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24]
박연세(朴連世, 1883-1944)②
만세운동을 준비한 박연세를 일본 경찰이 체포한 일로 인해 3월 5일 계획된 군산 만세운동은 더 힘을 얻어서 3월 20일 1천여 명의 횃불 운동으로 이어졌고, 4월 4일에는 이리역(현, 익산역) 앞에서 1만여 명이 모인 운동으로 규모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감옥에 갇히게 된 박연세는 2년 6개월간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고 자신도 십자가의 길을 가기로 다짐했습니다. 출옥 후 1922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해서 3년간 공부한 후 1925년 목사가 되었습니다. 익산을 시작으로 1926년에는 목포 양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서 목회하다가 네 차례 전남노회 노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당시 목포는 전국 6대 도시로 양동교회 위상도 그만큼 컸는데 안타깝게도 박연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배교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한 후 조선교회를 일본기독교에 통폐합하려는 일제의 움직임에 맞서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이 일로 대구형무소에 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1942년 8월 30일 예배 중 설교에서 “육체적으로는 천황 폐하를 제일 존경해야 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존경해야 한다”고 했는데, 일본 검찰은 박연세가 천황을 예수 그리스도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로 여겨 불경죄를 범한 것이라 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7월 7일 지나사변(중일전쟁) 5주년에는 설교 중 교인들에게 “일본은 또다시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하는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독일도 소련과 전쟁 중인데 이것들은 모두 약육강식의 전쟁이다”라고 한 사실이 일본 경찰에 알려져서 대동아전쟁의 숭고한 목적을 비방했다는 죄목도 더해졌습니다.
<참고: 전정희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