 계획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시 구성은 삼계(三界)를 은유한다.
오원배의 새로운 작품들과 그동안 일상처럼 제작해온 드로잉을 전시할 장소는 OCI미술관이며, 이 전시장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개인전을 준비하며 이 3층으로 이루어진 전시공간을 불교의 우주천체관을 이루는 욕계, 색계, 무색계로 구성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제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한 벽화와도 같은 작품과 인조인간을 표현한 작품이 왜 일층에 설치되는지가 밝혀진다. 이 작품은 욕계를 의미하는 공간에 배치된다. 욕계란 본능에 얽매인 탐욕과 소유욕으로 파탄이 빚어지고, 희로애락의 지배를 받는 세계로서 인간도 그 세계에 속한다. 욕망은 물론 제도와 체제에 속한 인간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대한 벽화 속에 언뜻 나타나고 있는 나비처럼 희망은 언제나 우리 곁에, 우리 속에 함께 있다. 여기에서 오원배가 비관주의자가 아님이 밝혀진다.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풍경은 색계를 의미하는 2층에 설치된다. 불교에서 색계는 성욕, 식욕, 수면욕과 같은 감각을 지배하는 욕망은 사라졌지만 물질은 남아 있으므로 소멸에 따른 고통을 감수하여야 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색계에 놓인 작품들은 인간의 부재가 아니라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기 위해 인간을 비웠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을씨년스런 풍경은 인간의 거침없고 제동장치까지 파열된 욕망이 도달하는 파국으로서의 종말이 아니라 욕망이 제거된 세계에 대한 비전을 인간이 건설한 도시의 이미지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내고자한 것은 아닌지 상상해본다.
3층에는 그가 지난 수십 년간 그려온 드로잉들을 전시한다. 1층의 대형벽화가 그 크기의 장대함과 여름 한철을 꼬박 보내며 제작한 놀라운 집중력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면 그가 펼쳐 보여준 드로잉은 자유로움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어떤 것은 여행 중 그린 스케치도 있고, 조형적인 모색도 있고, 일기나 낙서처럼 끄적거린 것도 있지만 이 드로잉들이 지닌 무심하면서도 넓고 깊은 세계는 스케치북이란 작은 공간을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또한 그 드로잉들은 그의 작품이 지닌 다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 드로잉은 해석의 부담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이 드로잉들이 물질마저 버렸지만 관념은 남아있기 때문에 관념적인 아픔이나 사랑을 인식할 수 있는 무색계를 의미한다고 감히 강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가 도시를 산책하거나 드로잉을 하면서 느꼈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와도 같은 상태가 이 전시공간을 돌아보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오원배의 작품이 특정한 사회현상이나 이념, 모순이나 대안에 대한 구체적인 언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사건을 서술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위치, 즉 ‘지금, 여기’ 인간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불교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전시를 구성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이러한 우주관의 도해가 아니란 점도 분명하다. 오히려 이 작품들을 통해 불교적 세계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해석은 열려있다. 이 글은 열린 해석의 한 면에 불과하다.
최태만 (미술평론가, 국민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