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계역
집으로 가는 길, 6호선을 타고와 나는 석계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탄다. 석계역은 대학 다닐 때 다녔던 야학이 있던 곳이라 나름 정든 곳이다. 이곳에서 막차를 놓치고 집까지 새벽길을 두세 시간 걸어가던 기억이 난다. 학생이나 동료 교사들과 튀김집에서 저녁 대신 순대나 튀김, 떡볶기를 먹었던 노부부의 포장마차는 사라졌다. ‘마루타’를 봤던 3류 동시상영극장이었던 석계극장도 사라졌다. 계란 노른자에 얹힌 쌍화차를 처음 먹어봤던 곳도 석계역이고, 팥빙수를 처음 먹어본 곳도 석계역이다.
노천에 드러난 석계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다보면 언제나 겨울바람과 우이천에서 풍겨오는 생활하수 냄새를 맡아야 한다. 우이동에서 번동을 지나며 복개천을 지나온 우이천은 여기에서 몸을 드러내고 중랑천과 만난다. 내처 중랑천을 건너가면 태릉이다.
전철을 처음 탄 것은 중학교를 마치고 혜화동에 있는 동성고를 다니면서였다. 출퇴근 시간은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가 되었으므로 나의 등교시간은 한 시간 빨랐다. 사람들과 부딪히는 게 싫었다. 그래 출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타고 내리고, 내리면서는 좀 빠른 속도로 걷는 게 습관이었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긴 편이라 보폭이 보통 보다 컸다.
오늘도 전철을 갈아타려 그렇게 걸었다. 다소 활량한 지하모퉁이를 돌며 생각했다. 나는 모퉁이를 돌고 있지만 구불구불 많은 길을 돌아왔지만, 사실 집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직행하고 있다고. 심리적이고 추상적인 시간과 공간은 언제나 직선이다. 하루의 의식을 지배하는 시간과 공간 방식 대부분이 그렇다.
별다른 목적 없이 어영부영 기웃기웃 느긋느긋 걷는 산책이 부럽게 느껴졌다. 그림이라면 우리의 내면은 서양의 유화일 것이다. 여백의 자연스러움을 거닐 수 있었던 동양화는 아닐 것이다.
아침 출근시간엔 뛰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걸음 속도도 빠른 편이지만 나는 뛰지는 않는다. 내가 지금 자판을 두드리면 이 신호를 가진 전자는 회로를 빠르게 돌아 모니터에 나타난다. 회로. 그렇다. 회로를 도는 전자처럼 걷고 산다. 회로적 삶은 즐겁지 않다. 하지만?
지하철에는 흡사 백만 장의 페이지를 가진 책처럼 많은 다른 사람들이 앉아 서 있다. 궁금하다, 하지만 호기심을 누르고 내 페이지를 넘긴다. 무관하지만 서로 연관된 어떤 안도가 있는 듯. 다르지만 같다. 대중의 안도감이 이 공기엔 있다. 편안한 고독? 물론 진실은 아니다. 진실이라기에 도시는 너무 많은 것을 걸치고 있다. 그래도? 그런대로 존재감을 확인시켜주듯 물질과 유행의 흐름이 명확하다. 정교한 회로처럼 아름답기까지 하다.
석계역에서는 성북까지만 가는 열차가 있어, 한번쯤 거른 뒤 의정부나 소요산행 열차를 탄다. 내 집은 도봉산 자락이 흘러내린 방학동에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