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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장 죽은 者는 말이 없다
"빌어먹을… 손이 엉망이군!"
형운비는 피곤한 눈빛으로 살이 터져 피가 새어나오는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어디 손 뿐이랴. 그의 전신은 창궁무벌의 살수들이 흘린 피로 온통 젖어 있었다.
두두두두…
마차는 울창한 숲을 빠져나와 확 트인 평원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평원(平原).
광활한 평원을 바라보던 형운비는 문득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이곳으로 오려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창궁무벌의
살수들에게 쫓겨 피하다 보니 이곳으로 들어서게 된 때문이었다.
"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의사가 아닌 타인(他人)에 의해 들어서게 된 길은
언제나 무서운 함정으로 변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형운비는 잘 알고 있었다.
"길을 찾아야 해… 길을…"
형운비가 망연한 눈빛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마차 안에서는 설화린이 염백후와 단월빙을 담담한 눈길로 굽어보고 있었다.
"모두 몇 명이었소?"
염백후는 잿빛 눈을 굴리며 억양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제가 집계한 바로는… 대략 이백 오십여 명쯤 됩니다."
이백오십(二百五十)!
실로 믿기 어려운 숫자가 아닌가?
단 삼인(三人) 무정삼후에게 당한 창궁무벌의 특위살수들의 머리숫자인 것이다.
"창궁무벌의 기둥이 통째로 흔들리겠군…"
설화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리며 중얼거리자,
단월빙은 자신의 검자루를 쓰다듬으며 예의 냉막한 웃음을 흘려냈다.
"ㅋ… 내일쯤이면 천하가 발칵 뒤집힐 것입니다."
"당연하지. 또한 천하인들은 혈야회(血夜會)에 대해 재평가를 하게 될 것이오."
설화린은 씨익 웃으며 염백후와 단월빙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나직하면서도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직 싸울 힘이 남아있소…?"
이 말의 의미를 깨달은 염백후와 단월빙은 전신을 가늘게 경련했다.
"회주(會主)…"
"그렇다면 또…?"
설화린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무서운 최후의 공격이 닥쳐올 것이오. 놈들은 절대 간단히 물러서지 않아…"
"……!"
"나는 그대들이 오래 살아 주기를 바라오."
단월빙은 주먹을 불끈 쥐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평소에 좀처럼 말이 없던 염백후의 입가에는 씰룩 미소가 떠올랐다.
원래 웃는 데에 익숙치 못한 그의 미소는 극히 어색했다.
허나 그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이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으며,
그 미소 뒤에 흘러나온 다음 말은 그래서 더욱 상대의 가슴에 깊숙이 파고 들었다.
"회주, 속하들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놈들이 살아있는 한 절대로 죽을 수가 없습니다."
"제기랄…! 몸에 피구멍이 생긴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처음에 그는 허리에 묻은 피가 그저 창궁무벌의 살수들에게서 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자신의 옷을 적시고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의 소중한 피였다.
뒤늦게 지혈(止血)은 했으나 이미 많은 피를 흘린 후였다.
형운비는 정신이 몹시 혼미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잠이 쏟아진다.
(졸면… 죽는다. 정신을… 차려야…)
허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형운비는 설화린에게 자신의 몸상태를 알리려 하지 않았다.
주어진 임무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완수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은 자신 스스로가 해결한다.
이것이 그의 신앙(信仰)이었다.
(허기가 지니 잠도 제대로 오지 않는군…)
형운비는 이 광활한 평원을 벗어나자면 적어도 반나절은 더 걸릴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한데 그때였다.
형운비는 문득 왼쪽의 숲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번쩍 눈을 뜨고 상대를 살폈다.
이제 열 두어 살 가량 되었을 소년이었다.
소년은 다 떨어진 누더기에 손에는 약초(藥草)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아…!"
소년은 형운비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재빨리 숲 속으로 도망쳤다.
"……!"
형운비는 눈을 번쩍 빛냈다.
(저 소년이 진정 약초를 캐는 소년이라면 길이 이 근처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그그긍…
형운비는 다시 기운을 냈다.
길 잃은 산중에서 인적(人跡)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그것은 인가(人家)가 그리 멀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형운비는 소년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마차를 몰았다.
과연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의 앞에 하나의 소로(小路)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형운비는 긴장이 일시에 풀리는 것을 느꼈다.
"되었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쉴 수 있게 되었다."
