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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 |
重要 史實(年代) |
選定 理由 |
1 |
고구려, 백제, 신라 건국 (BC신57,고37,백18) |
고조선이 망하자 한반도에는 부족국가가 생겨났고, 몇몇 부족국가가 힘을 길러 주변의 작은 국가들을 점령하다가 가장 큰 국가 셋만 남게 되었는데, 그 세 나라가 고구려·백제·신라이다. 삼국의 건국 과정을 알아보고 공통적 정치적 발전 과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
2 |
백제 멸망, 고구려 멸망 (백제660, 고구려 668) |
고구려·백제 모두 실패원인이 지도층의 내분에서 비롯되었으며 정권다툼에서 패한 세력이 적대국인 당나라(나당연합군)에 투항하여 자신의 조국을 스스로 멸망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
3 |
삼국의 통일 (신라 676) |
신라의 삼국 통일은 우리 민족이 한 정부 밑에 모여 단일 민족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우리 민족 문화 형성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점, 또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지키고 민족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4 |
불교의 전래 (고372, 백384, 신535) |
불교의 전래로 인해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으며, 불교라는 종교를 통해서 민족의 단결을 도와주었다. |
5 |
율령 반포 (고373, 백260 신라 520) |
율령이란, 형별 법규인 유와 일반 행정 법규인 영, 그리고 시행 세칙인 격식을 일컫는 것으로, 당시 율령제도를 정비하였다는 것은 곧 국가의 통치 체제를 완비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대사회 에서는 지배층이 그들의 특권유지를 위해 율령을 제정한 것을 알 수 있다. |
6 |
이차돈의 순교 (527) |
이차돈의 처형이 곧 불교공인으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무명의 전도승이 아닌 일반인, 즉 왕의 측근 신하가 공개적으로 처형당했다는 전도승 살해와는 성격이 판이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차돈의 순교는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
7 |
나제동맹 (433) |
삼국시대에 신라·백제가 고구려의 南進을 막기 위해 체결한 동맹으로, 6세기에는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고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기도 하였으나, 120여 년간 지속되었던 나제동맹은 결렬되고 말았다. |
8 |
고구려,안시성 싸움 승리 (645) |
고구려는 기존의 패권 국가였고, 당은 새로운 강대국으로, 당은 동쪽의 고구려는 무너뜨려 아시아의 지배자가 되려고 하였지만, 당의 야심은 안시성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함으로써 실패하게 되는데, 이것이 안시성 싸움이다. 안시성 싸움은 국제적으로 양극화의 한축임을 증명하였고, 내부적으로 단합을 도모하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9 |
고구려 장수왕, 평양성 천도 (427) |
만주의 국내성에서 한반도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서 우리민족의 활동반경을 대륙중심에서 반도 중심으로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가 갖는 의미가 우리민족사에서 크다고 생각한다. |
10 |
사비천도 (백제 538) |
성왕이 단행한 사비천도는 왕권강화를 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 것으로, 고구려의 침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웅진천도와는 달리 자주적인 천도였다. 이는 성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의 힘을 억압하여 백제의 중흥을 꾀하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
11 |
살수대첩 (고구려 612) |
고구려 영양왕 23년(612)에 고구려와 중국 수나라가 살수에서 벌인 큰 싸움으로, 고구려만의 힘으로 적을 물리쳤고, 부족한 병력으로 113만의 병력을 이겼다는 점과, 백성들의 힘까지 더해 이겼다는 점에서 고구려가 우리 민족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
12 |
진대법 실시 (고구려 194) |
진대법은 양식이 떨어져 어려움을 겪는 농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갚게 하는 제도로, 어려운 백성을 돕고, 백성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 나라를 평화롭게 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
13 |
경주, 첨성대 건립 (632) |
경주 첨성대는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국보 제 31호이다.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1350년이 지나고도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자랑스런 우리의 과학 유산이다. 신라의 첨성대의 건립은 신라의 천문학 발전을 상징한다. |
14 |
고구려, 천리장성 완성 (646) |
거란, 여진족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한반도의 북방에 쌓은 성으로, 기존의 성곽을 연결시켜 각개의 기존 성곽을 독립적인 방어 체계로 구축되었다. 천리장성의 핵심부는 요동성으로, 요동성의 주몽의 사상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의 중요한 정치적 거점이 되었다. |
다음 발표자 : 김종호·이선녀
다음 발표 주제 : 신라는 전제왕권 강화를 어떻게 이루었는가.
