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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텔라의 마음공부 >
고양이들은 새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창문 통해 새들을 관찰하는 고양이
그전에 살던 집은 옹색하나마 작은 정원이 있어 아침이면 새들이 “짹짹” 소리를 내며 찾아들었다. 예삐는 아침이면 “호로록” 소리와 함께 목에 달아준 방울을 딸랑거리며 내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말한다. 창문 너머, 나무 위로 찾아오는 새들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소리에 민감한 나는 예삐의 방울 소리에 잠이 깨어 수행하러 방석에 앉기 전, 일단 예삐를 위해 창문부터 열어주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면 예삐는 내가 사준 자신의 집(Cat Tower) 맨 꼭대기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한 번은 나도 ‘도대체 뭐가 그리 재미있는 게 있기에 매일 아침 저렇게 똑같이 앉아 있나?’ 싶어 예삐와 함께 한참 동안 창밖을 관찰한 적이 있다. 키큰 바나나 나무에 참새들이 몇 마리, 수다를 떨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전선을 따라 다람쥐가 곡예를 부리는 것도 보였다. 나뭇잎은 바람에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그저 고요해보였던 코딱지만한 정원은 나름대로의 교향악이 펼쳐지는 소우주(Micro Cosmos)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우주 속에서 일체의 법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고양이들은 새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벌새들
벌새들이 좋아하는 넥타와 넥타 컨테이너
예삐는 흡사 수행자처럼 꼼짝 않고 앉아서 그 모든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한다. 눈하나 깜짝 않고서. 지지난 호에서도 썼듯이 고양이들의 관찰력에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일단 한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면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다. 세존께서 고양이에 대한 비유를 괜히 하셨을까.
정원은 못 만들어주어도…
그런데 새로 이사온 집은 예삐가 아침마다 바라볼 만한 정원이 없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원을 찾아오는 새들, 즉 움직이는 작은 생명체가 없었다. 어쩜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지… 이러다가 예삐가 너무 지루해서 우울증이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가 주인이 아닌 이상, 듬성듬성 누런 풀이 나 있는 정원에 나무를 심을 수도 없는 일. 나는 어떻게 예삐를 위해 새들을 불러올까, 머리를 굴리며 아는 집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집사’란 고양이 주인들을 일컫는 별칭이다. 개는 주인에게 충성하지만 고양이 주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나서서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 역할’을 자처하기 때문에 서로를 집사님이라고 부른다.
그녀 역시 아파트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고양이가 심심해할까봐 벌새(Humming bird)들을 유인하는 넥타(설탕물을 섞은 음료)를 컨테이너에 달아 매달아둔다고 했다. 전자 상거래 사이트인 아마존에 들어가보니 종류도 다양한 벌새 유인 넥타와 그것을 매다는 컨테이너 상품들이 있었다.
여러 자료들을 참고해본 결과, 벌새 유인 컨테이너는 빨간색이어야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벌새들은 시력이 좋아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붉은 색 꽃을 보면 날아온다는 것이다.
설탕을 풀어 시럽을 만들어도 될 터이지만 처음 시도하는 것인지라, 실패를 줄이기 위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구입했다. 도착한 상품은 빨간색 병과 함께 빨간색 꽃 장식까지 달려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 집 창문에 벌새 유인 컨테이너를 매달자니 창문 창살 때문에 똑바로 내려지지가 않는다. 이런저런 하드웨어를 매달아보다가 난 결국 포기했다.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벌새 유인 컨테이너를 설치하나, 유튜브를 검색해봤더니 대부분 나뭇가지에 매달고 있었다. 에고…
고양이 위해 나무 화분 마련
그리하여 나는 결국 벌새들이 좋아하는 빨간 꽃을 피우는 나무 화분까지 구입하려고 현재 열심히 연구 중이다.
