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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본 까페의 '춘천의 역사' 자료로, 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글씨가 문소각 벽에 있었다는 자하
신위의 기록을 찾아 올렸었다. 춘천이궁과 문소각은 춘천역사문화연구회에서 그간 여러 차례 답사를
하면서 장차 그 복원까지를 염두에 둘 만큼 춘천의 역사문화를 생각할 때 목하 커다란 현안의 과제가
되고 있는 문제다.
그런 가운데 이런 자료가 발견된 것은 비록 작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두 눈을 크게 뜨게 할 만큼, 주목
해볼 자료라고 여겨졌다. 그 유명한 추사의 글씨가 춘천에 있었다니, 그것도 문소각 벽에 있었다고
하니, 사실 여부에 대한 검증부터 차근차근 자세히 알아보고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김정희의 문집인 <완당전집>을 뒤지며 추사나 자하 관련 연구물들을 찾아보고 자하의 원시를
번역하였다. 추사나 자하의 문집으로 알려진 책들이 본인들이 젊은 시절의 초고 글들을 부정하거나
없애버린 이력이 있는데다가, 19세기 후반 문제성 있는 편집 때문에 아직 전모를 제대로 살필 수 있는
본격적인 연구의 집적이 미흡한 상태라고 보이지만, 해당 전공자의 의견까지 들으며 자문을 구하였
으므로 여기 정리해서 올려본다. 자하의 시는 먼저 습재연구소 김정기 선생의 의견을 들었고, 김선생을
통해 2006년 성균관대에서 자하의 시로 박사학위를 한 이현일 선생의 자세한 텍스트 고증과 의견을
들었으며, 또 단국대에서 <한한대사전>이라는 최고의 사전 편찬에 오래 종사하셨던 안동 국학연구원의
김능하 선생님 의견도 들을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의견을 준 이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가) 자하의 <맥록>에 실린 시의 소개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년)는 평산신씨로 영조 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정조 말년인 1799년에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히면서 관로에 나갔다. 당색으로는 소론이었던 그는 순조 11년인 1811년에
당상관이 되었고, 1812년 7월 연행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다녀온 이후 곡산부사 및
내직으로 승지 등을 거치다가 1818년 3월말 춘천부사로 부임하여 이듬해인 1819년 6월까지 재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춘천읍지>).
이때 춘천부사 시절의 기록으로 남긴 그의 글들이 <맥록(貊錄)>이란 시집으로 그의 문집인 <경수당
전고(警修堂全藁)>에 실려 있다. 이 시집은 맥국의 고도인 춘천의 19세기 전반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로 일찍이 주목을 받아왔으나, 좀처럼 쉽사리 읽히지 않는 그의 시들 때문에 아직 잘 알려지지
못한 편이다. 더구나 한국고전번역원의 문집총간에도 여러 필사본 등 판본이 다른 자하의 문집들
가운데 하나인 장서각본(필사본으로 불분권 29책)을 텍스트로 삼았기 때문에 더러 오탈자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맥록>은 앞의 범례에서 "시를 지명과 연계지었고 지명을 연도와 연계하였다(以詩繫地
以地繫年)"고 밝혔듯이 시를 지은 춘천에서 시간순에 따라 시들을 편차한 것이다.
여기 소개하려는 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 있는 원문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곳이 있었고,다른 판본과 비교해본 결과 아래와 같은 원문을 접하게 되었다(빨간 글자는 이현일 선생의 고증에 따라
고친 글자임). 제목이 긴 이 시에 번역문을 붙였다.
김추사가 예서체로 쓴 미불(米芾)의 시구, "삼협의 강물 소리 붓 밑에서 흐르고, 육조의 돛
그림자 술단지 앞에 떨어지네"라는 14글자가 문소각(聞韶閣)의 벽에 붙어 있는데, 내가 작년
가을에 벽오헌(碧梧軒)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오늘 다시금 문소각에 와보니 '육조의 돛 그림자[
六朝帆影]'이라는 4자를 누군가 찢어 갔기에 시를 써서 이 (일화)를 남겨둔다.[金秋史隷書米句,
三峽江聲流筆底, 六朝帆影落樽前, 十四字黏在聞韶閣壁, 僕於昨秋, 遷居碧梧軒, 今日再到閣中,
六朝帆影四字, 被誰人扯去, 以詩存之.]