* 박상율 : 1) 발표 였는데, -> 2) 충분 했습니다. -> 3) 조화 되지 ->
제가 생각하기에 이차돈의 순교에서 우리는 '자기 희생' 이라는 공동 삶의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차돈의 순교가 없었더라면 우리 나라에 불교는 자리를 잡지 못했을 것이고, 나라가 힘들었을때 큰 구심점이 되었던 호국 불교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 하다보면 역사 바꾸는 새로운 변화에는 항상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변화 속에 살았던 개개인들이 희생을 두렵게 여겼다면 우리의 삶은 상당히 퇴보 했을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이차돈의 순교와 같은 희생을 본받아 그런 변화속에 자신을 던져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구심점이 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박상율 : 상율이에게 다시 말하겠습니다. 내가 상율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발표 잘 들었다느니, 좋았다느니, 매끄러웠다느니 하는 따위의 빈 말들로 엮어진 의례적이며 공허한 댓글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인간 삶의 원리나 교훈과 관련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내용이 담긴 코맨트입니다. 유감스럽게 율이의 댓글에서도 그러한 점을 찾을 수가 없군요. 댓글, 다시 작성하도록 하세요.
교수님 수정 하였습니다. 제가 잠시 긴장의 끈을 놓았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항상 깨어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박상율 학우의 말처럼 요즘처럼 자기 욕심만 챙기고, 타인을 해치려하는 이런 이기적인 사회속에서 '자기 희생'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점인 것 같습니다.
* 박상율 : 1) 힘들었을때 -> 2) 공부 하다보면 -> 공부하다 보면 3) 퇴보 했을 -> 퇴보했을 4) 변화속에 -> 5) 되야한다고 ->> 되어야 한다고
민족사의 여명기는 날이 밝아오는 새벽 미명의 시간이라고 비유할 수 있고, 삼국시대는 하루 삶의 시작을 위해 아침밥을 먹는 것으로 비유하고 싶습니다. 이를 잘 나타내 주는 예가 바로 불교의 수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전까지는 막연히 먹고 살기 위한 믿음의 수단으로서의 원시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 민족, 드디어 체계적이고 고차원적인 불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수용은 정말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각 국의 지배층이 왕권 강화 수단의 일환으로 불교를 도입하였긴 합니다. 하지만 불교가 끼친 놀라운 영향을 생각해 볼 때 우연적으로 들어왔다고 치부해 버릴 수 없습니다. 불교는 지극히 계획적으로,
절차를 밟아, 목적적으로 수용된 것입니다. 신앙으로서의 불교와,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불교는 역사적 사실과 사료를 통해 알 수 있겠지만 불교의 표면적인 역할 외에 그 속에 내재된 의미는 정말 큽니다. 먼저 불교의 공인 순서에 따라 삼국의 발전 속도와 양태가 달랐습니다. 무엇이든지 새롭고 유익하다면 먼저 받아들이고 적응할 수 있는 신속한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다음, 이 시대의 불교는 단순한 신앙이 아닌 인간 삶이 녹아 있는 삶의 결정체 그 자체였습니다.
사회 모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은 물론 앞으로 중요하게 다루어 질 불교의 맨 처음이었습니다. 모든 곳에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야겠습니다. 향순 학우, 두레 학우, 발표 잘 들었습니다. 매우 수고하셨습니다.^^
* 박인승 : 댓글이 참신해서 좋습니다. 특히도 불교의 공인 순서에 따라 삼국의 발전 속도와 양태가 달랐다고 전제하면서 "무엇이든지 새롭고 유익하다면 먼저 받아들이고 적응할 수 있는 신속한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한 내용과 이 시대의 불교는 단순한 신앙이 아닌 인간 삶이 녹아 있는 삶의 결정체 그 자체라 하면서 "모든 곳에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야겠다."는 결의가 어떤 내용보다 돋보입니다. 좋아요.^^
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타이밍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에 발 맞춰나가지 못하고, 남들보다 한 발 늦은 신속하지 못한 움직임을 가진다면 요즘같이 빠르게 변화해 가는 사회속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 입니다.
정말 한순간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발표. 잘 보고 듣고 배웠습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이유는 바로 그 당시의 선진사상인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더 발전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점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의식, 생각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문화,지식을 받아들이기 원했고 바로 그 시기적절한 때에 불교가 융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지식체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왕실 쪽의 노력도 빠질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발표 결론부분에서 불교가 단순한 종교로서가 아니라 삶의 원리와 지침을 제공하는 이념으로서 작용하신다고 했는데
* 박지은 : 1) 불교가 융성했던 이유가 바로 그 당시의 선진사상인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더 발전된 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고, 그 당시의 지식,사상체제가 바로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 * 다시 읽도록 하세요. 전혀 문맥이 닿지 않습니다.
