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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6.25전쟁 일지 (1951년 11월 ~ 12월)
1951년 11월 1일(목) 흐림
<전황>
- 금성 서남방 유엔군 전초진지에 대한 공산군의 공격 격퇴
- 휴전회담 제 14차 합동분과 위원회
--- 비무장지대 설정문제에 관하여 김화, 이동, 동해안에 이르는 지역에서 ‘단장의 능선’ 지구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의견 일치
<국내>
- 사회부, 전물군경 유가족과 출정 군경가족 지원책 수립
- 제주도 경찰국, 4.3사건 주모자 조몽구 체포 발표
<해외>
- 홍콩주둔 영국 포병대 3개 대대, 한국 향발
- 미 원자력위원회, 라스베가스 부근의 연습장에서 제 4차 원폭 실험 실시
<주> : 본 자료는 6.25전쟁 1,129일간 일지(1950.6.25~1953.7.27) 내용이며,
- 저자는 부영그룹 창업자인 이중근회장 편저입니다. 감사합니다.
1951년 11월 2일(금) 맑음
<전황>
- 유엔군, 서부전선의 연천 서쪽 전초진지에서 공산군 동격으로 철수
- 유엔군, 금성 동남방에서 공산군 2회에 걸친 위력수색 격퇴
<국내>
- 교통부, 일본의 한국 선박 입국조건 강화에 엄중 항의
- 경찰, 불법 유치장 시설의 감금 폭행사건 적발
-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 허가이 해임
1951년 11월 3일(토) 맑음
<전황>
- 금성 동남방 유엔군 진지에 대한 공산군의 3회 공격 격퇴
- 미 전함 뉴저지 호, 원산 흥남 포격
<국내>
- 경찰, 일본 밀항선 선장과 선원 체포
- 서울시, 입대 장정 장행회 개최
- 유엔군, 정전교섭에 관한 코뮈니케 발표
1951년 11월 4일(일) 흐림-맑음
<전황>
- 유엔군, 자정까지 공산군 공격 격퇴
- 휴전회담 제 17차 합동분과위원회
--- 공산군 측, 우엔군 측의 개성 비무장지대안에 거부 의사 표시
<국내>
- 한국 유엔군 스캡 대표, 한국경제 부흥 위한 비밀회담 개최
1951년 11월 5일(월) 비
<전황>
- 유엔군, 연천 북서쪽에 2개 고지 재탈환
- 휴전회담, 휴전선 설정문제로 난관에 재봉착
<국내>
- 국회, 휴전회담에서의 연백 웅진지구 양보 반대에 대한 건의안 가결
- 정부, 구호물자 암거래 방지 특별 조사위원회 발족
- 공산유격대 열차 공격으로 사상자 24명 발생
1951년 11월 6일(화) 비 – 500일차 -
<전황>
- 유엔군, 간성 북서쪽에서 1.8~2.7km 진출
- 유엔군, 중공군 압력으로 연천 북서쪽 2개 고지에서 철수
<국내>
- 체신부, 전신전화 요금 평균 22% 인상
- 인천 인구 30만 명으로 급증
- 서울시 동회연합회, 개성 확보 요구 시민총궐기대회 개최
<해외>
- 제 6차 유엔총회 한국대표단 일행, 항공으로 파리 향발
- 한 일 예비회담 선박분과위원회 제 4차 회의
1951년 11월 7일(수) 비
<전황>
- 유엔군 보병부대, 연천 서쪽 임진강 부근 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 격퇴
- 휴전회담 제 20차 합동분과위원회
- 양측, ‘즉시 휴전분계선’과 ‘휴전 조인 시 분계선’ 문제로 팽팽한 설전(11.7~16)
<국내>
- 정부, 유엔군사령부 및 일본과 계정 이관에 고나한 재정협정 체결
- 북한방송, 북한 정권 부수상 박동조가 중대 임무 수행 중 사망했다고 보도
1951년 11월 8일(목) 비-맑음
<전황>
- 유엔군, 인제 북쪽의 공산군 외곽진지 기습
