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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권세 바르게 활용하기
마가복음 11:27~33
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어느 날 12톤 덤프트럭이 굉음을 내며 거리를 질주하다 적색 신호등에서 멈추지 못하고 건널목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호리호리하게 생긴 경찰관이 호각을 불며 나타나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빨강 신호등을 무시하였던 덤프트럭이 급제동하면서 멈추었습니다.
여기서 권위(authority)와 능력(power)이 다름을 분명하게 보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권위는 능력보다 월등하게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능력으로 보면 덤프트럭이 훨씬 높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 능력보다 상위에 있으므로 경찰의 명령에 따라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이면 하나님은 나에게 성령으로 인(印)치시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용한 ‘권세’는 영어로 ‘the right’라고 하였습니다. 즉, 권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헬라어 원어에서는 ‘엑수시안 ἐξουσίαν’ ‘authority’ 권위라고 하였습니다. 이 ‘권위’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 막 11: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라고 할 때 ‘권위’와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권위의 출처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말씀과 이적은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킬 만하였습니다. 당신의 종교 지도자들은 죄를 용서하시는 선언과 구원의 선포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거나, 병자를 치유하는 것은 반드시 유대교의 산헤드린 공회에서 허락해야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격을 갖추지 않고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비난과 힐책이 담긴 두 가지의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이고, 두 번째는 ‘누가 이런 권위를 네게 주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막 11: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라는 질문은 지난 시간 14절에서 18절에서 다뤘던 성전 정화 사건을 놓고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런 일’이라 함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있는 매매하는 자들을 몰아내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은 일을 가지고 어떤 자격으로 이런 일을 했는지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라는 도발적인 질문에 즉답하기보다는 먼저 세례 요한은 무슨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역으로 물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지도층들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실은 대답하기가 곤혹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즉 하나님의 권위와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말하게 되면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요한의 세례가 하늘이 아니라 인간적인 뜻과 의지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다면 백성들의 반감을 살 것을 우려했습니다. 많은 백성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며 요한의 외침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밝혔지 진리에 관하여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세례 요한의 권위에 대하여 언급하신 이유는 요한의 삶에서 그리고 그의 사역에서 가릴 것이 없는 하나님의 권위가 담긴 것이 아니냐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에 대한 수식어는 ‘광야의 외치는 자’입니다.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알리는 사명을 가지고 회개하여 메시아를 모셔들일 것을 가르치는 사역자였습니다. 마 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나 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존경과 더불어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뿌리치고 광야에서 극빈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선지자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취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이 그에게 주어진 권위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에 수많은 사람이 요한이 베푸는 세례에 동참하여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보이신 삶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분이심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환한 빛으로 세상에 오셨기에 감출 것이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전혀 불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함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가 담겨 있습니다. 막 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권위는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기에 앞서 이미 드러났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위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권위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에게 주어진 권위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주신 권위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 자녀의 권세는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기 위함에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빛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을 향하여 우리 사명은 바르게 권세를 활용하므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를 잘 활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우리에게도 큰 유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권세이며 영원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이 권위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태도일 것입니다.
첫째는 택하신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
택하신 족속이란 철저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명하여’라는 말씀은 ‘by name’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내 이름을 콕 찍어서 불렀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와 개인적인 관계를 부르셨고 주님의 것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특별한 권위를 줬습니다. 두려워하는 요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를 위하여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 사함을 받게 하셨고 크신 사랑으로 덮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두려움의 환경이 주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 두려움을 꾸짖으십시오! 풍랑이는 바다에서 예수님은 몰려오는 파도를 향하여 잠잠하여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막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대적자 마귀는 수시로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환경을 피하지 마십시오. 능히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앞으로 나가십시오. 내 마음에 두려움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내게 있음을 믿고 고백하며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마귀를 향하여 꾸짖어 물리쳐 보십시오! 권세를 사용할 때 능력이 나옵니다. 이기는 힘을 줍니다.
다니엘이 사자의 굴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극렬하게 불타오르는 풀무 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로 던져 넣을 때 담대하게 나갔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두려움의 환경에서도 담대하게 견디고 이기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고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씀은 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돌아보면 우리는 사실 왕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는 씻어졌고 그 피의 공로가 우리 안에 성령으로 흘러들어와 우리로 참 예배자가 되는 자격을 부여하셨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왕권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배는 겸손한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나가는 자리입니다. 오직 나의 힘으로 되지 않는 거룩함을 이루는 통로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성령으로 하나님께 나를 낮춰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배의 한문의 뜻은 ‘예를 갖추어 절한다’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라고 하는데 이것은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당시의 종들은 노예를 말합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어 땅에 엎드려 주인의 발에 입맞춤으로 경배합니다. 그들이 주인에게 경배를 드리는 순간 그들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몸도 인격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에서건 주인만 드러내고, 무엇을 하든 주인의 인격으로 생각하고 주인의 인격으로 행동하겠다는 마음의 표시가 주인을 향해 무릎을 꿇어 그 발에 입 맞추는 경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배란 이처럼 경배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하나님만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행위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을 높이기 위하여 당연히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배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 필요합니다. 눅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였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조만간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한 왕 노릇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의 택하신 백성을 거룩한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온통 사탄의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 마지막 심판하시기까지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사탄의 세력은 더욱더 극심하게 득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타락된 모습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마귀에 의하여 짓밟히고 험한 죄악이 물결치더라도 하나님은 내적으로는 성령으로 지키시고 외적으로는 천군 천사를 통하여 우리를 온전하게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신 7:6에도 보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를 헛되이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택하신 그 자녀들을 온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독생자 예수님을 그 어는 것 보다 사랑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생명이 믿음의 성도에게 임하여 있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어쩔 줄 몰라 사랑을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피를 치르면서까지 우리에게 수많은 권세를 베풀어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권위를 지니시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을 저주하신 것도 성전을 더럽히는 무리를 내쫓으시는 행위에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내 뜻대로 이 권세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내가 비록 나타나지 않더라도 나를 행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르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난 겪을 때 사람들은 절망하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는 권세를 지니고 담대하게 그것을 이기고 기뻐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많은 고통을 겪을 때 사람들은 입을 벌려 원망하고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지닌 사람들은 잠잠히 참아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힘을 의지하여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찬송하고 인내합니다. 그런 모습에서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