한데, 그뿐이 아니었다.
"아니… 헐헐… 이 냄새는…"
형운비는 주먹만한 코를 벌름거렸다.
"어헐헐… 술!"
그것은 바로 향긋한 술내음이었다.
그리고 술내음에 섞여 풍겨오는 고기타는 냄새…
형운비의 입이 귀 밑까지 쭉 찢어졌다.
"어헐헐… 고기 굽고 술 푸고… 좋지!"
두두두두--
마차는 질풍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광활한 벌판을 벗어나 좁은 협곡에 이르자 하나의 허름한 초막이 나타났다.
오랜 풍상에 시달린 듯 초막은 사방 벽이 모두 헐어 안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허나 초막 안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하하…"
"호호… 아이, 고기가 타요…!"
초막 안에서는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약초를 캐어 연명하는 산인(山人)의 거처인 듯싶었다.
쿠쿠쿠-- 쿵!
마차가 초막 앞에서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그러자 안에서 흘러나오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스윽!
형운비는 마부석에서 내리며 설화린에게 말했다.
"회주, 잠시 기다리시면 요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마차 안에서는 설화린의 전음이 들려왔다.
"철수무정, 너무 허기진 상태에서 음식을 먹으면 위장이 상할수도 있소."
(엉? 그게 무슨 뜻이지?)
형운비는 흠칫했다. 그의 위장은 모래라도 소화해낼 만큼 단단하다.
결코 과식(過食) 따위로 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형운비는 문득 초막 안에 시선을 던졌다.
방금 식사를 하던 중이었던 듯 단촐한 식구들이 두려움어린 시선으로 설화린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늙고 병든 촌로(村老), 그리고 초라한 옷차림이나 다정해 보이는 초로(初老)의 부부(夫婦),
그들의 딸인 듯한 한 소녀(少女)였다.
누가 보아도 약초 나부랑이를 캐어 연명하는 일가족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을 일견한 순간 형운비의 안색은 돌연 딱딱하게 굳어졌다.
(넷… 네 명이다…)
그는 안색을 고치며 그들에게 정중히 예를 취했다.
"놀라신 모양이로군요. 은자를 드릴테니 음식과 술을 파십시오."
담담한 어조였으나 그의 등줄기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정녕 믿을 수가 없군! 이들이 정녕 창궁무벌의 칠좌(七座) 중 사인(四人)이란 말인가?)
그때, 그들 중에 딸인 듯한 소녀가 성큼 나서더니 약간 두려움이 풀린 얼굴로 물었다.
"정말이예요? 당신들은… 도적같은데…?"
형운비는 원래 잘 웃을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이 소녀를 위해 억지로 웃었다.
"우리는 도적이 아니란다."
"그걸 어떻게 믿죠?"
어린 소녀는 티없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햇살에 치아가 눈부시다.
(귀엽군!)
형운비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그를 오히려 두려움 속으로 몰아 넣었다.
(만약 이들이 창궁무벌의 칠좌(七座)가 아니고 죄없는 초민(草民)들이라면…)
형운비는 두 눈을 암울하게 빛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해냈다.
설화린의 예측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때, 설화린은 염백후와 단월빙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호호… 아저씨가 대장인 모양이로군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지?"
"멋있으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멋있는 사람이 대장이라고…"
산중에서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소녀는 더할나위 없이 맑고 친절했다.
설화린은 빙그레 미소했다.
"소녀야, 내 친구들이 술과 고기를 원하는구나. 부모님께 여쭈어 주겠니?"
설화린이 물었다.
소녀는 두 눈에 반짝 이채를 떠올리더니 소리없이 웃었다.
"그건 나에게 말하면 돼. 내가 우리집에서 이거야."
소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설화린은 씽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술 한 통과 고기 다섯 근이면 얼마지?"
"호호… 그렇게 어렵게 계산할 것 없어."
"그럼…?"
"있는 것을 다 내놓으면 돼요."
소녀는 두 눈을 빛내며 깜찍하게 말했다.
설화린은 움찔했다.
"그럼…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다 내놓으란 말이냐?"
"그렇다니까."
"어째서 그런 계산이 나오지?"
"우리집에 있는 술과 고기를 다 털면 한 통과 다섯 근이거든?
우리가 전부를 내놓으니 사는 사람도 전부를 내놓아야 하는거야."
"……!"
정녕 당돌하고 묘한 계산이 아닌가?