- 유엔군, 연천 북서족 고지 재탈환
<국내>
- 대한 여자청년단, 맥아더 리지웨이 밴 플리트 3인 동상 진정식 부산문화극장에서 거행
- 주일대표부 교민과 재일교포 실태 조사
1951년 11월 9일(금) 맑음-흐림
<전황>
- 전 전선 소규모 탐색전 계속
- 휴전회담 제22차 합동분과위원회, 비무장지대 설치안 교착
<국내>
- 재무부, 임시토지수득세법에 다른 수확량 조사 완료
1951년 11월 10일(토) 맑음
<전황>
- 금성 남서쪽에서 6차에 걸친 공산군의 내습 격퇴
<국내>
- 경찰, 전북 충남 충북 3도 합동으로 공산 게릴라 토벌작전 후 귀환
-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전재민구호위원회 사업 강화에 대한 결정 채택
<해외>
- 유엔안보리, 카슈미르 문제 토의, 그라함 조정관이 작성한 카슈미르 비무장화결의안 채택 (9대 0, 기권 2)
1951년 11월 11일(일) 흐림
<전황>
- 동부전선에서 공산군 5개 중대 내습 격퇴
- 휴전회담 제 24차 합동분과 위원회, 진전 없음
<국내>
- 중앙도시계획위원회, 5개 도시 재건 계획 검토
- 대한군인유가족회, 사단법인으로 인가 얻어 발족
1951년 11월 12일(월) 비-맑음
<전황>
- 동부 분지 북서쪽에서 공산군 2개 탐색대 격퇴
- 유엔군, 금성 남서쪽에서 2개 고지 탈환
- 휴전회담 제25차 합동분과위원회, 교착 상태
<국내>
- 국회본회의, 근로노동법안 재검토 등 논의
- 이기붕 국방부장관, 장정귀화문제 등 당면 문제에 관해 담화
- 군사수송관계로 일시 중지하던 전라선 여수-순천 간 여객 취급 개시
1951년 11월 13일(화) 맑음
<전황>
- 고성 남쪽에서 몇 차례에 걸친 공산군 5개 대대 공격 격퇴
- 금성 남서쪽에서 유엔군 보병부대, 2개 고지 점령
- 휴전회담 제26차 합동분과워원회
<국내>
- 이기붕 국방부장관, 한국군 증강계획 발표
- 정부, 연합군최고사령부 유엔민사처 유엔한국재건단 대표단과 경제문제에 관한 회의 개최
- 한 일 회담, 재일교포 문제로 난항
1951년 11월 14일(수) 맑음-흐림
<전황>
- 유엔군, 금성 남쪽에서 공산군 공격 격퇴
<국내>
- 교통부, 공산 게릴라에 의한 열차 피습사고 발표
--- 경부선 영동역에 무장공비 80여명이 내습하여 역사에 방화
- 감찰위원회, 감찰방침강화요강 결정
1951년 11월 15일(목) 흐림-맑음
<전황>
- 양구 북쪽에서 유엔군, 맹렬한 공격으로 일시 철수 했다 재탈환
- 유엔군, 철원 서쪽에서 중공군의 야간공격 격퇴
<국내>
- 금융통화위, 후생주택건설자금으로 12억원, 상수도보급자금으로 14억원 6,000만원 융자 각각 의결
- 각 부처 차관, 차장, 상이군경 위문
<해외>
- 한 일 예비회담 선박분과위원회 제 7차 회의
1951년 11월 16일(금) 비-맑음
<전황>
- 유엔군, 철원 서쪽의 고지 점령
- 극동 공군, 북한 중심부의 철도 파괴
- 휴전 회담 제 29차 합동분과위원회
--- 군사경계선 설정시기에 관하여 장시간 협의 했으나 진전 없음
<국내>
- 심계원 감사단, 도쿄 주재 각 기관의 감사 위해 방일
1951년 11월 17일(토) 맑음-흐림-맑음
<전황>
- 국군 제 6사단, 949고지 점령
- 유엔군, 철원 서쪽의 고지 탈환
- 휴전회담 제 30차 합동분과위원회
<국내>
- 이종찬 계엄사령관, 일반인 군복착용금지에 관한 포고 지시
- 경상북도 경찰국, 동기 토벌작전 전개
- 제3 해남호,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 사망 60명
1951년 11월 18일(일) 비-맑음
<전황>
