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지가 26년이 되었네요. 자영업자 붕괴, 늘어나는 상가 건물 임대 광고와 공장들의 해외 이전을 눈으로 보면서 공짜 좋아하는 심리가 만연된 국민정신의 타락을 한탄 합니다. 전 국민 25만원 씩 공짜로 지급하면 통화량이 늘어나서 화폐 가치만 떨어지고 물가만 올라가는 것인데 공짜 좋아하는 국민들이 그걸 알리가 없으니
====================
박노해 시인 귀하
노해 형!
지난 한 시대를 형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위해 노해(勞解)라는 이름으로 참 부지런히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양심수 대사면 때 석방되어 조선일보와의 회견에서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하루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가족들과 오순도순 평온한 저녁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의 그림에는 밀레가 그린 만종에서 보이는 소박하면서도 성스럽고 평화로우면서도 거룩한 노동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최소한의 평안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하는 속박된 노동의 모습과 그 작은 안식마저 외부의 침탈로부터 잃어버리지는 않을까하는 가슴 졸인 평안만이 느껴짐은 무슨 까닭일까요?
노해 형!
형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는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인데 노동자가 주인이 되면 그때부터 그는 주인이기에 새로운 타도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삶의 진정한 주체자로서 모든 경제적 의사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주인, 노동자의 참된 해방은 그가 주인으로 완전히 거듭나는 길 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고용을 창출하여 실업을 극복하고 평생고용이 아닌 평생노동을 보장하는 길은 노동자 천국을 꿈꾸어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며, 사장천국을 만들어야 가능합니다.
한시적으로 사장 수업을 받고자 하는 청년들 외에는 누구나 사장이 되고자 하는 세상, 노동자의 삶은 필경 망할 수밖에 없으며 사용자의 삶은 너무나 황홀하여 모든 노동자가 사장이 되기를 갈망하는 세상, 그리고 그 꿈은 특출한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환상이 아니라 정상적인 노력을 통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이상이 되도록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때 노동은 참된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사장을 하지 않으려는데 노동인들 어디서 하겠습니까? (영남일보 문화산책 1998년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