설화린은 기가 막혔다.
좀처럼 웃지 않던 회안무정 염백후의 얼굴에도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매우 똑똑하구나."
"흥!"
소녀는 기분이 좋은 표정이었으나 혀를 쏙 내밀었다.
설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몸 속에 있는 은자 전부를 꺼내주지."
스윽…
그는 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녀는 귀엽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호호호… 다 꺼낼지 덜 꺼낼지 내가 어떻게 믿죠?"
"음…?"
"내가 직접 꺼낼거야. 나는 바보가 아니거든…"
소녀는 설화린의 곁으로 다가왔다.
스윽!
그리고는 일점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어 설화린의 옷섶을 풀어 헤쳤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안돼--!"
형운비의 입에서 돌연 다급한 폭갈이 터지고
그의 검이 섬전(閃電)처럼 격발되며 소녀의 목을 찔러갔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연한 상황, 허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형운비의 검은 헛되이 허공만 베었을 뿐
, 소녀는 어느새 유령처럼 장내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실로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신법이었다.
(역시…)
형운비는 두 눈에 무서운 살광을 폭사시켰다.
그는 행여나하여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때, 한 마디 음침한 괴소가 들려왔다.
"ㅋㅋ… 보기보다는 눈치가 빠른 놈들이군!"
이어 가까이에 있던 초로(初老)의 부부가 탁자 위에 있던 고깃덩어리를 홱 내어 던졌다.
휘우우우웅!
형운비의 검이 다시 한차례 작렬했다.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콰쾅!
잘 익은 고깃덩어리가 두쪽이 나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아차--!)
형운비는 흠칫했으나 이미 시커먼 독무(毒霧)는 설화린 일행을 완전히 휘감고 있었다.
독무(毒霧)는 치명적인 독성(毒性)과 함께 시야를 가려 전혀 방어를 못하게 하는 무서운 수단이었다.
"ㅋㅋㅋ… 뒈져라!"
번-- 쩍!
섬광(閃光)!
독무를 가르며 가공무비할 공세가 설화린과 무정삼후를 한꺼번에 덮쳤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기습이었으나 상대는 고금제일의 자객 야접 설화린이었고,
또한 왕년에 천하를 주름잡았던 당대 최고의 고수 무정삼후(無情三侯)였다.
"시건방진 수작…!"
츠츠츠읏!
꾸르르르-- 쿠아앙!
형운비와 단월빙의 대갈과 함께 천붕지괴의 굉음이 일어났다.
그 뒤에 들려온 것은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
"크아아아-- 와악!"
독무 속에서 공격해 왔던 부부가 각각 가슴과 목에 심한 상처를 입은 채 퉁겨 나갔다.
촤악…
그 피보라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염백후의 일검에 사내와 여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
이것은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설화린이 합세한 무정삼후의 반격은 경천동지였다.
이윽고 독무가 모두 걷히자 장내의 상황은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두 개의 주검이 끔찍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하나, 노인과 소녀는 간 곳이 없었다.
설화린은 형운비를 바라보며 두 눈을 빛냈다.
"철수무정, 그대는 오늘 매우 운이 없소. 술은… 먹지 못할 것이오."
"빌어먹을…!"
형운비는 씹어뱉듯 중얼거리더니 돌연 수중의 검을 번쩍 치켜 들었다.
슈욱!
검은 옆의 술통에 검자루만 남긴 채 깊숙이 쑤셔 박혔다.
"……"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재수 없는 놈! 하필이면 술귀신이 될 게 뭐야…"
형운비는 투덜거리며 술통으로 다가가 술통을 기울였다.
주르르르……
시뻘건 혈주(血酒)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술통이 쩌억 갈라지더니 정수리에 검이 박힌 채 죽어가던 인물이 털썩 굴러 떨어졌다.
바로 노인이었다.
"크으으으…"
그의 입에서는 비명과 함께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의 손에는 막 발출하려 했던 듯 열 개의 탈명비수(奪命匕首)가 끼워져 있었다.
죽어가는 노인의 눈빛은 아까의 그것과는 판이했다.
시퍼런 두 개의 마화(魔火)가 이글거리듯, 그의 눈빛은 정녕 소름끼쳤으며 무섭도록 예리했다.
부들부들…
그는 탈명비수를 낀 쌍수를 설화린과 염백후를 향해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허나, 그는 끝내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흘려냈을 뿐 고개를 떨군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설화린은 천천히 의자를 끌어다 탁자 앞에 앉았다.
