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저주 제거 / 박길현 목사
지난 주에 헤렘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저주에서 라합과 그 집안이 구원되는 것을 생각하면서 헤렘법에 대하여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헤렘이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 되어 멸망을 위하여 바쳐진 것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7장도 헤렘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에 '바친 물건'이란 말이 바로 히브리어로 헤렘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람 중에 아간이라는 사람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이러한 기사를 읽을 때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해 왔던 우리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하, 아간이라는 사람이 불태워 바치라고 한 여리고 성의 물건을 훔쳤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조그만 아이성을 못 당하고 패하였고 마침내는 아간 자기도 온 가족과 함께 죽음을 당했던 이야기로구나'라고 생각하기를 잘 합니다. 우리 자신은 아간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생각하면서 '나는 아간과 같이 망할 사람은 아니지'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도 아간과 같은 죄지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 사람에게 이 말씀이 해당되겠지만 우리 자신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본문을 대할 때 우리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듯이 지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우리들의 안일한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들의 이기적인 생각에서 오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오늘 성경은 아간 한 사람이 범죄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간 한 사람의 죄를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취급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아간의 범죄가 자기와는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형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간 한 사람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에게 진노하셨다는 것을 아이성의 패배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에서 서쪽으로 좀 더 가면 있는 조그만 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정찰대를 보내어 정찰을 하게 했습니다. 정찰을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 중에서 삼천 명쯤이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에게서 패하여 도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36명쯤이 죽고 모두가 쫓겨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이 진노하신 증거였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이러한 진노에 직면하자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었었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고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중요한 질문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대적 앞에서 쫓겨 옴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싸울 것이다'입니다. 이스라엘이 싸우는 것은 인간 이스라엘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이름을 이스라엘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친히 이스라엘 속에 임재해 계시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을 하시며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몸으로 삼으셨습니다. 자기는 보이지 않지만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시니 이스라엘은 자기를 보여주는 몸과 같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몸으로 나타내듯이 하나님의 뜻도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임재해 계시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복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축복해 달라고 할 때에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속에 계시면서 이스라엘을 몸으로 사용해서 자기를 나타내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이 없어지면 하나님도 없어집니다. 8절에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라는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한 이름입니다. 이것은 이름만이 하나라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몸이 하나인 것과 같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자기를 성육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약의 성육신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만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후의 기록들에서는 한 몸, 부부, 가정의 부모와 자녀, 나라의 왕과 백성, 나무의 뿌리와 열매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쫓겨오고 또 망하게 됨으로써 이스라엘과 하나된 하나님의 이름이 없어지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아간이 헤렘 즉 바쳐진 물건을 취하여 숨김으로써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범죄를 하나님은 11절에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에 비추어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한 몸 됨을 깨뜨렸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간이 바쳐진 물건을 취하여 숨김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한 몸 된 것에서 떨어져서 이제는 바쳐진 것이 되었습니다. 12절에는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가 되었다가 우상에게 속하여 진멸의 대상이 된 가나안의 물건 같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 장본인을 멸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다시는 이스라엘과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아간은 하나님과 한 몸 된 언약을 깨뜨리고 우상의 것을 탐내어 취하였던 것입니다. 이 죄성을 11절은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도적하고 사기했다는 말이 아간이 취한 행위의 죄성을 좀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탐이 나고 자기의 것으로 가지고 싶으니 도적질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하여 속이고 숨겼으니 사기가 되는 것입니다. 원수의 것 곧 우상의 것을 좋아하게 되니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우상과 연합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을 우상에게 속하게 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아간이 탐내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21절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였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이 때문에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은 아간을 잡고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자녀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하고 돌로서 쳐죽이고 불살랐으며 그런 후에는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가졌던 분노를 그쳤던 것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기에 그 원수를 갚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을 아골 즉 괴로움의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봅시다. 아간의 이런 죄성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세상에서 중요시하는 금은과 재물에 대한 욕심이 우리에게 없습니까? 이런 것에 대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없습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아간에게 돌질을 했던 이스라엘의 다른 사람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간은 이런 사람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심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간 한 사람의 죄를 온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취급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간 한 사람을 심판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에게 그들의 죄성을 경계하시며 또 하나님과 한 몸 된 것이 얼마나 우상 및 그것에 속한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인가를 인식시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 한 사람이 범죄하면 전체가 죄인 되듯이 이스라엘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의인되면 이스라엘 전체가 의인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의인으로 만든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를 기다렸던 온 이스라엘이 의로워졌습니다. 그리고 새로이 이스라엘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우리도 역시 의로워졌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기 때문에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된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즐거워하십시오. 주님 안에 살고 있음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자기는 아간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사람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에도 역시 그러했지만 지금도 역시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는 기적 중에 살고 있는 셈이지요.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우리의 죄 가운데서도 이러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나 이 죄성을 어물쩡 넘어가지는 마십시오. '만세 해방되었네'라고 좋아하는 어린 아이들처럼 하지 마십시오. 자기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죄성을 주의해서 보고 그것과 대치해서 서십시오. 결코 타협적으로 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주님을 괴롭혔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 지신 주님께 감사와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다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 죄를 지심에 대하여 감사와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성을 극복하면서 살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