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굴비찜
특출한 한 가지 기능 보유자는 같은 길이 자주 열린다면, 한 사람 다기능 보유자의 길은 수시로
달리 열린다. 오늘 그 후자의 한 사람인 배우 김수미가 텔레비전 방송계에서 새로운 먹방
프로그램의 맛손으로 진행한다. 어머니에게 전수받은 전통 손맛을 선보이는데, 고사리 굴비찜을
시연하고 4사람이 같은 재료로 배운대로 요리를 해 보인다. 뜨물에 굴비를 담가두었다가
사용한다는 것과 양파를 넣어 찝찔한 맛을 상쇄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게다가 한 두름을
모두 요리해두었다가 덜어서 덥혀먹어도 좋다는 말에 솔깃하여 언젠가 한번은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어느 날, 외출에서 늦게 들어오다가 아파트 내 목요장터로 향했다. 차일의 귀퉁이 막대에서
굴비 한 두름이 흔들린다. 나는 굴비에 이끌려 단숨에 차일 안으로 들어가서 주저함 없이 샀다.
그 날부터 반찬이 변변치 않으면 굴비를 구워 입 호사를 했더니 어느새 6마리나 사라졌다.
다시 목요일, 복지관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이 파장 직전이라 나는 어김없이 장터로
직행했다. 야채전에서 한 봉지 남은 고사리를 무의식적으로 샀다. 집에 와서 장 본 것을 펼치면서 후
회했다. 여름이라 고사리를 살 이유가 없는데 괜히 샀다는 생각에 조금 귀찮아졌다. 얼른 딤채 야채
칸으로 던지다시피 집어넣었다. 그리고 오이피클을 담고 오이와 부추를 섞은 김치를 담았다. 일을 마
치고 양푼과 주걱에 묻은 양념을 씻어 작은 냄비에 부으면서 왜 고사리를 샀는지 생각이 났다. 그 국
물에 양념을 첨가하여 자작자작하게 부을 수 있을 것 같아지자 그제서야 고사리 굴비찜을 해볼 수 있
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하나의 사건을 겪으면서 그 일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니 놀랍기 그지없
다.
내 기억에 고사리 굴비찜이 들어와 고사리 따로 굴비 따로 흩어져 저장되었다. 그 것이 보이는 순간
‘한번 만들어 보아야지’ 했던 마음과 결합하여 굴비를 사고 말았다. 선택의 주도권이 기억이었다. 놀
라운 확인 작업이다. 내가 굴비에 유혹 당한 것은 결국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세상의 무엇과 만나서 선택한다는 것에 우연은 없다. 지금 이전의 언젠가 무엇 때문에 자극
을 받았거나, 뜻을 두었다거나 무엇과 매치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었거나 기억 안에 미세한 정보가
저장되었다가 그 정보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여건과 만나면 튀어나와 현실화 되고 만다.
자기 안에 어둠이 있으면 어두운 이야기 거리에 투사하고, 자기 안에 욕구불만이 있으면 현실에 못마
땅한 일이 보이면 침을 튀기며 반응하며 불편한 자신을 비워낸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의 인생은 순전히 과거의 자신과 사회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집합체이다. 자신
이 속했던 시대의 특성이나 세상이란 배경도 자기가 있음으로 기억 안에 들어온 것이다. 인생의 내용
을 수시로 꺼내서 성찰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인식의 오류를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야
만 한다. 글쓰기 작업을 통해서 기억을 치유한다는 것은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여
저장하는 이치이다. 파편화되어 내적으로 굴러다니는 생각이나 감정이 발화되어 나오기 전에 꺼내
서 통합해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자신에 대해 말하고 글로 쓰면서 무의
식이 흘러나오게 되는가 섬세하게 관찰하다가 보면 오류를 발견하게 되고 터무니 없는 생각을 가지
고 살아간다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예기치 않은 일이란 무의식의 간섭으로 현실이 낯설게 되는 일이
기도 하다. 나와 타인의 무의식 세계의 개입을 용서하게 되고 기억과 화해가 이루어지는 일은 축복이
다.
아마도 고사리 굴비찜의 전신 기억으로 조기탕을 할 때에 굴비와 소고기, 버섯 등이 잘 어울렸다는
맛의 기억이 있어서 쉽게 접근하게 했을 것이다. 여러 번 해본 사람과 구경만 한 사람, 구경도 해 보
지 않은 사람은 완연히 다르다. 일상에서 경험치가 짧아서 고생해보지 않고는 수긍하기가 어렵다. 무
엇이든 건강한 시도를 해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이를수록 좋고 많이 하거나 깊게 할수록 좋
다. 실패도 경험으로는 유익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이 따르는 성인이 되었을 때는 이미 실수가
아니라 실패가 되므로 누적된 경험치를 많이 가진 사람이 기억을 재정비하고 세상으로 뛰어들게 되
면 시행착오를 줄이고 파편화되어 나타나는 현상에 결코 무디지 않게 된다. 사고에 장애물이 적고 느
낌이 왜곡되지 않으면 멀리 정확하게 볼 확률이 높아서 현실파악이 빠르다. 그에 상응하여 삶이 상대
적으로 싱싱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자신을 잘 보는 능력자는 수고대비 결과를 높게 얻을 수 있는데
탁월한 기능 보유자다. 현실적으로는 한 가지 특출한 기능으로 여러 곳에 쓰이는 사람에게 일이 많이
주어진다. 그러나 인생을 통틀어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기능으로 다양하게 쓰이면 특별하게 어려울
일이 드물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결국 다양하게 필요해서 다양하게 발전한 인생 유형이니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욕하지도 말고 제 꼴대로 풀면서 무던히 살고 가면 족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