"철수무정, 닭고기와 술을 가져오시오."
"알겠습니다."
형운비는 공손히 닭고기와 탁자 옆에 있던 술병을 가져다 설화린
(薛華麟) 앞에 올려 놓았다.
설화린은 천천히 한 모금의 술을 목 안으로 넘기며 무정삼후에게 말했다.
"시장할 텐데…"
"배가 부르면 손이 느려집니다."
염백후는 공손히 대답하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형운비에게 보냈다.
(빌어먹을…!)
형운비는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닭다리 하나를 억지로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입에 넣고 씹기도 전에 구역질을 느꼈다.
그는 적어도 식사만은 산뜻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제기랄… 더럽게 맛없군…)
그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신들을 주시하며 우적우적 고기를 삼켰다.
설화린이 씽긋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철수무정, 지붕 위의 소녀에게도 닭다리 하나를 물려 주도록 하시오."
"음…?"
형운비가 흠칫하며 본능적으로 검을 뽑은 순간
이미 천정에서는 가공할 검강(劍 )이 설화린을 향해 뻗쳐오고 있었다.
카카카캉!
가공할 살검지류(殺劍之流)!
검강은 도중에서 서른 여섯가지의 변화를 일으키며 무정삼후까지 한꺼번에 휘감아왔다.
"어헝--!"
형운비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것은 자신조차 엄두를 못낼 초유의 극상승 살인강(殺人 )이었던 것이다.
절대절명의 순간 설화린의 손에 들린 술잔에서 술(酒)이 솟구쳐 오르며
빛살처럼 천정을 향해 폭출된 것과,
한 마디 괴이한 비명과 함께 소녀의 몸이 밑으로 굴러 떨어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허나 소녀는 곧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한 점의 핏기도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로 설화린을 망연히 응시했다.
"어린 놈… 네가… 네가…"
설화린을 바라보는 그 눈빛을 어찌 소녀의 눈빛이라 할 수 있겠는가?
초열지옥(焦熱地獄)에서 뛰쳐나온 악귀라 할지라도
이처럼 소름끼치는 눈빛은 지니지 못했으리라.
"네가… 네가 감히 난 천요(天妖)를…"
"후후… 어찌 그대 뿐이겠는가? 창궁칠좌(蒼穹七座) 전원이 내 손에 죽어갔어."
"으으… 지독한 놈… 네놈 역시… 살아 남지 못하리라…"
소녀는 주문(呪文)처럼 뇌까리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쓰쓰쓰… 쓰으으…
돌연, 소녀의 얼굴이 시퍼런 마기(魔氣)에 휩싸이더니
입에서 가공할 기세로 피화살(血箭)이 쭉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회주! 위험하오--!"
무정삼후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혈전(血箭)!
그것은 체내의 모든 피를 혼신의 진기(眞氣)에 담아 토해내는 무서운 수법이었다.
이것은 상대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는 극악무도한 마공(魔功)이었으며,
한 방울의 피라 할지라도 쇳덩이에 구멍을 낼 정도로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어,
어떠한 호신강기(護身 氣)로도 막을 수 없는 극사(極邪)한 마공이었다.
그러나 정작 설화린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바로 지척에서 무수한 핏방울이 폭우(暴雨)처럼 쏟아져 내리는데도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로 흘러내린 칠흑의 머리칼을 느릿하게 쓸어 올리며 한 차례 씨익 웃었을 뿐이었다.
"후후… 천요, 그대는 상대를 잘못 봤다. 나는… 야접(夜蝶)이야…"
상대에 대한 조소(嘲笑)와,
자신의 가슴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허무(虛無)를 뱉아내는 듯한 자조(自嘲)의 일성…
번쩍!
한 줄기 눈부신 섬광과 함께 비릿한 피냄새가 사방으로 확 번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흐윽…"
천요의 부릅떠진 눈에는 불신(不信)의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으으… 나의 필살지공(必殺之功)은 천하의 그 누구도…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것이거늘…"
"물론, 피하거나 막을 수 없지. 그러나 혈전의 방향을 돌릴 수는 있다
. 내가 지니고 있는 내공이 그대보다 강할 때에 한해서지…"
"으으… 대존께선… 너무 강한 적을 두었다…"
그녀는 스르르 무너져 내리더니 급기야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리고는 그 무엇을 잡기라도 하려는 듯 두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움켜쥐려는 것일까?
