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형제 하늘을 날다
1903년, 모든 비행기들의 조상인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제작하여 성공시킨 미국인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 형제를 일컫는 말로, 항공 공학의 아버지이다.
비록 라이트 형제가 없었더라도 이후 1906년, 파리에서 "출발할 때 동력 장치가 필요 없는 비행기"를 최초로 날린 브라질의 프랑스계 발명가 아우베르투 산투스뒤몽(Alberto Santos-Dumont, 1873~1932) 같은 동력 비행기 연구를 진행한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비행기가 어떻게든 개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 형제는 최초로 동력 비행기를 띄우는 데 성공했고, 때문에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의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매우 거대하다.
라이트 형제가 없었으면 사실상 오늘날의 항공기는 존재하지 못했거나, 발명되더라도 더욱 늦게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위대하고, 남긴 것도 많은 이들이다.
이 둘의 노력과 열정이 인류의 역사를 크게 바꿨다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이들이 없었다면 공군도 한동안 없었을 것이다.
해외 언론사 LIFE에서 '항공 역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 100선'을 선정한 적이 있는데, 당연히 1위는 라이트 형제이다. 2위는 베르너 폰 브라운.
비행기 개발을 위한 노력
이들은 독자적인 연구만으로는 도저히 어렵다고 판단하여 미국 스미소니언 재단 과학 협회를 찾아가 전문적인 과학자들에게 여러 정보를 듣기도 하며 열심히 노력한다.
결국 윌버와 오빌이 주로 비행기 연구 및 개발, 시험 비행에 나서기로 하고 로런스와 토머스가 자전거 가게와 기계 완구 가게를 맡고 캐서린은 초등교사로 돈을 벌면서 연구 자금을 보태준다.
여러 연구와 같이 바람의 크기 및 일정 속도의 바람이 부는 곳을 찾아 헤맨 끝에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던 당시 인구 1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 키티호크(Kitty Hawk)[7][8]로 찾아간다.
그곳을 연구 거점으로 삼아 3년에 걸친 온갖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1903년 12월 17일 프랑스계 글라이더 조종사이자 비행기 연구가인 옥타브 샤뉘트(Octave Chanute, 1832~1910)를 포함한 안전 요원 5명이 보는 자리에서 라이트 형제를 태운 최초의 동력 비행기 플라이어 1호는 하늘로 날아올랐고 약 12초 동안의 짧은 비행에 성공했다.
바람이나 수소 같은 기체(氣體)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난 인류 최초의 비행 성공 기록이었다.
형제는 비행 성공 소식을 목사인 아버지에게 알리기 위해 전보를 쳤는데, 전보 담당자의 친구였던 기자가 이 소식을 듣고 기사를 내면서 이들의 업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수난
보통 위인전에 잘 넣지 않은 게 이들의 고생담이다.
동력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미국 과학계는 축하보다는 분노와 시샘을 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형제를 방해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라이트 형제가 직접 찾아가 가르침까지 구했던 새뮤얼 랭글리(Samuel Langley, 1834~1906) 박사[9]였는데 스미소니언 과학 협회 간부이기까지 해서 당시에는 명망 있는 학자 중 하나였다.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한 랭글리는 이미 1897년부터 동력 비행기 개발에 힘을 기울여 왔는데 듣보잡인 아마추어 형제들이 자신을 제쳐두고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하필이면 1899년 라이트 형제가 랭글리 박사를 찾아와서 가르침과 자문을 받는 와중에 동력 비행기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에, 랭글리 박사는 "나의 연구 성과를 허접스런 두 잉여 놈들이 무단으로 훔쳐 갔다!"라고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게다가 1903년 12월 8일 겨우 아흐레 전, 랭글리 박사는 동력 비행기 시험 비행에 나섰다가 추락했기에 자신이 실패하고 라이트 형제가 성공했다는 것도 믿지 못했다.
애시당초 라이트 형제의 방식과 랭글리 박사의 방식은 매우 달랐다.
랭글리 박사는 새나 비행선을 참고하던 다른 도전자들과 다를 게 없었지만 라이트 형제가 참고한 것은 선박과 물이었다.
사실 라이트 형제는 새뮤얼 랭글리에게만 지식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글라이더 연구가인 독일인 오토 릴리엔탈 같은 사람들도 라이트 형제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솔직히 말하자면 새뮤얼 랭글리가 발광한 이유도 라이트 형제가 제자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토머스 에디슨도 경쟁자들에게 배우기도 하고 협력 및 도둑질을 하기도 했으나 서로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1904년 7월. 랭글리 대 라이트 형제의 대결이 벌어진다.
둘이 동력 비행기를 타고 2만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누가 잘 날아가나 시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라이트 형제 완승.
랭글리의 비행기는 힘없이 강물에 추락했지만, 라이트 형제가 탄 비행기는 잘만 날아갔다.
그것도 15분씩이나 400미터 위를 쌩쌩 날아갔기에 미국 언론은 이번이야말로 "라이트 형제 하늘을 날다!"라고 확인 보도를 해버렸다.
결국 랭글리는 패배에 좌절하여 모든 활동을 멈추고 폐인처럼 지냈으며, 평생 라이트 형제를 원수로 여기고 이를 갈다가 오래가지 못해 화병으로 죽게 된다.
랭글리 박사는 죽기 전에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라이트 형제를 이겨서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후술할 랭글리의 제자 박사들이 한 행보로 봐서는 근거가 있는 듯하다.
랭글리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스미소니언 과학 협회는 스승인 랭글리 박사가 당한 굴욕에 복수를 하겠다는 심산으로, 라이트 형제가 랭글리의 아이디어 및 여러 가지를 도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라이트 형제는 1년이 넘는 온갖 조사와 수사를 받아야 했다.
물론 결과는 무죄. 어떤 증거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똑같다면 왜 랭글리 박사의 비행기는 추락하고 두 형제가 만든 비행기는 잘 나는데?" 라는 결과가 이를 입증했던 것.
이렇게 무죄가 입증되고 이들은 계속하여 여러 단점을 고쳐나가면서 개량된 비행기를 만든다.
1905년에 이들이 플라이어 1호기와 2호기의 비행을 통해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량한 '플라이어 Ⅲ'는 선회·방향 전환·원운동·8자 비행이 가능했고, 30분 이상 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