평론하건대 추사가 팔분예서(八分隸書)에 다다른 경지가 評量秋史到分隷
어찌 겨우 농묵(濃墨)이나 퇴묵(堆墨)으로 이루어진 것이랴. 肯堇濃堆墨所成
홍괄(洪适)의 <예석(隸釋)>도 수준 이하를 논외로 쳤으니, 洪釋無譏檜以下
석경(石經) 잔비(殘碑)로 남은 글자는 동한(東漢)의 서울에 있었다네.石經殘字漢東京
깨달음이 시의 진수(眞髓)를 따랐음은 본래 알았으나, 本知悟徹從詩髓
나도 모르게 영기(英氣) 뛰어난 후생(後生)을 두려워하네. 不覺英多畏後生
다시금 문소각 뒷벽에 이르러보고는 再至聞韶閣後壁
'육조범영'의 정취에 망연자실하였네. 惘然帆影六朝情
― 팔분에 퇴묵서(堆墨書)라는 말이 있다. 八分有堆墨書之語
보다시피 이 시는 여러 가지 전고가 들어가 있으며 시의 격조에 대한 생각도 담고 있는 시여서
얼핏 보고는 쉽게 이해하기가 힘든 시이다. 우선 대구별로 이 7언시를 주석과 함께 살펴보자.
먼저 시를 쓴 시점은 기묘(1819년) 1월 어느날이라 여겨진다. 며칠 병을 앓은 뒤인 2월 4일에 다시
문소각으로 옮겨 살았다는 말이 뒤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벽오헌(碧梧軒)은 객사로 쓰였던 수춘관(壽
春館)의 방 이름이다. 아마 문소각에서 지내다가 날씨가 추운 동절기에는 벽오헌으로 갔다가 날씨가
풀리면 다시 문소각으로 와서 지냈던 모양이다.
제목에서는 왜 시를 지었는지의 이유가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밝혀져 있다. 춘천부의 관아 건물인
문소각의 벽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熙:1786-1856년)가 예서체(隸書體)로 쓴 송나라 때 미불이란
인물의 싯구가 붙여져 있었는데, 누군가 그 14자 가운데 일부인 4자를 찢어간 것을 보고는 보존하려는
생각에서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14자 글자의 상태를 서술하면서 '점(黍+占:찰싹 붙다)'자와 '차(扯=
才+者:찢다,뜯다)'자를 써서 묘사한 것을 보면, 이 글자는 추사가 벽에 직접 쓴 글씨가 아니라 종이에
써서 붙인 것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위에 말한 문집총간본에서는 '차'자 대신 '망(心+罔)'자를 써서
추사의 글씨가 직접 벽면에 쓴 것인지 써서 붙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불의 시구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시 제목에서부터 벌써 우리는 청조 고증학을 배워 '학예일치(學藝一致)'라는 경지를 이룬 동양
서예사의 거봉 추사 선생만이 아니라 조선후기 시서화의 삼절로 이름이 높았던 자하 신위라는 인물의
연관에 여러 의문점들이 떠오르게 된다. 추사 김정희가 왜 춘천에 와서 문소각 벽면에 글씨를 남겼을까?
추사와 자하는 어떤 관계이길래 이런 시를 남기게 되었을까? 우리가 아는 추사체와 여기서 말하는
예서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추사는 왜 하필 미불의 시구를 문소각 벽면에 남기게 되었을까? 등등. 우선
자하의 철저한 고증 정신을 생각한다면 추사의 친필 글씨가 문소각 벽에 붙여져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시를 기승전결(起承轉結)에 따라 각 연(聯)별로 살펴보도록 하자.
1) 처음 수련(首聯)의 댓구는 추사의 예서 글씨를 바라보며 자하가 생각하는 예서에 대한 관점을
피력한 것이다.
평론하건대 추사가 팔분예서(八分隸書)에 다다른 경지가 評量秋史到分隷
어찌 겨우 농묵(濃墨)이나 퇴묵(堆墨)으로 이루어진 것이랴. 肯堇濃堆墨所成
우선 추사의 예서 글씨를 '분예(分隸)'라고 표현하였으니, 이는 곧 '팔분예서'란 말이다.