젊음? 명예? 황금?
그러나 그녀의 손에 잡히는 것은 젊음도, 명예도, 황금도 아닌 한낱 죽음 뿐이었다.
"억겁… 억겁(億劫)…"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윤회(輪廻)의 세월… 큭!"
그것이 그녀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무슨 뜻인가?
다시 환생(還生)하여 설화린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그러나 아무도 알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는 법이다.
이때, 그녀의 몸에서 괴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찌이익… 찌익…
그녀의 시신이 불쑥불쑥 불어나며 전신의 옷이 찢어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둔부가 풍만하게 변해갔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은 완전하게 성숙한 삼십 전후의 풍만한 여체로 변모했다.
"흐음…"
"기막히군…!"
무정삼후의 입에서 기이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어느 새 그들의 앞에는 눈부시도록 늘씬한 다리를 노출한 여체가 누워있는 것이다.
시신(屍身)이라고 하기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체였다.
이 절염(絶艶)한 여체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내들이 넋을 잃었을 것이며,
그 얼마나 많은 사내가 죽어갔을 것인가…?
"요사스런 계집! 죽어서까지 지저분한 몸뚱이를 자랑하다니…"
원래 여자에게 담백한 회안무정 염백후는 아예 외면해 버렸다.
설화린은 천천히 마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천요… 그녀의 나이는 이미 오십 세를 넘었소."
"……!"
"그녀는 원래 묘강(苗疆)의 마녀(魔女)라고 불리웠을 만큼 악명이 높았었소.
하루에 한 명의 사내가 그녀의 욕정(欲情)을 위해 죽어가야 했을 정도로…"
설화린은 느릿하게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서는 모용산산과 청지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무서워요…"
"이젠 모두 끝났어."
설화린의 나직한 목소리에 뒤이어 마차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
"회주와 대형은 여자에 대해 너무도 몰라."
"특히 대형은 여자에 대해서만은 무식하기 짝이 없어."
형운비와 단월빙은 천요의 시신 앞에서 망부석(望夫石)처럼 굳어진 채 떠날 생각도 않고 있었다.
"이런 여인이 어째서 죽어야 할까?"
"적어도 삼등품(三等品)은 된다. 저 미끈하게 빠진 다리를 봐라."
"맞아! 저런 류의 여인은 사내를 미치게 만들지…"
"가슴은 어떤가? 내 생각엔… 가슴만을 따진다면 이등품(二等品)은 족히 되겠는데…"
"아냐… 가슴보다는 저 오동통한 둔부가 훨씬 나아…
저렇게 위로 바짝 올려붙은 둔부는… 생각만 해도 그 맛이 그만이거든…"
"아깝군, 아까와…"
형운비는 한 옆에서 야생화(野生花) 한 송이를 꺾었다.
그는 그것을 천요의 머리에 꽂아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너무 특이한 여인은 자고로 불행하게 생(生)을 마치는 법이지…"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며 핏자국을 닦아냈다.
"다시… 태어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못 생기고 평범한 여인으로 태어 나시오. 오래 살거요…"
"……"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녀가 만약 대답을 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다시 천요(天妖)로 태어나기를 주저없이 말했을 것이다.
여인(女人)들이란 대개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니까…
"언니,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다니?"
"언니는 이 무지막지한 자들에게 이렇게 붙잡혀 있는 게 무섭지도 않아?"
"무섭긴… 그들이 우릴 잡아 먹을까 봐서?"
"피이, 누가 잡아 먹히기나 한대?"
"그런데 왜?"
"기막혀! 그럼 언니는 이 생활이 좋아?"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잖아?"
"흥, 언닌… 그동안 변했어."
"청지야, 내가 변한 게 아니란다. 세상이 변하고… 제왕장성이 변한 거야…"
혈야회의 한 밀실(密室) 안, 자꾸만 울먹이며 보채는 청지를 달래느라 모용산산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난 답답해. 이런 생활이 정말 싫단 말야!"
"나라고 왜 답답하지 않겠니?"
"그럼 왜,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거야?"
"가만있지 않음 그럼 어떡할 테냐? 야접이란 인물은 어떤 목적이 있기에 우릴 납치한 거야.
그 목적을 이루지 않는한 우리를 풀어주지 않을 거야."
"그럼 우린 어떡해?"
"어떡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기다리는 거지."
