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유목流木이 되어라 (2)
-.내적 폭발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다시 공空에 이른다 해도 그것은 태초와 차이가 있다.
첫 번째 공은 무의식적이었고, 두 번째 공은 의식적이다. 첫 번째는 어둠과 같았고, 두 번째는
빛과 같았다. 첫 번째는 밤과 같았고, 두 번째는 낮과 같다. 첫 번째를 수슈프티라고 하고,
두 번째는 자그리티jagriti, 즉 각성 또는 완전한 깨어남이라고 한다. 이것은 온전한 원이다.
* 수슈프티sushupti : 꿈 없는 잠의 상태.(깊은 잠)
※타종교는 직선적이다. 그러나 불교는 '원'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외적 폭발이 내적 폭발 속으로 사라질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소리 없는 소리가 나며,
더 이상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선禪에서는 이것을 ‘한 손으로 치는 박수’라고 말한다.
힌두교에서는 아나하타나다anahatnada 또는 옴카르omkar, 즉 ‘소리 없는 소리’라고 부른다.
그 첫 번째를 힌두교에는 나다비수nadavisphot, 즉 빅뱅 또는 폭발음이라 불렀다. 두 번째로
소리가 침묵으로 이동할 때 이야기는 완성된다. 과학은 아직 반쪽 이야기에 매달려 있다.
다른 반쪽을 놓치고 있다. 그리고 영혼의 어두운 밤인 수슈프티로부터 꿈으로, 꿈으로부터
각성으로 가는 이 전체 놀이를 지켜보는 자가 있다. 모든 것을 관조한 자, 투리아turiya라고
불리는 네 번째 상태를 지켜보는 자, 그것을 안 자, 그는 붓다는 된다. 그것을 알고 체험한 자.
그는 아라한Arhat이 된다. 그는 도달했다.
<예> 해외 포교로 널리 알려진 ‘숭산’ 큰스님에게 자기 집을 법당으로 사용토록 도와준 보살이
오랜만에 스님을 만나자 반가워 허그를 함(hug. 껴안다). 스님이 보살의 뺨을 때리면서
‘이게 뭐냐(What is this)’며 호통을 침. 뺨을 맞고 만감이 교차한 보살이 아픈 기색도 없이
합장하고 “Thank you”하며 절을 함.
# 외적 폭발(뺨을 맞음)로 인해 깨우침. 보살이 잠들어 있었다면 화가 났을 것인데 참선을 통하여
‘깨어있는 자’였으므로 Thank you라고 말함. 깨달음의 경지에 이름. 이것이 공부인의 참모습이다.
-.T.S. 엘리엇은 몇 줄의 아름다운 시를 썼다.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게 되리라.
모든 탐험의 끝에서 우리는 출발했던 곳에 이르게 되고 그제야 처음으로 그곳을 알게 된다.]
* T.S. 엘리엇 :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 대표작-황무지(사월은 잔인한 달 ~~)
이것이 붓다가 말하는 포기이며 부정의 길이다. 그대는 출발했던 지점에 이르러야만 한다.
그대는 이미 그대 자신인 그것을 알아야 하며, 본성적으로 잃어버릴 수 없는 그것에 도달해야 한다.
그것과의 연결을 잃어버릴 방도는 없다. 그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 종교란 본래의 자신을 자각(自覺)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 원. 무시무종이다. 그대의 본래 자신은 늘 거기에 있다.
<예> 경남 사천의 ‘다솔사’에 도둑이 들어 신중단 탱화를 훔쳐 감. 스님들이 새벽 예불 중,
탱화가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람. 도둑이 훔쳐서 도망을 가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음을 알고, 겁에 질려서 탱화를 두고 도망감.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아랫마을 농부가 자기 논에 버려진 탱화를 들고 옴. 탱화는 본래 자리로 돌아감.
-.부정의 길에는 다소의 어려움이 있다. 불교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마음은 대개
매달릴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것들만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는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반대로 무언가를 잃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상실은 그다지 마음을 끌어
당기지 못한다. 우리의 생각은 온통 더 많이 가지는 데만 쏠려 있다. 게다가 붓다는 소유자야말로
문제라고 말한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잃는다.