벌새들이 좋아하는 나무로는 묵능소화(Tecoma Capensis), 한라산참꽃나무(Azalea), 부들레야(Butterfly Bush 또는 Buddleia), 서양측백나무(Cape Honey suckle), 미모사(Mimosa) 등이 있다. 물론 붉은 색이 아닌 꽃도 있지만 대부분은 붉은 색이다.
이 나뭇가지 사이로 이미 구입해놓은 벌새 유인 넥타가 들어있는 컨테이너를 매달아놓으면 꽃이 피던 안 피던 새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은 이 꽃들은 새들을 유인하는 물질을 만들어냄으로써 꽃가루를 옮겨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었다. 꽃가루를 옮겨주는 것은 나비와 벌들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침마다 새들이 짹짹 거리며 나무에 찾아드는 것은 나무의 꽃에 먹을 것이 있어서이고, 꽃들은 새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는 댓가로 발품 하나 팔지 않고도 꽃가루를 암술에 옮김으로써 열매를 맺는다.
나는 자연의 지혜로움(Intelligence)에 다시 한 번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렇구나. 그렇게 우주가 운행되는구나. 스스로 수고로움을 하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나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미국의 유명한 불교 학자 알란 왓츠(Alan Watts)의 강의 중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정확하게 한 마디 한 마디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기억 속 강의를 요약해보자면 대충 이런 것이었다.
“어느 날, 들판에 서 있다가 대기 중을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를 보고 손을 뻗어 잡아 바라보았다. 민들레 홀씨는 자기 몸을 가볍에 만들어 바람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러면 바람은 민들레 홀씨를 원하는 곳으로 날라다 준다. 자신이 직접 하지는 않지만 스스로의 힘을 빼고 맡김(Surrender)으로써 민들레 홀씨는 발 없이도, 걷지 않고도 멀리 날아가 번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어떻게든 자신이 해보겠다고 갖은 애를 쓴다.
자연을, 우주를, 스스로를 믿지 못함에서 오는 결과이다.
수행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수행의 긍정적 효과를 얘기해줘도 대부분은 시큰둥한 표정들이다. 그들은 반복함으로써 서서히 결과가 드러나는 수행보다, 당장 즉각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 믿는 ‘쎈 놈’을 ‘내가 하기’ 원한다. 때로 그것은 약(Medication)이고, 때로는 수술이다. 물론 술과 쇼핑, 부적, 성형수술, 연애, 여행 등 탐진치를 일으키는 대상들도 해당된다.
가만히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모든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다 보면 이 경험들의 무상함과 함께 관찰하는 존재를 만나게 되고, 그 관찰자를 관찰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보면 경험하는 대상과 경험하는 자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된다. 저항해야 할 것도 탐욕을 일으킬 것도 없다. 그저 힘을 빼고 현재에 모든 것을 완전히 맡기고 쉰다. 내가 한다는 상 없이, 그저 존재해본다. 우주가, 삶이 알아서 작용하도록 허용하면서… 그렇게 완벽하게 맡길 때의 기쁨은 이 세상에 속한 쾌락이 아니다.
아난존자가 1차 결집 전날 새벽, 스스로 아라한이 되려고 열심히 수행하던 노력을 결국 포기하고 쉬려 자리에 눕던 순간, 깨달음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기억해본다.
깨달음이란, 열반이란 나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라지는 순간, 자연적으로 찾아온다. 어쩌면 세존께서 스스로를 여래(如來, 땃따갓따)라 불렀던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여래의 원어인 땃따갓따의 문자적 의미는 ‘이와 같이 가신 분 또는 이와 같이 오신 분’이다. ‘진리의 세계로부터 온 존재’라는 뜻도 있다. 이와 같이 찾아오신 존재.. 즉 내가 사라진 곳에 홀연히 드러난 존재가 바로 여래인 것이다.