"기다린다구? 언제까지라도 말이야?"
"으음…난 기다릴 거야. 언제까지라도…"
"세상에…"
"그리고 설혹, 야접이란 인물이 우릴 제왕장성으로 가라고 해도
사실 난…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아…"
"언니…"
"청지, 너도 말했잖니? 제왕장성은 이미 썩었어.
의풍(義風)은 흩어진 지 오래이고,
문상(文相)인 나마저 정체모를 사람들에게 무수한 압력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강압에 못이겨 문향원을 움직여 왔다는 것도…"
"……!"
"어차피 잘된 일인지도 몰라. 누군가는 나서서 이 혼란의 늪에 빠진 중원을 건져 내야해."
"그렇다면 언니는 지금 그 야접이란 자객을 믿는 거야? 그 일을 할 사람이라구?"
"으음… 조금은 그를 믿을 수 있어."
"세상에… 그는 자객(刺客)이야! 은자를 받고 사람을 죽여주는 자객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돼.
그는 어쩌면 우리를 죽일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구? 어째서?"
"난 그의 눈을 봤어. 그의 눈은 다만 살(煞)의 눈빛이었을 망정
, 절대 마(魔)의 사악(邪惡)한 눈빛은 아니었어.
그의 눈빛엔… 그래, 어떤 정기(精氣)와 진실같은 게 숨어 있었어.
천하의 그 어떤 명숙(名宿)도 그처럼 침착한 눈빛은 갖고있지 못했어.
정말이야…그런 눈빛은 정말로 처음이었어. 처음…"
"……!"
"청지, 내말 잘 들어. 설혹, 제왕장성이 무너진다해서 천하의 종말(終末)이 오는 것은 아니야.
제왕장성은 무너져도… 중원(中原)은 영원해…"
"그, 그럼 언니는 지금껏…"
"그래… 언젠가는 결국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이 일은… 이미 예고(豫告)되었던 비극(悲劇)이야…"
모용산산은 산발(散髮)을 하고 있었다.
탐스런 머리카락이 그녀의 동그란 어깨를 덮은 모습은 아주 보기에 좋았다.
그녀는 청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청지야, 이들이 비록 잔혹한 자객이기는 하나 전혀 예의가 없는 무리는 아니다.
우리를 해치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난 무섭단 말이예요, 언니…"
청지는 모용산산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꼈다.
모용산산은 그러한 청지의 가냘픈 등을 가볍게 토닥거려 주며 조용히 웃었다.
"청지, 곧 야접이란 자가 우리를 찾을 것이다. 그가 오거든 담판을 짓도록 하자."
"그렇다니까."
"젠장! 그걸 어떻게 믿어?"
"빌어먹을! 여자에 대해서 나만큼 아는 자가 천하에 누가 있나?
이봐, 빼빼, 계월루(桂月樓)의 산홍(珊紅)이만 해도 그랬잖아!"
"산홍이…?"
"내가 그랬잖아! 그 계집은 보나마나 한 올도 없을 거라고…"
"흐음, 하긴 그렇군. 그러나 자네 화화루(花花樓)의 월화(月花)를 보는 순간 뭐라고 했지?"
"글쎄… 내가 뭐라고 그랬더라…?"
"빌어먹을! 그때도 자네는 똑같이 말했네!"
"그랬던가?"
"암! 그러나 월화, 고 계집은 나이도 어린 것이 매우 성숙하기가 이를 데 없었네."
"흐흠…"
"그러니까 내 말을 믿어야 해."
"아냐. 이번만은 틀림없어. 그때는 술에 취해 내가 잘못 본거라구."
"젠장할! 그럼 아예 내기를 할텐가?"
지금 형운비와 단월빙은 청지와 모용산산이 있는 밀실의 밖에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논쟁(論爭)이라고 해 봐야 기껏 술마시는 얘기고
거기서 조금 발전해 봤자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 뿐이지만,
이들이 논쟁을 벌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남이 생각하면 정작 실소를 터뜨릴 화제(話題)를 가지고도
그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심각한 얼굴로 논쟁을 벌이는 것이다.
화제 또한 중구난방이다.
술마시는 이야기로 열심히 떠들다가는 느닷없이 사람 죽이는 이야기로 펄쩍 건너뛰는 일 따위는
아예 예사로운 일이고, 심지어는 개미싸움을 시키면서까지
천하(天下)가 어떻고, 관외(關外)의 정세가 어떻고 하는 따위의
얼토당토 않은 말까지 튀어나오는 것이 다반사인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위인들의 가장 신나는 화제는 여자(女子)!