- 유엔군, 중부전선에서 1.8km 전진하여 북한강 동쪽 3개 고지 탈환
- 영연방 제1사단, 연천 서쪽 1전략 고지 재탈환
<국내>
- 국방부차관, 동래 상이군인 정양원 시찰
- 교통부, 전남 진도 해상에서 조난한 제3해남호 사건 조사결과 발표
- 전라남도 경찰국, 공산 게릴라 토벌 재개
1951년 11월 19일(월) 맑음-흐림-맑음
<전황>
- 국군 제6, 8사단 소속 부대, 금성 남동쪽에서 2차에 걸친 공산군의 정찰공격 격퇴
- 유엔군, 연천 서쪽에서 중공군 대대병력 격퇴
- 휴전회담 제32차 합동분과위원회
--- 공산군 측, 유엔군 측 제안에 대하여 21일 회담 언약
<국내>
- 장면 국무총리, 에치슨 미 국무장관과 한국문제 해결 및 한미동맹 관계에 대해 논의
- 자유당(총재 이승만) 창당
1951년 11월 20일(화) 맑음
<전황>
- 고성 남쪽에서 백병전
- 국군, 금성 동남쪽에서 공산군 동기 방어선 돌파하고 약 6.4km 전진
<국내>
- 국회, 상이군인원호사업강화 대한 건의안 및 경북선 복구에 관한 대정부건의안 통과
- 국방부, 학도훈령에 대비하여 예비역 장교 등록
- 대한여자국민당(대표 임신영) 창당
1951년 11월 21일(수) 맑음
<전황>
- 공산군, 금성 남동쪽 국군 진지에 대한 공격 실패
- 유엔군, 연천 서쪽에서 공산군의 기습 격퇴
- 휴전회담 제33차 합동분과위원회
<국내>
- 장면 부통령, 한국 문제에 대해 에치슨 미 국무장관과 나눈 대화 내용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
- 육군본부, 서남지구 토벌작전 관련 훈령 하달
<해외>
- 한국인강제추방반대투쟁 후쿠오카 현 총장, 후쿠오카 시경의 중지 경고 무시, 한국인강제 추방반대 전국대회 강행
1951년 11월 22일(목) 맑음-흐림-바람
<전황>
- 금성 남동쪽 북한강 동쪽에서 공산군의 탐색공격 격퇴
- 휴전회담 제34차 합동분과위원회 개최
- 유엔 공산군 양측 대표, 23일부터 접촉선 획정 개시 발표
<국내>
- 허정 국무총리서리, 국회에 대전 임시환도 반대 공한 제출
- 허정 사회부장관, 군잉유족회 발족 구호물자 배당 등에 대하여 기자회견
- 반덴버그 미 공군참모총장, 휴전회담 결렬되면 만주 중공군 기지 폭격하겠다고 경고
1951년 11월 23일(금) 비-맑음-구름-맑음
<전황>
- 양군 참모장교 회의, 지상접촉선의 획정 개시
<국내>
- 국회, 유엔군 및 국군수송철도운임개정에 대한 건의안 통과
- 전주시 피난민 수용소, 5개월간 500여명 사망
1951년 11월 24일(토) 맑음-바람
<전황>
- 유엔군, 금성 남서쪽 2개 전초진지를 상실했다 재탈환
- 정전선 획정에 유리한 고지 장악하고자 연천 서쪽에서 맹렬한 백병전 전개
<국내>
- 허정 국무총리서리, 전쟁 피해 발표
--- 재산 피해는 7조 6,500억원, 일반건물 전소는 51만 4,900여 동
- 변영태 외무부장관, 한 일 회담에 대한 담화
<해외>
- 한 일 선박회분과위원회 제11차 회의
1951년 11월 25일(일) 비
<전황>
- 유엔군, 24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연천 서쪽 고지탈환
- 휴전회담 참모장교회의, 전 접촉선의 75%에 대한 의견일치
<국내>
- 국무회의, 수산물 수출 금지 해제 조치의 하나로 대 유엔군 수산판매자에 외국환 매각 의결
- 육군 제13차 상이군인명예제대식, 육군 제839부대 광장에서 거행
1951년 11월 26일(월) 맑음-바람
<전황>
- 유엔군, 연천 서쪽 주요 고지(소 지브롤터) 계속 확보
- 참모장교회의, 232km 전 전선의 양군 접촉선 확정에 관한 최종 협정
<국내>