흔히 예서는 천하통일 뒤의 진(秦)나라 때의 전서(篆書)에 이어 한(漢)나라 때 널리 쓰였던 글자체로,
특히 서한(西漢)에서 동한으로 천도한 뒤에 완정한 서체로 자리잡혔다고 말한다. 이 동한 때의 예서는
'팔분(서)', '분예(分隸)', '분서(分書)'란 말로도 불리는데, 팔분이란 명칭의 해석을 두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여러 말 대신에 우리가 주목해볼 언급은 청나라 때 금석학의 대가였던 옹방강
(翁方綱:1733-1818년)의 언급이다. 그는 연행시 추사가 만나 스승으로 섬겼고, 또 자하도 시의 스승으로
받들었던 고증학의 대가인데, 그의 <양한금석기(兩漢金石記)>란 책에서 이르기를 "필획이 평평하고
곧으며 여전히 소전(小篆=秦篆:전국시대까지 여러 나라에서 쓰이던 大篆을 진시황의 통일 후 李斯가
고쳐 만든 글자체)이면서 그 복잡하고 중복된 것을 버린 것이 예서이다. 예서에다 약획과 날획을 가한
것이 팔분이다[筆畵平直 仍小篆而去其繁重者 隸也 因隸而加掠捺 八分也]"라고 하였다. 그래서 흔히
"글자체가 좌우로 나뉘어 등지고 있으며 필세(筆勢)에 파책이 있어 마치 여덟팔자(八)처럼 좌우로
나뉘어 벌렸기 때문에" 예서를 팔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상 곽노봉·홍우기 편역, <서론용어소사전>
참조). 약획 날획, 파책은 곧 좌우로 벌여 쓰는 삐침획과 파임획을 일컫는 용어다.
그러면 여기서 말로만이 아니라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겨지는 이 한비(漢碑)들을 직접 보자. 아래의
먼저 사진은 깔끔한 느낌을 주는 <예기비(禮器碑:156년)>와 "가장 전형적인 팔분예서"라고 알려진
<화산묘비(華山廟碑:165년)>, 나중 사진은 전서의 용필법과 흡사하다는 평이 있는 <조전비(曹全碑:185
년)>와 '고풍스러움과 졸박함'을 특징으로 하는 <장천비(張遷碑:186년)> 사진이다(사진은 위싱화, <
간명 중국서예발전사>에서 인용함).
이런 예서는 한나라 때만이 아니라 이미 진나라 때부터 차츰 변용되는 가운데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후로 당대나 송대에도 쓰여졌다. 근래에는 특히 많은 목간 및 죽간들이 출토되면서 전서체에서
예서체로 변화해온 필획이나 용필법의 흔적들이 확인됨으로써 학술적으로 변천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서체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쓰였으니, 17세기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화천에서 곡운구곡을 운영했던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24-1701년)이었고, 정조대나 19세기
초에는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1760-몰년미상) 등이 유명하였다.
그러면 이런 예서는 서 예술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 이전의 서체
(전서체 등)가 지녔던 상형성이 감소하고 글꼴 역시 간단해진 반면 필획의 모양새는 훨씬 복잡하고 다양
해지게 됨으로써 원시 형태의 글꼴을 버리고 '고도의 추상예술로 승화되는 계기'가 바로 이 예서체에서
부터 생겼다는 점이다. 글자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원형적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아다시피
이런 문제를 학술적으로 처음 제기한 것이 바로 청나라 때의 금석학자들이었고,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이런 관심을 가지고 서예사의 궤적을 추적하며 예서를 공부한 사람들이 바로 추사나 자하였다는 언급만
일단 여기서 먼저 해두자.