여자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이 위인들의 입에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침이 튀기는 것이다.
"내 말을 들어봐. 이건 어디까지나 철저한 경험(經驗)에 의거해서 하는 말인데…"
"그래,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보게."
"자고로 계집이란 말씀이야… 눈두덩이가 소복하고, 귓불과 입술, 턱이 토실하니
살집이 좋으면 명기(名器)를 지니고 있긴 하나… 십중팔구는 그곳이 맨숭하단 말일세."
"젠장할! 모르면 잠자코나 있을 것이지… 저 계집을 보게. 모용산산인가 뭔가하는 계집말이야."
"응!"
"어떤가? 머리칼이 반지르르 윤이 나고 탐스러울 뿐만 아니라, 눈썹은 또 어떠한가?"
"눈썹이라… 위로 약간 치켜 올라간 것이 성깔도 만만찮겠고… 또한… 큭큭… 꽤나 밝히게 생겼군!"
"빌어먹을… 개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
이것봐, 나는 그걸 보라는 게 아니라 눈썹의 상태가 어떤가를 보란 말이야!"
"흐흠… 윤기가 흐르는 것이 유난히 짙군…"
"옳거니! 바로 그 점일세. 눈썹과 머리칼이 반지르르 윤이나고 짙은 계집은 자고로…"
"자고로…?"
"ㅋㅋ… 그곳도 마찬가지이지. 이건 순전히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말이네."
"빌어먹을! 빼빼, 네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뭐라구? 그럼 아예 확인해 보는 게 어떠냐?"
"확인? 좋아, 한데 어떤 방법으로 확인을 하지?"
"방법은 무슨 방법! 당연히 벗기고 확인하는 수밖에."
"안돼! 그건 안돼!"
"어째서?"
"모르긴 몰라도… 저 계집은 아마 회주께서 점찍어 놨을걸…?"
"그럼 난처하군."
"이런 방법은 어떨까?"
"무슨…?"
"회주께 직접 물어보는 거지뭐."
"그것도 안돼!"
"어째서?"
"빌어먹을…! 그따위 지저분한 말을 어떻게 물어?"
"하긴… 그렇군!"
"……"
두 사람은 한동안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경미한 기적과 함께 설화린이 들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무래도 캥기는 것이 있는지라 철수무정 형운비는 겸연쩍은 얼굴로 푸시시 웃었다.
"헐헐… 여인들을 만나기 위해 오셨는지요?"
"그렇소."
"헐헐… 조심하십시요."
"무슨 뜻이오?"
설화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일검무정 단월빙은 괴소를 터뜨렸다.
"앙칼진 계집들입니다. 특히 모용산산이란 계집은 보통이 아닙니다.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것이… 그러한 류(類)의 계집은 자고로…"
단월빙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그제야 알아차린 설화린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알겠소. 이 후에는 그녀들에게 아마 경어를 써야 할 것이오."
"예?"
"안에 있는 두 여인은 어쩌면 혈야회의 양대문장(兩大文相)이 될지도 모르오."
"예에?"
저쪽으로 걸어가는 설화린의 뒤를 보며 형운비와 단월빙은 입을 딱 벌렸다.
"문상이라니…! 그 털도 없는 것이 문상이 된단 말인가?"
"빌어먹을! 있는지 없는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봐, 넌 내 말을 믿어야 해."
"빼빼, 네 말은 믿을 수가 없어."
"좋아! 정말 그렇다면 나는 이 일에 내 전부(全部)를 걸겠다!"
단월빙이 심각한 어조로 말하자, 형운비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암! 대장부가 어떤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걸어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
나 역시, 그녀가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를 규명(糾明) 하는 데 내 모든 것을 걸어 보겠다!"
형운비와 단월빙은 심각한 어조로 두 손을 굳게 잡았다.
이것이 팔십여 년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두 사람의 생각이 완벽하게 일치된 첫 번째 일이었다.
모용산산과 청지는 바둑을 두고 있다가 설화린을 맞이했다.
"……!"
그녀들은 설화린을 힐끗 바라본 후 두 눈을 스르르 내리깔았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설화린이었다.
"혹, 불편하다거나 무례한 점은 없었는지 모르겠소."