- 이승만 대통령, 기자회견 통해 기한부 휴전선에 대한 입장 피력
1951년 11월 27일(화) 흐림-바람-맑음
<전황>
- 국군 제6사단 소속 보병부대, 금성 남동쪽에서 중공군과 교전, 북한강 상류의 고지 재탈환
- 잠정 군사분계선 협정 의제 3항 정전과 휴전 세부사항 협상 시작
<국내>
- 정부, 관계기관으로 임시 위생 검찰대 조직하여 유흥업소 단속
- 국제상이군인의 날 기념식(부산 동아극장) 거행
- 대학장회의, 학조진빚 유예방안 결정
1951년 11월 28일(수) 맑음
<전황>
- 유엔군, 양구 북서쪽에서 내습한 공산군 격퇴
<국내>
- 허정 국무총리서리, 개헌안 며칠 내 국회 제출 표명
- 허정 국무총리서리, 화재 입은 피난민 수용서 시찰
1951년 11월 29일(목) 맑음
<전황>
- 유엔군, 양구 북서쪽의 진지 재탈환
- 서부 유엔군, 포병부대에 포격 명령
- 휴전회담 제30차 본회담
<국내>
- 국무회의, 정전회담에 관하여 성명 발표, 유엔에 3개항 질문
① 유엔은 한국영토상에 중공군을 잔류시키는 평화는 수락할 수 없다는 요구를 견지하고 있는가?
② 유엔은 북한 주민의 안전과 복리를 보호 할 조치를 취하고 있는가?
③ 유엔은 한국통일 목적 달성에서 일정한 시간적 제안을 가할 용의가 있는가?
- 정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 국무회의 의결 통과
1951년 11월 30일(금) 맑음-흐림
<전황>
- 금성 남서쪽 유엔군 진지에 대한 공산군의 탐색공격 격퇴
- 휴전회담 제31차 본회의
<국내>
- 정부, 정 부통령 직선제, 상하양원제를 규정한 개헌안 공고
- 이기붕 국방부장관, 12월 1일 공비출몰 지역에 비상계엄령 선포 발표
- 전남 경찰비상경비사령부, 전남 일부 지역에 통행금지를 명하는 포고령 발표
<해외>
- 유엔총회정치위원회, 비신스키 소련수상, 파키스탄 등 3국이 공동 제안한 4국 군축비공식 회담에 동의
- 한 일 회담 국적분과위원회 재개, 국적문제에 관한 실질적 추진 방법을 비공식적으로 의견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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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2월 1일(토) 맑음
<전황>
- 유엔군, 금성 남쪽에서 공산군의 반격 기도 격퇴
- 휴전회담 제32차 본회담
--- 유엔군측, 휴전기간 중 증원부대 투입하지 않을 것 등 4개항 제시
<국내>
- 국회, 유엔 목적에 반대되는 휴전을 반대하는 결의문 채택
- 학생군사훈련실시령 (대통령령 제577호) 공포
- 계엄사령관 이종찬 육군소장, 충북 전라 경남 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 선포
--- 부산 대구를 제외한 남한 전체에 비상계엄령 선포, 치안국 전방지휘소를 남원에 설치, 잔비토벌 군경합동작전 전개
<해외>
- 미 국무성 대변인, 한국 후방에 게릴라 약 1만 8,000명이 준동하고 있다고 언명
1951년 12월 2일(일) 맑음-바람
<전황>
- 미 해병대 영국 기습부대, 야간에 동해안 단천 부근에 상륙, 공산군 통신 수송시설 파괴
- 유엔군, 평강 남서쪽에서 공산군의 공격으로 철수했다 재탈환
<국내>
- 대한군경원호회, 전몰군경유가족 대표 및 군경원호관계관 연석좌담회 개최
- 이종찬 계엄사령관, 비상계엄하 공산 게릴라 토벌작전에 협력 요망 담화
1951년 12월 3일(월) 맑음
<전황>
- 유엔군, 동부전선에서 공산군의 탐색공격 격퇴
- 국군 공군, 지리산 공비소탕전 개시