수련에서 자하가 팔분예서를 '농묵'이나 '퇴묵'이란 말로 표현하면서 추사의 글씨를 평론하고자 하는
데는 이런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자하가 공부하는 예서와 눈앞에 보는 추사의 팔분예서는
뭔가 비슷한 관심 아래 있으면서도 또다른 뭔가가 숨겨져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일반인이 보기에도
팔분체는 먹을 짙게 해서 뭉텅 칠하며 붓을 눌러 써서 덧칠해 놓은 글꼴처럼 보이는데, 보고 있는
추사의 예서는 일단 자하가 보기에도 그게 다가 아닌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다만, 시 끝에 주석을
달아놓은 것처럼 먹물을 쌓듯이 크고 굵게 쓰는 '퇴묵서(堆墨書)'라는 것이 한때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하고 넘어간다. 실제로 송나라 때 퇴묵서 혹은 '퇴묵팔분'이란 명칭으로 불렸던 서예가가 있었으니,
진요좌(陳堯佐:963-1044년)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 고위 관직에까지 올랐던 진요좌는 시문과 팔분
고예(古隸)를 잘 썼다고 전하며 몇 가지 황당한 일화도 있지만,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 사람이었
다(명 陶宗儀,<書史會要>).
2) 다음 함련(頷聯)에서는 당시 예서 책을 보고 있던 자하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놓았다.
홍괄(洪适)의 <예석(隸釋)>도 수준 이하를 논외로 쳤으니, 洪釋無譏檜以下
석경(石經) 잔비(殘碑)로 남은 글자는 동한(東漢)의 서울에 있었다네. 石經殘字漢東京
홍괄(洪适:1117-1184년. 자는 景伯, 饒州 파陽 사람으로 만년의 호는 盤洲老人, 시호는 文惠公), 그의
<예석(隸釋)>(1167년, 27권)이란 저서를 단지 '홍석'이란 두 글자로만 표현하였으니, 당시의 첨단
정보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알 도리가 없다. 이 책은 청 건륭제 최대의 문화업적이라 할 <사고
전서(四庫全書:1772-82년)>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아래의 그림처럼 건륭 연간에 새로 간행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럼 남송 때의 이 책이 왜 청나라 때 간행된 것일까? 물을 필요도 없이 금석학에 대한 관심 때문
이었다. 홍괄은 한나라 비문을 매우 좋아하여 일일이 찾아다니며 비문을 조사하고 그 소재지를 기록
하고 형태와 실상을 기록하여 이 책을 지었고, <예속(隸續)>이란 후편 저술도 있었다. 비석의 원문을
옮겨 수록하였고 석각에서 이체자(異體字)를 만나면 그 원상(原狀)을 보존해 남겼으며, 비문 뒤에는
자신의 고석(考釋)을 적어넣었고, 뒷부분에는 이전의 주요 기록이었던 북위 역도원(역道元)의 <수경주
(水經注)>나 북송 구양수(歐陽修)의 <집고록(集古錄)> 등의 내용을 집록해놓기도 하였다. 그래서
"비각이 있어온 이래, 추정컨대 이 책이 가장 정박하다[自有碑刻以来,推是书为最精博]"
는 평가를 받았다(<사고전서총목제요>). 또 이 책을 이어서 누기(婁機)란 사람은 <한예자원(漢隸字原)>
이란 자학(字學) 책을 지었는데, 그 서문을 홍괄의 동생인 홍매(洪邁)가 썼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런 책들을 추사도 역시 모두 보아야 한다고 중요시하는 말을 하였다. 현재 나와 있는 서예사나 예서
관련의 서예이론서에서도 이런 책을 언급하며 소개하는 책은 찾아보기가 힘든데, 이미 자하는 물론
이거니와 추사도 당시 연경의 신간서적이던 이 책을 다 본 것이다(위에 인용한 용어소사전에서는 <예석
>이란 책이 소개되긴 하였으나 지은이가 '홍적'이라고 잘못 소개되었음).
시에서 "수준 이하를 논외로 쳤다"는 말은 경전에 나오는 어구를 의역한 말로서 그 출전은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의 양공(襄公) 29년조이다. 거기에 춘추시대 오(吳)나라 계찰(季札)이 노(魯)나라에 가서
주(周)나라의 음악을 차례로 들어 보고는 모두 평을 하였다는 유명한 대목이 있는데, "회(檜)나라 이하의
민요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도 가하지 않았다[自檜以下無譏焉]"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계찰의 이
고사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도 거의 그대로 똑같이 실려 전한다. '회이
하'란 이로부터 관용적으로 논평할 가치도 없을 만큼 하찮은 작품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여기선
<예석> 뒷부분에 저자의 고석 없이 명칭과 소재지만 기록해놓은 비석들도 다수 수록되어 있음을 지적한
말이라 해석된다.