예삐로 인해 만나는 새로운 우주
고양이 한 마리에 대한 사랑인지 집착인지로 인해 나는 새로운 우주를 경험한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나, 새를 사랑하는 고양이, 꽃을 사랑하는 새… 이 순환은 아마도 끊임 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 세상 모두가 이와 같을 것이다. 강아지 애호가는 개들을 통해, 개를 돌보며 얼마나 많은 세상을 이해하게 될까.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 조류 관찰을 즐기는 자,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한가지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 주의 집중, 반복은 이처럼 새로운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우주가 아무런 애씀 없이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잘 운행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의 욕망의 대상은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피안의 세계를 깨닫게 해주는 창(Window)이 되는 것이다.
고양이 애호가였던 작가 헤밍웨이
역사상 애묘인들
약 1만 년 전부터 인간과 함께 살기 시작한 고양이들은 역사속에서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그 가운데에는 “그 사람도?”라고 반문하게 될 만한 유명인사들도 상당 수
이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키웠었다. 그는 고양이 이름을 짓는 데에도 창조력을 한껏 발휘했다.
라오디케이아의 주교로 구약성경을 시문 형태로 편집했었던 아폴리나리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고양이도 있었고, 바알세붑, 사탄, 죄(Sin), 조로아스터 등 상당히 종교적인 뉘앙스를 지닌 이름도 여럿 지었다. ‘밤비노’란 이름의 고양이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뉴욕 타임즈>에 광고를 내기도 했고 보상금으로 5달러(당시의 물가를 생각해볼 때 대단한 액수이다.)를 내걸기고 했었다.
<노인과 바다>의 작가, 헤밍웨이도 애묘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스탠리 덱스터라는 선장이 선물한 백설공주(Snow White)라는 이름의 고양이는 발톱이 6개 있는 다지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그룹 퀸(Queen)의 리드 싱어인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역시 소문난 고양이 아빠이다. 그는 런던의 대저택에 고양이들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었다. 투어 때면 그는 집에 전화를 걸어 고양이 한 마리 한 마리를 바꿔 달라고 하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무료 전화를 한 것도 아닌 시절, 그는 비싼 통신료를 지불하면서 고양이들이 밥은 잘 먹었는지, 화장실은 잘 갔는지를 일일히 챙겼었다고 한다. 프레디 머큐리가 처음 키웠던 두 마리의 고양이 이름은 만화영화로도 유명한 <톰과 제리>란다.
그는 후천성면역결핍증 진단을 받은 후, 삶의 마지막 날들을 애인과 함께 여러 고양이들과 지냈었다. 특히 <들라이라 (Delilah)’라는 이름의 삼색고양이는 죽음을 앞둔 그에게 많은 기쁨을 주었다고 한다.
행복감에 배를 드러내보이는 고양이
고양이에 관한 명언
고양이 애호가들은 고양이와 지내던 기쁨, 고양이와 함께 하며 깨달은 지혜를 이런 언어들로 표현했다.
“고양이와 함께 한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Time spent with cats is never wasted.)”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고양이이다.(Cats rule the world.)” - 짐 데이비스(Jim Davis)
“인간이 고양이를 소유하는 게 아니다. 고양이들이 우리들을 선택한다.(Cats choose us; we don't own them.)”
- 크리스틴 캐스트(Kristin Cast)
“잠자는 고양이를 보면 긴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You can’t look at a sleeping cat and be tense.)”
- 제인 폴리(Jane Pauley)
남의 자식 자랑처럼 듣기 싫은 것도 없다던데… 본의 아니게 자식 같은 고양이 얘기를 늘어놨다. 하지만 당신이 자식을 키우며 삶의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체득하는 것
처럼 내게는 고양이 예삐가 인드라망 같은 세상을 경험하는 하나의 입구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욕망은 모든 현재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무상하며 고통이고 자성이 없다. 욕망의 대상과 함께 그 대상을 향한 욕망을 고요히 관찰하다 보면 대상과 관찰자의 경계가 사라지며 존재 속으로 녹아드는 순간이 온다. 그 창을 통해 세상을, 우주를 경험하면서 또 한 편으로 이 경험의 무상함을 기억한다면 욕망은 당신을 욕망 너머로 데려다줄 뗏목이 될터이다.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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