<국내>
- 사회부, 순국선열 유가족에게 생활비 지급
- 김태선 치안국장, 전라도 방면 시찰 후 공비귀순자 연일 속출 언명
1951년 12월 4일(화) 맑음-비
<전황>
- 동부전선, 북서쪽 금성 남서쪽에서 공산군의 탐색대 격퇴
- 휴전회담 제35차 본회담
- 휴전합동분과회의
<국내>
- 김태선 치안국장, 지방 전투상황에 대하여 기자회견
- 한국군, 공산 게릴라 토벌작전 전개
1951년 12월 5일(수) 맑음
<전황>
- 동부전선에서 공산군 정찰공격 격퇴
- 휴전회담
--- 공산군 측, 4일자 유엔군 질문에 대한 회담서를 유엔군 연락장교에 수교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지리산 공비토벌 협조 요청 방송
--- 공산 게릴라 토발작전에 즈음해 특별방송
- 밴 플리트 미 제8군사령관, 공산 게릴라 토벌작전 순시
1951년 12월 6일(목) 맑음-바람
<전황>
- 양구 일대 문등리지구에서 공산군 탐색공격 격퇴
<국내>
- 사회부, 정전회담의 잠정적 군사구획선 이남으로 남하하는 주민 대책 수립
1951년 12월 7일(금) 맑음-바람-비
<전황>
- 233.3km 전선, 평온
- 유엔 공산 양군 참모총장, 비무장지대 획정 작업 완료
<국내>
- 이순용 내무부장관, 경찰전문학교 규정 발표
- 동래 육군보병학교 교정에서 국제친선축구대회 거행
<해외>
- 마오쩌등, 휴전회담의 포로교환문제에 관한 메시지 전달
--- ‘미국은 미군 실종자 수색을 중국 측에 요구할 근거가 없다’
1951년 12월 8일(토) 맑음-바람
<전황>
- 지상전투 계속 소강상태
- 평강 남쪽 금성 남서부에서 공산군의 야간공격 격퇴
<국내>
- 경남계엄민사부, 징병 징용기피자에 대한 자수기간(8~12) 설정
- 토지수득세 실시로 경상북도 농민들 고통 심각
- 철경대 동선 절취사건 선고, 주범 서울철경대장 이인강 징역 6면
- 부산에서 정전반대 학생시위
1951년 12월 9일(일) 맑음-바람
<전황>
- 유엔군 보병부대, 7일에 상실했던 3개 전초기지 재탈환
- 평강지구에서 공산군 2개 중대의 공격 격퇴
<국내>
- 미 하원 매크라스 등 의원 3명, 한국전선 시찰
- 장면 국무총리,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유엔총회 참가 활동 중간보고
- 100만 학도, 국회의장에게 휴전 결사반대 서한 전달
<해외>
- 4국 군축특별위원회, 유엔정치위원회에 대한 보고서 작성
- 유엔정치위원회의 전 독일선거문제심의에 출석할 동독대표단 파리 도착
1951년 12월 10일(월) 맑음-흐림
<전황>
- 휴전회담 합동분과위원회
--- 유엔대표, 포로교환 토의 위한 분과위 설치 제안
- 양군 참모장교, 비무장지대의 잠정적인 경계선 확정 협정에 서명
<국내>
- 정전회담 양측 대표, 비무장지대 북방 및 남방 경계전 결정 협정에 서명
- 한국 군인을 사살한 오스트레일리아군 이등병, 군법회의에서 살인죄로 기소
1951년 12월 11일(화) 맑음
<전황>
- F86 제트기대, 공산군 MIG기 2대 격추, 2대 격파
<국내>
- 주일대표부 전권공사로 임명된 김용식 기자회견
--- 주일대표부 운영문제에 대한 입장 설명
1951년 12월 12일(수) 맑음
<전황>
- 유엔군, 연천 서북에서 공산군 진지 공격
- 유엔 공군폭격기대, 전선일대 적진 및 보급로 폭격 계속
<국내>
- 제주도 경비사령부, 공산 게릴라 토벌 성과 발표
- 서울에서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 개최
1951년 12월 13일(목) 맑음
<전황>
- 유엔군 탐색대, 서부전선에서 2차에 걸쳐 교전