그 뒤의 석경(石經)이란 동한, 즉 광무제가 왕망(王莽)의 신(新)을 무너뜨리고 도읍을 장안(長安) 동쪽
의 낙양(洛陽)으로 옮긴 뒤 후한(後漢)의 영제(靈帝) 때인 희평(熹平) 4년(175년)에 유학자들에게 조령
(詔令)을 내려 <역경(易經)>ㆍ<서경(書經)>ㆍ<시경(詩經)>ㆍ<의례(儀禮)>ㆍ<공양전(公羊傳)>ㆍ<논어
(論語)> 등 육경(六經)을 정정케 하여 그 정문(正文)을 확인하고, 채옹(蔡邕)으로 하여금 이를 이 팔분
예서로 쓰게 하여 돌에 새겨서 태학(太學)의 문밖에 세웠던 경전을 말한다. 그 후대에도 전란 속에 파괴
되고 옮겨지며 산실된 석경을 새로 제작하기는 하였으나 시기가 가장 이르고 뛰어난 예서체로 쓰인 이
'희평석경'에 대해서 송대까지의 자세한 상황을 전해주는 자료가 바로 위에 말한 <예석>이란 책이다. 이
책의 권14에 <역경>을 뺀 다섯 경전만이 '석경상서잔비(石經尙書殘碑)', '석경노시잔비(石經魯詩殘碑)' 등과 같은 이름으로 당시의 상태가 서술되어 있는데, 홍괄은 경전의 확인 가능한 경문(經文)을 수록하며 각각 몇 자인지, 석경마다 파괴 뒤의 내력을 적어놓았다. 결국 희평석경은 북제(北齊)의 무리들에게
파괴당한 뒤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당송대에 이르면 이미 산망(散亡)이 오래돼 송나라 초기에도
'유경단석(遺經斷石:남겨진 석경의 잘라진 돌조각)'은 호사가들의 비장품이 돼버려 좀처럼 보기가 힘들
다고 하였다. 청나라 금석학자들도 이 희평석경을 보긴 하였다고 하나, 현재에는 일부가 동경의 서도
박물관에 가 있다고 전하기도 한다. 2008년 서울역사박물관의 '중국서안비림명비전'에 이 희평석경의
탁본이 전시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에서 자하가 한 말은, 경전을 새긴 예서체가 당연히 모범으로서 중시되어야 함에도 불구
하고 그 잔편만이 겨우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후대의 연구나 학습에까지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는
안타까움의 토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서예에서 이처럼 송대의 금석학 성과를 눈여겨본다는
모습은, 시론(詩論)이나 화론(畵論)에서 소동파나 미불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점과 맞물려 가면서 차츰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을 아우른다는 '한송절충론'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보인다.
3) 5,6구인 경련(頸聯)에서 "시의 진수를 따름"을 알았다는 말이 바로 그런 말이다.
깨달음이 시의 진수(眞髓)를 따랐음은 본래 알았으나, 本知悟徹從詩髓
나도 모르게 영기(英氣) 뛰어난 후생(後生)을 두려워하네. 不覺英多畏後生
자하 자신이 시로써 입신한 사람인데, 이미 추사가 철저한 깨달음을 거쳐 시의 진수를 따르고 있는 줄
알고 있단 말은 당시 문예계의 동향을 꿰고서 하는 말이고 추사의 시적 능력이나 견해를 이번에도 역시
인정한다는 말이다. 시에서도 그런데 글씨에서도 많은 영기(英氣)가 보이니, 저보다 17살이나 아래인
후배지만 결국엔 그가 두렵다고 토로한다.