* 가지면 가질수록 자신을 깨닫기가 더 힘들기 때문이다.
-.논리를 토대로 한 것은 논리로써 무너질 수 있다. 만약 어떤 것이 논리적인 증거를 토대로
세워져 있다면 그것은 논박당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결코 논리를 토대로 삼지 않고,
체험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논박당할 수 없다. 불교는 실존적이며, 어떤 신화도
믿지 않으며, 관념적인 말을 하지 않고, 내면의 가장 깊은 체험을 묘사할 뿐이다. 이러니
불교가 철학자들로 부터 논박당하지 않았다.
* 논박(論駁) : 남의 주장이나 견해에 대하여 잘못된 점을 조리 있게 지적하여 따지는 것.
* 체험이라는 토대 : 붓다께서 설산수도 등 내면의 세계를 증명해 보임.
-.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불교가 사라진 근본적인 이유는 철학자들의
논박 때문이 아니고 붓다와 그의 추종자들이 불교의 청정함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고집이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만들었다.
-. 그러나 불교는 중국, 티베트,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에서 성공했다. 그 이유는 인도에서
벌어진 일을 보았던 인도 출신의 포교승들이 아주 타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긍정적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으며, 성취, 지복, 극락을 말하며 붓다가 부정했던 모든 것을 뒷문으로
들여왔다. 일반적인 대중들은 기뻐했다. 인도를 제외한 중국 등 아시아 전체가 불교로 개종했다.
인도에서는 어떤 타협도 없이 청정함만을 심어 주려고 노력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 부정에서 긍정으로, 현실과 타협했기 때문에 불교가 대중적인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불교는 그 진실함을 잃었다.
※조직화된 종교는 죽은 것이다. 종교는 오직 대중과 타협해야하고, 집단의 욕망을 따라야만
조직화될 수 있다. 따라서 종교는 조직화될 수 없으며, 조직화된 것은 종교가 아니다.
[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도를 따르는 사람은 물결 따라 흘러가는 나무토막처럼 움직여야 한다.
양쪽 언덕에 닿지 않고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고 신들에게 가로막히지도 않으며
소용돌이에 머물지 않고 썩지도 않는 나무는 마침내 대양에 도달하리라. ]
-.대단히 심오한 경문이다. 먼저 붓다는 “따르라!”고 말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싸우면 싸울수록, 투쟁하면 투쟁할수록 더 많은 장애물을 만들게 될 것이다.
진리와 싸울수록 더 크게 잃을 것이다. 물론 싸움을 통해서는 에고를, 아주 강한 에고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에고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
-.삶의 강에 완전히 내맡겨야 한다. 존재의 강에 완전히 내맡겨야 한다. 깊은 내맡김 속에서
에고는 사라진다. 에고가 존재하지 않을 때, 처음으로 항상 있었던 그것을 자각하게 된다.
에고ego는 눈가리개와 같아서 그대를 장님으로 만들며, 진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를 따르는 사람은 물결 따라 흘러가는 나무토막처럼 움직여야 한다.
◐ 원력무궁(願力無窮)
대만의 불광산사에 성운 큰스님이 계신다. 지진, 해일, 태풍, 화재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불광산사의 구호단체가 제일 먼저 도착하여 인명구조는 물론이고 도시락, 물, 담요 등을
생필품을 공급해준다. 관계기관의 공무원들보다 국민들은 큰스님과 신도들의 큰 원력과
자비 나눔을 더 신뢰하였다. 원래 대만은 불교 신도가 적었지만 성운 큰스님의 무궁무진한
원력으로 현재 80%의 국민이 불자라고 한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은 가장 불행한 삶이다. 남을 위하여 나누고 헌신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하자!! 원력은 무궁하다.
< 이상은 주지스님의 9/10 토요공배 강의내용 요약입니다. >
첫댓글 추석 명절 연휴로 인하여 9/17(토)는 공배를 휴강합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늘 함께 하여
풍성한 한가위 되시고 가정에 웃음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주지스님 명강의...
고맙습니다~()~
혜법회장님.
덕분에 복습 잘하고, 귀하신 법문 다시 한 번 더 새겨봅니다~^^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