수정하였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의 원리가 적용되었는지 말씀해주셨다면 더욱 좋았을것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 우리 국민들은 여러 다양한 종교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믿는 종교가 무조건 옳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종교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사람들을 호도糊塗 하여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사이비 종교도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삼국시대의 사람들 또한 종교와 한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서 불교를 받아들였겠지만, 거기에는 불교로 인해 많은 부작용들도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이번 발표를 통해 종교가 사회형성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순기능을 했다는 데에 큰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 박지은 : 전체적으로 지은이의 댓글이 불교가 융성한 이유나 의의를 논의하는데 그치고 실제적인 삶의 원리로까지 나아가지 못하여 참으로 안타깝습니다.ㅠㅠ 지은이는 댓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불교의 부작용과 함께 순기능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부작용이 나타났으며 순기능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이에 답하다 보면 종교에 대한 중요한 삶의 원리를 정리해낼 수 있을 겁니다. 다른 학생들도 같이 답해 보도록 하세요. 2) 더욱더 좋았을것입니다. ->>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3)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 우리 국민들은 여러 다양한 종교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4) 사람들의 생각을 자극하고 -> 사람들을 호도糊塗 하여 5) 나쁜방향으로 -> 나쁜 방향으로 6) 현실도 볼 수 있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 사이비 종교도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삼국에서 불교를 종교와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민중들은 그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생각에 혼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전통신앙에서 발전해 사원을 건립해 나가면서 민중들에게 걷는 세금이 더 많아진 측면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수님, 수정만하고 수정하였다는 댓글을 달지 않았네요, 혼란스럽게 한 점 죄송합니다.
불교가 융성한 삼국을 주제로 한 공동발표 잘 들었습니다. 발표를 들으면서 정말 불교가 삼국 시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교로 인해 삶의 원리를 제공받아 불교가 삼국 시대 사람들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왕과 귀족세력 또한 불교를 수용하고 나라에 정착시켜 이 시대에 불교가 정말 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불교 지식과 종교의 이념 보다는 국민들이 자신들에게 복종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귀족들의 왜곡된 불교 수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발표자 두 분 모두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고 들었는데요. 발표 연습도 하고 이것저것 많이 준비하신 티가 나네요^^ . 그치만 조금 아쉬운 점은 불교가 삼국시대 사람들에게 끼친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까지 보여주셨더라면 더 좋았을껄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오혜림 : 혜림이의 댓글을 보면 삶의 원리나 교훈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글들이 거의 모두이군요. 내가 여러분의 댓글에서 기대하는 것은 발표 잘 들었다느니, 열심히 준비했다느니, 준비한 티가 난다느니 하는 따위의 의례적인 말과 과거 사실에 대한 단순한 사실 나열과 같은 공허한 댓글이 아니라, 하나라도 인간 삶의 원리나 교훈과 관련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내용이 담긴 코맨트입니다. 그러한 혜림이에게 몇가지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1. 삼국시대에 불교는 어떻게 수용될 수 있었나요? 2. 그 불교는 삼국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나요? 3. 또한 어떻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나요?
이상의 세 물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답변하기 바랍니다. 답변하면서 유의하여 할 점은 "종교나 선진 사상을 어떻게 수용 가능한가"하는 점과 "종교는 어떤 조건에서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가"하는 점에 대한 해답이 그 답변 가운데 담겨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학생들의 의견도 듣고 싶군요.
1. 주로 귀족들 즉 지배층에 의해 수용되어졌다고 합니다. 2. 왕권 강화 측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문화 예술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 불교의 사원이나 불상을 만들 때 낸 자금들이 다 국민들이 낸 것이라는 겁니다. 그 때의 불교는 지배층만을 위한 불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또 누가 받아들이냐에 따라 끼치는 영향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시대의 순수한 불교 이념의 수용이 아니라 왕권 강화를 위한 불교 수용의 예를 봐서도 말입니다. 우리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그 것을 누가 받아들이냐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때 중들이 제일 처음 불교를 받아들여 전파했더라면 백성을 위한 불교가 성행하지 않았겠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지배층인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 하기 위해 윤회사상을 강조함으로써 불순한 불교 수용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진정으로 국민들을 위한다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불교라는 종교를 수단으로 삼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서향순 : 1) 정당화 하기 -> 2) 위한다기 보다는 ->
* 오혜림 : 1) 비용의 출저가 ->> 2) 그 때의 -> 3) 그 것을 -> 4) 않았을까 라는 ->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