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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장미
사랑과 욕망을 품은 아름다움
424호에 장미 스무 송이를 보내면서 계산서 뒤에 "에밀리, 사랑해"라고 써줘. 영화 <카사블랑카에서의 하롯밤>에서 그루초 막스의 대사
교회에 와서도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성경을 펼쳐 가장 아름답고 관능적으로 쓰인 "나는 샤론의 꽃, 골짜기의 백합..."을 읽어보자. 아가라고도 부르는 솔로몬의 시들은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쯤에 쓰였다. 그 시에서는 장미에 빗대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후 3,000여 년에 걸쳐 시인과 연인은 장미에 빗대 사랑과 욕망을 표현해왔다. 틀림없이 솔로몬 이전에도 수천 년 동안 그리해왔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진화론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기능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존재할까? 동물의 왕국에서는 구애할 때 보통 선물을 한다. 거미는 먹을거리를 거미줄로 포장해 선물하고, 펭귄은 조약돌을 선물하고, 개구리매는 날아가면서 음식을 선물로 던져준다. 우리의 여성 조상들은 장미로 자신을 꾸몄을까? 우리의 남성 조상들은 상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여성에게 꽃을 바쳤을까?
내 사랑은 붉은, 붉은 장미 같다
6월마다 새로 피는 꽃이지
로버트 번스의 시로, 사랑을 노래한 가장 위대한 시 가운데 하나다. 그에게 사랑이란 무슨 의미일까?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장미와 비교한 걸까, 혹은 이제 활짝 꽃핀 그의 열정을 장미로 이야기한 걸까? 좋은 시라면 늘 그렇듯, 이 단순한 구절에 십여 가지 이상의 의미가 담겼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꺾어도 장미와 사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은 분명하다.
들장미는 유럽과 아시아, 북아메리카, 북부•서부 아프리카에서 자란다. 나는 아르메니아의 한 골짜기 아래에서 우연히 야생 장미 정원을 발견했다. 개울이 정원을 가로질러 흐르는데도 둑은 쾌적하고 깔끔했다.샴페인 한 병과 아름다운 소녀가 있다면 그곳은 천국이 될 게 분명했다.
개울가에 장미가 흩날릴 때,
늙은 하이얌이 고급 적포도주를 마시네
빅토리아시대에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번역해서 많은 사랑을 받은 오마르 하이암의 시집 [루바이야트]에 나오는 구절이다. 장미는 300종 정도가 있지만, 재배 품종은 수없이 많다. 3만 가지라고도 한다. 끊임없이 더 완벽한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정원사들은 장미속(Rosa)의 서로 다른 종끼리 교배시키며 엄청나게 많은 품종을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야생종 장미는 흰색이나 분홍색이지만, 노란색이나 빨간색도 있다. 꽃잎은 대부분 다섯 장인데, 재배를 통해 아주 많이 변화했다. 요크셔테리어가 늑대와 다르듯이, 재배한 줄리엣 장미는 관목인 개장미(Rosa Canina)와 전혀 다르다.
장미 나무는 잎이 무성한 나무다. 보통 로즈 힙(rose hip)이라고 부르는 열매를 맺고, 열매 안에는 씨들이 들어 있다(열매라고 모두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열매는 꽃이 피는 식물의 씨가 들어 있는 씨방이 무르익은 것이다). 곤충들이 들장미의 꽃가루받이를 해준다. 또 새들이 열매를 먹고, 씨앗과 함께 배 설물을 배출하면서 씨앗을 퍼뜨린다. 반면 많은 재배 품종이 열매를 맺지 않는다. 꽃잎 사이가 너무 촘촘해서 꽃가루받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재배 식물이 그러하듯이, 재배 품종 장미도 대부분 인간의 도움 없이는 번식하지 못한다. 꺾꽂이로 번식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전문 용어로는 영양번식(무성생식)이라고 한다. 정원사라면 잘 아는 방법이다. 다 자란 식물 일부를 잘라낸 뒤 좋은 환경에서 뿌리내려 새로운 식물로 자라게 하는 방법으로, 새 식물은 부모 식물과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사실상 복제인 셈이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장미를 재배하기 시작했을까? 2,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영양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위해서 장미를 가꾼다는 생각은 휠씬 더 예전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류층 사람들이 부와 여가 그리고 하인을 가지게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인간은 아마도 밀을 재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식물을 길렀을 수도 있다. 밀을 더 크고 잘 자라게 하기 위해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면서 재배했던 방식은 아름다움을 즐기려고 기르는 식물에도 확실히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장미는 향기가 좋아서 기르기도 했다. 으깬 꽃잎을 수증기로 증류해서 얻는 장미유나 꽃잎을 물에 끓여서 만드는 장미수로 향수를 만들 수 있다. 몸을 자주 씻지 못했던 시대에는 이런 향수로 몸 냄새를 가렸다. 장미수는 오늘날 화장품과 약으로 사용된다. 바클라바와 할바, 굴라브 자문, 터키시 딜라이트 등의 디저트도 장미수를 넣어 만든다.
장미는 무척 잘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랑을 받은 꽃이기에 그 상징적인 의미 또한 풍부해졌다. 장미는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꽃이다. 가시에 찔린 아프로디테의 피로 흰 장미가 붉게 물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프로디테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의 시신에 장미유를 발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영국 화가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가 그린 <베누스 베르티코르디아>에서는 아프로디테가 장미에 둘러싸여 있다.
