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 가운데, 고난과 시련과 환난과 역경을 극복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성도라고 해서, 항시 즐겁고 기쁜 삶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찬 300장의 가사를 보면, “내 맘이 낙심되며 근심에 눌릴 때/ 가는 길 캄캄하고 괴로움 많으나 희망이 사라지고 친구 날 버릴 때/ 싸움이 맹렬하여 두려워 떨 때에 번민이 가득하고 눈물이 흐를 때/ 환난이 닥쳐와서 어려움 당할 때”라며, 우리의 삶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삶의 전부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의지하기에, 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소망을 품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찬 300장의 작시자인 “부르스 에반스”는, “주께서 내게 오사 위로해 주시네/ 주께서 함께하며 내 짐을 지시네 주 내게 속삭이며 새 희망 주시네/ 승리의 왕이 되신 주 음성 들리네 주 나의 곁에 오사 위로해 주시네/ 주님의 능력입어 원수를 이기네 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로운 세상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의 도움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베토벤”이 32살 되던 때, 청각장애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 불행한 삶을 마치기 전에, 제게 기쁜 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단 하루만이라도 기쁨을 만끽하게 하여 주옵소서. 제 힘을 다해 작곡한 음악들을 단 하루만이라도 귀로 들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며,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후, 베토벤은 24년을 청각장애자로 살며, 작곡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교향곡 9번은, “기쁨의 송시”입니다. 이 곡이 처음 연주되었을 때, 청중들이 모두 일어나 환호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정작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악보를 넘기며,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열렬한 환호성도 그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귀는 남이 들을 수 없는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품었던 소망이 그를 승리하게 하였던 겁니다. 본문 2절에서 시인은,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라며, 인간적으로 원망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본문 5절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며, 기쁨의 환희를 찬양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께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욥과 같이 처참한 고난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또, 요나와 같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갑갑한 상황에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그 곳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그 분의 독생자이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주신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최고로 사랑하는 최고의 존재임을 기억하셔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 - 2절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힘이십니다.
본문 1절에서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는, “나의 무죄를 선언하시고 나를 변호하시며 악하고 거짓된 자에게서 나를 구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는, “내 고소를 듣고 판결해 달라”는 겁니다. 시인은 이렇게, 법정용어를 사용하여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시며, 성도의 간구를 간과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또,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 곧, “거짓되고 악한 사람들”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의 한을 모두 내어놓았고, 자신의 모든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본문 2절입니다. 여기를 보시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라며 탄식합니다. 여러분, 삶이 정작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탄식을 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 대해 원망이나 불평이 아니라, 본문의 시인처럼, 하나님께 탄식을 해 보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탄식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성도의 힘이며, 성도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의 앞부분을 보시면,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이라고 합니다. 시인이 본문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탄원하는 결코, 절망 속의 탄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 되신다는 것을 이미 고백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신이 처한 절망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갖고, 영원한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의지하는, 철저한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시 18: 1을 보시면,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또, 시 147: 10 - 11을 보시면,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본문의 시인처럼 또, 다윗처럼, 십자가 앞으로 나가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소망과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나와 똑같은 고통을 받으시고, 나보다 더한 조롱과 멸시를 겪으셨던 예수님을 여전히 나의 소망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을 요청할 때, 우리를 넉넉히 도울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우리의 삶 속에서, 힘의 근원으로 삼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 - 4절을 보시면,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쁨이십니다.
본문은 환난을 당해 고통을 하소연하며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하는 전형적인 탄식시로,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탄식과 간구, 구원의 요청, 구원의 확신, 찬양과 소망”입니다. 주의 빛으로 인도하시고 주의 진리로 나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주의 성산인 시온산에 이르고, 그 곳에 있는 성소인 주의 장막에 이루게 하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과 진리로 시온으로 인도하실 때, 시인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이르겠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은, “내가 기뻐하는 하나님”이란 의미로, 시인의 신앙고백입니다. 또, “하나님이여”라는 존칭이 중복되는 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다는 겁니다. 시인은 이토록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았고 또, 하나님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조변석개 식의 감사와 찬양이 아닙니다. 성도들 가운데,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자신이 만족할 때는 “할렐루야, 아멘”하다가 조금이라도 불만족할 때는,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리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그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는 작시작인 밀러 여사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리에게 귀한 것이 없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리에게 더 한 기쁨은 없습니다. 성경 주석가인 메튜 헨리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최고의 기쁨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고해와 같은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의 기쁨의 대상이 되실 때,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고 입에서는 불평이 튀어나오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지언정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낙망하거나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의 빛과 진리로 인도하실 줄로 믿고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을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우리를 속히 회복하시고 당신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피부로 느끼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최고의 축복이 됩니다. 본문의 시인처럼, 성도된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큰 기쁨으로 삼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소망이십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면서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소망으로 삼는 시인의 철저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 다면, 그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겁니다. 과연, 우리도 이 시인과 같습니까? 시인은, 본문 앞의 2절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라며 자신이 겪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본문 5절에서 자신의 영혼을 향해 “어찌하여”라며, “낙심하며 불안해 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것을 시인의 변덕이라고 하겠습니까? 조변석개하는 시인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까? 시인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넋두리를 하고, 탄식을 했지만,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중심에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앙의 중심이 있었던 겁니다. 곧, 자신의 마음을 지켰던 겁니다. 우리도 이 시인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어제 버스타고 가는 중에 라디오 방송에서, “아무리 먹어도 살찌지 않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마음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본문을 기록한 시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잠 4: 23을 보시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없으면 낙심과 불안이지만,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있으면 변함없이 찬송하게 됩니다. 찬송은 성도의 소망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슬픔이 찾아올 때마다, 의심이 찾아올 때마다 소망이신 하나님만 붙들고 하나님이 주신 소망으로 우리의 삶을 살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인처럼,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께 소망을 둔 성도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