"전혀…"
모용산산은 두 볼을 약간 붉힌 채 가냘픈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 옷매무새가 약간 흐트러진 상태였다.
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어 헤쳤고 가슴의 융기는 너무도 팽팽하여 당장이라도 옷이 터질 듯했으나,
눈빛만은 감히 색심(色心)을 일으키지 못할 만큼 차가왔다.
"찾아 오셨으면 용건을 말하세요."
"용건…?"
"그래요. 연약한 여자를 이렇게 짐승 가두어 놓듯 하는 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후후… 결국은 풀어달란 말이로군!"
"……!"
"좋소. 그렇다면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
"사실, 나는 한 가지 내기를 하고 싶어 왔소."
"내기…? 예상밖인데요?"
모용산산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때 청지는 설화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전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육감적으로 발달되어 있는 청지의 입술에는 아련한 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아… 어쩌면 이렇듯 닮은 사람이 있을까? 보면 볼 수록 이 사람은 그와 닮았어.
세상을 비웃는 듯한 냉소와 저 암울한 분위기…)
청지에게 있어 설화린이란 인물은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다.
또한 그녀에게 있어 첫사랑이라 할 수 있었다.
첫사랑…
언뜻 불어닥쳤다가는 홀연히 사라져 가는 한 줄기 바람같았던 사랑…
(그래… 그일지도 몰라… 그는 나에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죽립을 쓰고 역용하여 얼굴을 바꾸어 버렸는지도 몰라…)
청지는 설화린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때 설화린의 차가운 냉소가 들려왔다.
"후후… 그대가 이 내기에서 이기면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다면 그대들은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
"보… 복종?"
"그렇다. 물론 이런 방법을 쓰지 않고도 그대들을 얼마든지 잡아 둘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비겁한 방법을 쓰고 싶진 않다.
그대들에게도 공평한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말이다."
"으으음…"
모용산산은 벌레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녀는 이미 설화린의 무공에 대해서는 경탄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따라서, 무공(武功)의 내기라면 단 일 푼의 승산(勝算)도 없음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그건… 너무나도 불공평해요. 당신의 무공은…"
"후후… 그렇게 미리 속단하지 마라.
그대들의 무공은 본인의 일초지적(一招之敵)도 되지 못한다."
"그럼…?"
"본인은 그대와 진학(陣學)으로 겨루고 싶다."
"뭐라구요? 지, 진학…?"
모용산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진법(陣法)의 내기!
그것은 바로 지혜(智慧)의 내기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모용산산이 놀란 것은 제왕장성의 문상(文相)을 지낸 자신 앞에서
감히 그러한 제의를 해온 야접이란 이 사내의 당돌함 때문이었다.
(어째서… 이 자는 이따위 어리석은 내기를 자처하는 것일까?)
그렇다. 일개 방파의 문상(文相)이라는 직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몇만, 아니 몇 십만 명 중에서 가려낸
천부적인 두뇌와 지략(智略)을 겸비해야만 앉을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하물며 강호의 무명방파도 아닌 제왕장성의 문상을 지낸 자신 앞에서
감히 기문진학(奇門陣學)의 내기라니…
모용산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설화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화린은 그러한 모용산산의 모습을 직시하며 찬물같은 조소를 흘려냈다.
"후후… 왜, 뜻밖인가?"
"미쳤군요. 질 싸움을 하려 하다니…"
모용산산은 여전히 어이없다는 듯 설화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설화린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툴툴 웃었다.
"후후… 이제보니 그대는 상대를 무시하는 고약한 버릇까지 있었군.
길고 짧은 것은 대어 봐야 안다는 그 진부하고도 상투적인 말 뜻도 모르나?"
"결과가 뻔한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어요.
만약 제가 당신이라면… 그따위 어리석은 내기는 단연코 하지 않을 거예요."
"후훗… 귀엽군."
"뭐, 뭐라고 하셨나요. 지금…?"
"귀엽다고 그랬다."
"귀엽다니요… 세상에…!"
"후후…바닥이 훤히 보이는 그런 알량한 지혜로
하늘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모습이 내 눈엔 귀엽게 보인단 말이야…"
"뭐, 뭐라구요?"
한 순간 모용산산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눈자위를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는 곧 베시시 교태롭게 웃었다.
"호호호호… 고맙군요. 허나 당신은 지금 한 말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 웃음 속엔 그러나 날카로운 가시가 돋혀 있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