장미는 로마제국의 방탕과도 관련이 있다. 황제들은 장미수로 목욕하고, 연회장을 장미 꽃잎으로 뒤덮었다. 농부들은 그들이 먹을 작물 대신 황실이 즐길 장미를 길러야만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장미 꽃잎으로 뒤덮은 침실로 안토니우스를 유혹했다고 한다.
이런 음탕한 역사에도 불구하고(어쩌면 그런 역사 때문에라도) 장미는 동정녀 마리아와 관련된 순수함의 상징이 되었다. 가톨릭에서 기도할 때, 특히 동정녀 마리아에게 기도할 때 사용하는 묵주는 이런 순수함을 기념한다. 구슬이 열 개씩 다섯 묶음으로 연결된 묵주는 장미 꽃잎의 수를 나타낸다. 묵주는 마리아의 성스러운 신비를 곰곰 생각하는 데 활용된다. 수태고지, 예수의 탄생, 부활, 예수승천, 성모승천이 성모 마리아의 다섯 가지 기쁨이다. 독일 화가 뒤러의 1506년 작품 <로사리오 축일>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둘러싸고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장미를 나눠주고 있다. 성모 마리아와 장미의 이 런 관련성은 장미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는 성당 건물에서도 나타난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장미 창문이 가장 크고 유명하다. 이런 연관성이 드러나는 성가도 있다. 1420년에 만들어진 그 성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를 잉태한 장미처럼
이런 미덕을 지닌 장미는 없네.
이슬람 전통의 기하학적인 정원에서도 장미가 중심이 된다. 사디의 시집 [장미 정원]과 마무드 샤비스타리의 시집 [성스러운 장미 정원]은 이슬람교 신비주의 종파인 수피파에서 가장 중요한 두 작품이다. 장미는 우리의 가장 고상한 생각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생각 모두에서 찾을 수 있다.
인류는 자연스럽게 휘장이나 상징적인 무늬로 장미 문양을 즐겨 사용했다. 장미는 영국의 수호성인 성 조지를 상징하는 꽃이고, 미국에서 다섯 개 주를 상징하는 꽃이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6년에 장미를 미국을 상징하는 꽃으로 지정했다. 영국에서는 15세기에 장미전쟁이라고 불리는 내전이 벌어져 30년 동안 싸웠다. 붉은 장미 문장을 사용하는 랭커스터 가문과 흰 장미 문장을 사용하는 요크 가문의 싸움이었다. 1485년 보스워스 전투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는 영국의 왕 헨리 7세가 되었고,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 혼하면서 두 가문을 통합했다. 그리고 튜더 장미 문장으로 이 통합을 기념했다. 붉은색과 흰색이 섞인 장미로, 물론 꽃잎은 다섯 장이다.
1848년 프랑스혁명 이후 붉은 장미는 사회주의와도 관련되었다. 장미에는 무엇이든 고르는 대로 의미를 붙일 수 있지만, 언제나 아름다움이나 도덕적 미덕과 연관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상징처럼 장미의 상징도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시집 [경험의 노래]에서 해로운 힘에 피해를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미를 묘사했다.
오 장미여, 너는 병들었구나.
어두운 밤에 날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벌레가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진홍빛 환희를 안기는
너의 침대를 찾아냈구나.
그리고 그의 어둡고 비밀스러운 사랑이
너의 삶을 파괴하는구나.
나폴레옹의 아내인 프랑스의 조제핀 황후는 재배한 장미를 극찬했다. 그녀는 말메종성에 있는 그녀의 정원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정원'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가 꿈꾸는 정원에서는 장미가 가장 중요했다.
장미는 깊은 차원에서 인간을 기쁘게 하는 꽃일 뿐 아니라, 놀랍도록 무엇이든 잘 받아들이는 꽃이다. 일종의 독창적이고 교묘한 조작이다. 요즘 장미의 크기와 모양은 어지러울 정도로 가지각색이고, 아름다움의 개념도 이상야릇할 때가 많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정원에는 구역질 나는 연보라색의 블루문이라는 품종의 장미가 있었다. 가족 모두가 싫어했지만, 그 장미는 해마다 도도하게 꽃을 피웠다. 25년 뒤에 부모님이 이사하셨을 때도 열심히 꽃을 피웠다.
장미는 여전히 전 세계 사람들이 꽃다발이나 꽃꽂이용으로 가장 좋아하는 꽃이다. 꽃봉오리를 꺾은 다음 냉장 보관해 비행기에 실어 세계 곳곳으로 운반한다. 사람들은 비행기 운송이 탄소 배출을 늘린다고 걱정하지만, 보통은 장미를 포기하지 못한다.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또 애정을 담은 선물을 건네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제핀 황후의 의뢰를 받아 그리기도 한)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와 앙리 판탱라투르는 장미를 세심하고 정확하게 그렸고, 모네와 세잔,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적으로 장미를 표현했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여기저기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장미를 선물한다.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언제나 장미가 필요하다.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는 의미가 너무 많아서 이제 의미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징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장미는 아마도 아름다움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존재다. 사람들은 흔히 일과 가정의 걱정거리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 장미 향기를 맡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한다.
100가지 식물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사이먼 반즈 지음
이선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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