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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사도행전 26 : 24 - 32
우리나라의 명절은 불신자들이 죽은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을 전통으로 지킵니다. 그래서 방송을 통해서 종가에 몇 대를 이어오면서 종손들이 함께 모여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방송합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언제까지 계속 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자신들이 죽고 나면 아들 손자 저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합니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안주인도 명절 때마다 준비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현대인 며느리가 자신처럼 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대를 이어 조상을 섬기는 차례도 아들 손자 때는 맥이 끊어지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조상 섬기는 것이 허구한 짓이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조상을 섬기는 것이 진실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들 손자에게 이것만을 너희들이 꼭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하지만 아들 손자는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나는 믿지만 다른 사람이야 어떠하든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29)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구원의 주가 되심을 조금도 의심없이 믿는 확신에 찬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예수님에 대한 의심을 한다면 이렇게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예수를 믿어 구원 받기를 원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신비한 진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자신의 최고의 행복함을 의미합니다.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이 말씀 앞에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자녀들에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아니면 조상을 섬기는 사람들처럼 예수 믿는 것도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지 한번 스스로 자신을 살펴봅시다.
무당이 아들에게 ‘너도 나처럼 무당이 되라’고 말하기 보다는 ‘나는 무당이 되었지만 너는 무당이 되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는 아들에게 ‘내가 목사가 된 것처럼 너도 목사가 되라’고 말해주는 목사가 많이 있습니다. 아니 아예 아들을 낳으면 목사 되기를 서원 기도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사가 대접을 잘 받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점쟁이가 자녀들이 점쟁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돈을 못벌기 때문이 아니라 속이고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처럼 되기를 원하지 않은 것도 있었습니다. ‘결박된 것’은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결박된 것’은 자유롭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가 총독에게 고발하여 미결수로 수감된 상태입니다(24:1). 이때 총독은 밸릭스였습니다. 당시 로마 총독 관저는 가이사랴에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변호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와서 총독에게 바울을 ‘전염병 같이 유대인들을 소요하고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고발했습니다(24:5). 그래서 바울은 총독관저에 수감되었습니다. 아직 재판을 하지 않은 미결수로 유치되어 있었습니다.
총독은 로마 사람으로 유대 종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울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속히 재판을 하지 않고 2년을 구류하다가 벨릭스 총독은 로마로 돌아가고 다음 총독으로 베스도가 부임하여 바울을 다시 재판을 합니다.
베스도 역시 로마 사람으로 유대인의 종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올려보내 유대인의 왕에게 넘기려고 했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거절하고 황제 가이사의 재판을 받기를 원한다고 상소를 했습니다(25:11).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므로 유대인들의 작은 문제는 유대인들의 법에 따라 대제사장과 유대 왕의 재판을 받았지만 사형은 로마 총독에 의해 집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은 최고의 재판은 로마 황제에게 항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유대인의 손에 넘겨 재판을 받기를 원하지 않고 가아사 황제께 재판 받기를 원한다고 상소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2년 이상을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결박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음대로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무언가에 잡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가난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든지, 몸이 불편해서 맘대로 다니지 못한다든지, 하여튼 무언가에 잡혀 맘대로 할 수 없다면 ‘결박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결박된 것을 불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박된 것을 불행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2년 이상을 재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결박되었지만 사실 이렇게 결박된 것이 오히려 바울을 안전하게 더 유익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결박되지 않고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다면 유대인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바울을 죽이기로 동맹한 사십명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까지 한 악당들이 있었습니다(23:12,13).
바울이 결박되었기 때문에 총독 관저에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지낼 수 있었고 또 친구들이 찾아와서 만날 수 있었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언가에 매여 마음대로 할 수 없을지라도 불행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더 유익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가난하지 않고 몸이 건강하여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다면 더 불행하게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병들어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더 유익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결박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가 가난한 것처럼 너도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노라’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몸이 불편한 것처럼 너도 나와 같이 몸이 불편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새로 부임했을 때 아그립바 왕이 인사차 가이사랴에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이 한 자리에 앉아 담화를 하다가 베스도가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바울이 ‘자기들의 종교와 예수라 하는 이가 죽었다가 살았다고 주장하는 그 일로’ 고발한 것이라(25:19)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황제께 보내기 위해서는 분명한 죄명이 있어야 하는 데 올릴 명분이 없다고 하면서 혹 아그립바 왕 앞에 바울을 세우면 죄목도 밝힐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바울을 불러내 세웠습니다(15:26). 그래서 바울은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 변명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의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26:2)라고 말하고 자신이 고발당한 것을 변명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이나 그 외 둘러앉은 고관들이 바울의 이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긴 변명을 듣던 베스도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4)고 크게 소리를 쳤습니다. 베스도는 유대인의 종교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말에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향하여 ‘네가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은 ‘정신 나간 사람’,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미쳤다고 하는 베스도에게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25)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한 것이 지극히 참되고 이성적인 것이라는 것을 다시 말해 주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해 말합니다. 왕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의 죽음과 살아나심을 듣고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27)라고 말했습니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일찍 율법을 배웠기에 선지자의 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그립바 왕이 깜짝 놀라면서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28). 아그립바 왕은 바울이 하는 말을 이해를 했지만 그러나 그리스인이 되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29). ‘말이 적으나’란 적은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아그립바 왕이나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말이며, ‘말이 많으나’란 유대 종교를 알지 못하는 베스도 총독과 로마 사람과 이방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울은 원한 것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다 나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바울의 최고의 행복을 의미합니다.
중세 시대 그리스의 디오게네스는 세계적으로 존경 받는 유명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특별했습니다. 나무통 속에서 먹고 자고 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철학을 배우고자 찾아왔습니다. 소문을 듣고 알렉산드 대왕이 한 번 만나보고자 찾아왔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역시 통나무 속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햇볕을 쬐고 앉아 있는 것을 알렉산드 대왕이 보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 유명한 철학자 대오게네스가 알려진 이름과 달리 너무 불쌍하게 보여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디오게네스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뇨? 뭐든지 말하면 내가 들어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디오게네스는 ‘왕이시여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 뭐냐?’, ‘왕이시여 조금 비껴 서 주십시오. 햇볕을 가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 대왕은 너무 감동되어 일어나 하는 말이 ‘내가 알렉산드 대왕이 아니였다면 저 디오게네스와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 대왕은 욕심없는 디오게네스에게 크게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얼마전에 KTV에서 매를 잡아 훈련을 시켜 꿩을 잡는 기능공이 우리나라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기능 보유자로 맹목을 지켜 오는데 대학생인 아들에게 ‘매 사냥꾼’으로 대를 이어 가기를 바라고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선호하지 않지만 자신은 매를 훈련 시켜 꿩을 잡는 기능공 소유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에게 가르쳐 주어 대를 이어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하는 일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 흙을 이겨 물래를 돌리며 도자기를 만들어 가마에 굽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만든 도자기가 명품이 되고 그 기능을 인증 받을 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에게 대를 이어 도공이 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기에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 일을 이어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들에게 ‘내가 하는 일을 너는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 부모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만족이 없고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실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처럼 자녀들에게도 실패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부모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자녀들에게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자녀들에게 ‘저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라고 한다면 부모의 신앙생활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분명히 알고 확신한다면 자신이 먼저 행복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처럼 되기를 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누리는 복을 다른 사람도 받기를 원할 만큼의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 하므로 해서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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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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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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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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