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나는 그대가 누군가 엎어놓은 눈물 주머니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모서리에 찔려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저 둥근 등허리. 얼마나 많은 강물과 바람이 그대의 각진 마음을 쓰다듬었기에, 그대는 이토록 모난 구석 하나 없이 스스로 낮은 산이 되었습니까. 수반 위 고요한 모래 벌판에 앉아 있는 그대의 모습은, 하루 종일 시장 바닥을 헤매다 돌아와 툇마루에 엎드려 잠든 어머니의 굽은 등 같기도 하고, 이제 막 땅을 뚫고 올라온 어린 버섯의 떨리는 머리 같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대를 보고 바가지를 엎어놓았다고도 하고 나락을 쌓아둔 덤불 같다고도 하겠지만, 내 눈에 그대는 우주가 잠시 쉬어가는 작은 초가집입니다. 그 초가집 아래에는 배고픈 이들이 둘러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나누어 먹고, 길 잃은 새들이 잠시 날개를 접고 잠이 듭니다. 그대는 높이 솟아 세상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봉우리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의 무게를 견디며 ‘괜찮다,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편안한 무덤 같기도 합니다.
어느 날 그대가 문득 그리워 위아래를 뒤집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대는 영락없는 사과의 마음을 하고 있더군요. 딱딱한 돌의 가슴 안쪽에 그렇게 오목하고 달콤한 빈자리를 숨겨두고 있었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그 빈자리는 누군가 던진 돌팔매를 받아내던 상처의 흔적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담아내려 스스로 판 깊은 우물입니까. 사과가 되어버린 그대의 얼굴을 보며 나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가장 단단한 존재가 가장 부드러운 것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가장 깊은 상처가 가장 향기로운 열매가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대에게 한 줄기 물을 뿌려봅니다. 마른 먼지를 털어내고 비로소 검은 광택을 내뿜는 그대의 살결은, 고난을 견뎌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거룩한 묵묵함입니다. 물기를 머금은 잿빛청석은 오석처럼 검은 밤하늘보다 더 깊은 눈동자가 되어 나를 봅니다. 그 검은 빛은 어둠이 아니라, 빛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제 몸 안으로 다 받아들여 버린 지극한 사랑의 빛깔입니다. 세상이 화려한 색깔로 자기를 뽐낼 때, 그대는 단 하나의 검은색으로 침묵하며 나에게 묻습니다.
"그대의 마음은 지금 누구를 위해 젖어 있는가."
높은 산맥이 되고 싶어 안달하던 나의 욕망이 그대 앞에 서면 부끄러워집니다. 그대는 수만 년을 물속에서 구르면서도 스스로 산이 되려 하지 않았고, 그저 물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제 몸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렇게 깎이고 깎여 드디어 만들어진 이 둥근 평화. 그것은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순종의 기록이며, 소유의 결과가 아니라 버림의 축복입니다.
이제 나는 그대 곁에 가만히 무릎을 굽히고 앉습니다. 수반 위 작은 모래들이 그대의 발을 간지럽히고, 창가로 들어온 햇살이 그대의 검은 등에 따스한 손을 얹습니다. 그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나는 듣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부러지지 않는 창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어 안는 둥근 가슴이라는 것을.
오늘 밤, 나도 그대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잠들고 싶습니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날카로운 파편들이 그대의 부드러운 곡선에 닿아 조금씩 마모되기를 기도합니다. 뒤집으면 사과가 되고 엎어놓으면 산이 되는 그대여. 나도 누군가에게 그대처럼 물 한 바가지 뿌려주면 검게 빛나는 따뜻한 위로의 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