- 휴전감시 포로문제 양 합동분과위원회, 양측 주장 대립으로 진전 없음
<국내>
- 민국당, 남한 출신 의용군의 포로교환 반대 성명
- 거제도 반공포로, 국회에 석방탄원서 제출
1951년 12월 14일(금) 맑음-눈-맑음-바람
<전황>
- 미 제25보병사단, 평강 남서쪽의 공산군 진지 정찰공격
- 유엔군 정찰대, 고랑포 북서쪽에서 공산군과 5시간에 걸쳐 교전
<국내>
- 기획처, 유엔한국민사처에 5억 달러 원조 요청
- 재향군인회 창립 발기인회 개최
- 유엔총회 한국대표, 정전반대 입장 천명
1951년 12월 15일(토) 맑음
<전황>
- 전 전선에서 산발적인 탐색전
- 휴전감시합동분과위원회
- 포로교환분과위원회
<국내>
- 정부, 이재민 양곡할당 및 수송을 농림부로 일원화
- 국방부, 전국 중등하교 및 대학교의 학도훈련계획 수립
1951년 12월 16일(일) 맑음
<전황>
- 동부전선 북쪽의 유엔군지구에 대한 탐색공격 격퇴
- 유엔군, 판문점 남쪽의 공산군 진지 습격, 교전 후 철수
<국내>
- 정부, 공산군 포로 4만명이 한국에 충성 맹세한다고 발표
<해외>
- 덜레스 미 국무장관 고문, 한국전선 시찰 마치고 도쿄로 귀환
1951년 12월 17일(월) 맑음
<전황>
- 평강 남쪽의 터키 부대, 전초선에서 공산군 격퇴
- 포로교환분과위원회
--- 공산군 측, 억류포로 전부 석방에 동의 요구
<국내>
- 대구 휴전반대 국민대회 개최
- 평양방송, 한국군 점령하에 있던 서해안의 숙도, 육도 탈환 보도
1951년 12월 18일(화) 흐림-맑음
<전황>
- 철원 북서쪽에서 대대병력의 공산군 격퇴
- 니콜스 준장, 포로가 된 남한 출신 의용군 석방 방침 발표
- 포로교환분과위원회
--- 공산군 대표, 포로명부 제출에 동의, 오후 3시에 포로명부 교환
<국내>
- 이승만 대통령, 딘 소장 생존 보도에 담화 발표
- 당진에서 해상 선박 사고로 80여명 익사
1951년 12월 19일(수) 흐림-맑음
<전황>
- 김화 금성 도로상에서 정찰교전
- 철원 북서쪽에서 대대병력의 공산군, 포화공격
<국내>
- 제 11회 임시국회 개회식
- 덕수궁에서 정전반대 납북인사 석방 위한 궐기대회 개최
- 휴전반대 서울시민 총궐기대회, 덕수궁 광장에서 거행
1951년 12월 20일(목) 맑음
<전황>
- 유엔군, 북한강 상류에서 공산군의 공격으로 철수
- 휴전감시합동분과위원회
--- 회담의 진척 위해 제 원칙의 작성을 작전참모장교회의에 위임
<국내>
- 이종찬 육군총참모장, 거창사건 결심 공판 결과 담화
- 겨울 공부용 ‘전시부독본’ 배부
<해외>
- 한 일 예비회담 선박분과위원회 제24차 회의
--- 양측 대표, 각각 반환을 요구하는 선박목록 교환, 1월 8일가지 휴회 결의
1951년 12월 21일(금) 맑음-비
<전황>
- 제 7사단 공병단, 50일 만에 ‘단장의 능선’상에 전차로 완성
- 평강 남쪽 금성 서쪽 유엔군 전진 기지에 대한 공산군의 공격 격퇴
<국내>
- 통일 없는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 충북에서 개최
- 유엔사령부와 유엔한국재건단, 도쿄에서 한국 재건문제 협정 체결
1951년 12월 22일(토) 비
<전황>
- 연천지구에서 공산군 공격 격퇴
- 포로교환합동분과위원회
--- 유엔군 측 상병포로 즉시 교환 요구
<국내>
- 국회, 납치 애국자의 석방 청원 정부로 이송, 휴전회담에서 조속히 실현하도록 특별조치 요망
- 경남병사구사령부, 제2국민병 보충 소집, 부산시 등 도시응소율 여전히 불량
1951년 12월 23일(일) 맑음
<전황>
- 간성 서쪽에서 공산군의 부대 격파
- 금성 남서쪽에서 공산군의 탐색공격 격퇴
<국내>
- 이기붕 국방부장관, 한국에 충성 맹세한 의용군 포로 4먼명 석방 주장
- 프란시스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장관, 주한 오스트레일리아군 부대 시찰차 내한
1951년 12월 24일(월) 맑음
<전황>
- B29 공중요새기대, 태천비행장 및 신안주 공산군 교량 폭격
- 공산군 측 대표, 국제적십자대표의 공산군 측 포로수용소 방문 허가 요청 제의 거부
<국내>
- 서울시 경찰국장, 치안문제에 대하여 기자회견
- 미 공군대학 파견장교, 김창규준장 외 9명 도미 유학
<해외>
- 베이징 방송, 공산군 측은 포로수용소 조사문제보다 포로의 안전보장을 더욱 중요시 한다고 강조
- 프라하방송, 체코는 북한공산군을 원조하기 위하여 병원열차를 파견하기로 했다고 보도
1951년 12월 25일(화) 비
<전황>
- 제 7사단, 크리스마스고지 전투(25~28)
- 고랑포 북서쪽에서 공산군의 경미한 공격 격퇴
1951년 12월 26일(수) 눈-맑음
<전황>
- 문등리 서쪽 전초기지 쟁탈전 계속
- 유엔군 탐색대, 판문점 근방에서 3시간에 걸쳐 교전
<국내>
- 국회 임시토지수득세법 실시 상황 보고
- 국회, 분배농지대가 상환기간 3년 추가 연장하는 농지개혁법 개정안 제출
1951년 12월 27일(목) 맑음-흐림
<전황>
- 문등리 서쪽 고지에서 교전
- 중부 및 서부전선은 접촉 경미
- 국군 공군, 원산 출격
<국내>
- 피납치자 가족회, 피납치자 가족간담회 개최하고 포로교환에 포함 주장
- 세계 탁구대회에 선수 파견
1951년 12월 28일(금) 맑음
<전황>
- 유엔군, 문등리 서쪽지구에서 전초진지 재탈환
- 지리산잔비소탕전 활발, 공산군 손해 3,609명, 국군 측 전사 50명, 부상 52명
<국내>
- 국회 농림부 수련, 농지개량사업 추진 위해 국고보조 80%, 농민 20% 부담에 관한 원칙 책정
- 민국당 정순조의원, 상하 양원제와 책임 내각제 골자로 한 신개헌안 발의
<해외>
- 베이징 방송, 한국 휴전협정이 기한 내로 성립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유엔군 측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
1951년 12월 29일(토) 맑음-흐림
<전황>
- 고랑포 서쪽에서 전투 계속
- 지리산 공비소탕전에 3,060명 사살
<국내>
- 건부, 전쟁에 다른 결핵환자 급증에 대처하여 한국 최초로 결핵예방접종 실시
- 전라북도 장수경찰서, 공산 게릴라와 회담하면서 귀순공작 수행
1951년 12월 30일(일) 흐림-비
<전황>
- 전방 기온 영하 20℃
- 유엔군, 고랑포 서쪽에서 9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공산군 2개 중대 격퇴
<국내>
- 평양방송, 공산군은 해주만의 대수압 소수압도 탈환했다고 발표
1951년 12월 31일(월) 흐림-맑음
<전황>
- 고랑포 서쪽에서 백병전
- 휴전감시합동분과위원회, 리너 유엔군 대표가 공산군 측의 공군력 증강요구 고집 비난
<국내>
- 정부의 초긴축 재정 금융정책으로 산업자금난 심각
- 연말 물가지수 3,368.5 (1947=100 기준)
- 화폐발행고 5,770억원
<주> : 본 자료는 6.25전쟁 1,129일간 일지(1950.6.25~1953.7.27) 내용이며,
- 저자는 부영그룹 창업자인 이중근회장 편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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