추사의 경우 시론에 대해서는 남아 전하는 문집을 볼 때 그 자신 산만한 언급에다 이에 대한 평가들도
분분하다(추사가 명청대의 詩論이나 文論을 절충해서 가지고 있었음은 정혜린, <추사 김정희의 예술론>
참조). 다만 여기서 진수를 따를 줄 안다는 언급은 추사의 시적 안목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직접적
으로는 바로 그가 쓴 미불의 14자 시구를 두고 한 말이다. 딱히 이 장소에 왜 하필 미불의 저런 대구(
對句)란 말인가? 자하가 보기에 그 시를 뽑은 추사의 안목이 뛰어나고 역시 시를 제대로 볼 줄 안다는 말
이다. 이 경련은 추사가 느낀 문소각의 경관미나 정취를 미불과 자하의 입을 통해서 대신 표현해주기도
하는 만큼 다소 이야기가 길어질지라도 하나하나 자세히 풀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북송 때의 미불(米芾:1051-1107년)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서예사에서 그가 '송4대가'의 한 사람
이란 점일 것이다. 올해 초에 나온 한 미불 연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를 소개한다.
"미불은 중국미술사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서예가로서 채양(蔡襄:1012-
1067년), 소식(蘇軾:1037-1101년), 황정견(黃庭堅:1045-1105년)과 더불어 송사대가에 속한다.
미불은 서사 도구와 서예 기법에 조예가 깊었고 스스로 두루마리를 표구했다. 그는 중요한 서예
작품을 소장했고 역대 가장 뛰어난 감식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칭송받았다. 미불의 이론서는
서화의 역사와 연습, 벼루와 종이의 감식, 표구 기술, 낙관의 사용과 같은 많은 분야를 포함한다.
그는 넓은 이론 지식과 예술적인 명망을 조화시키고 비평을 관통하면서 중국 예술가 겸 감식가의
모범이 되었다."(로타 레더로제, <미불과 중국 서예의 고전>)
미불의 선조는 서역 소그드 출신으로 좌무위장군을 지낸 아버지처럼 무관 가문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다. 태원(太原) 사람이나 나중에 호북성 양양(襄陽)으로 옮겨 세칭 '미양양(米襄陽)'이라 불렸고
또 호를 써 '미남궁(米南宮)'이라 불렸다. 자는 원장(元章)이고 해악외사(海岳外史)나 녹문거사(鹿門
居士)란 호도 썼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남방에서 보냈고 서예와 그림에서 강남의 전통을 좋아하여 스스로 '초국(楚國)
미불'이란 두인(頭印)을 사용할 만큼 남방 출신이라 여겼다고 한다. 어머니 염(閻)씨가 황후의 궁녀
였기에 황궁의 배경 아래 황궁 도서관에서 문관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고 하며, 30세에 벌써
서예가로서 유명해졌다. 1091년 41세 때 원래 이름 '불'자를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꿨는데, 그 전에
이미 대표작으로 전해오는 것 중 하나인 <촉소첩(蜀素帖)>(1088년)을 썼고 서예작품을 평론한 <보장
대방록(寶章待訪錄)>(1086년)도 지었다. 그는 남방의 여러 지역에서 낮은 관직으로 봉직하였지만
시서화로 명성이 높던 문단의 거두 소식이나 개혁 정치로 유명한 왕안석(王安石:1021-1086년)과도
교류하였다고 전한다. 서예의 명성에 힘입어 1103년 입궁하여 태상박사가 되었고 예술가 황제였던
휘종을 만나고 서화박사(書畵博士)가 됨으로써 경력의 정점에 달하였는데, 이때는 화가였던 아들
미우인(米友仁:1075-1151년)도 황제를 만났다고 전한다. 죽기 전에 서예작품을 논한 <서사(書史)>를
지었고, 그 밖에 서예분야에 <해악명언(海嶽名言)>, <해악제발(海嶽題跋)>이란 저술이 있으며, 당시
까지의 회화 역사를 다룬 <화사(畵史)>, 소이간(蘇易間:957-995년)의 <문방사보(文房四譜)> 이후의
주요저술로 벼루를 다루며 고려연(高麗硯)에 대한 소개도 수록한 <연사(硯史)>도 미불의 중요 저술
들이다. 문집으로 <산림집(山林集)>(100권)이 있었다고 하나 외침으로 혼란한 남송 초기에 산실되고
말았다 하고, 남송 초에 악가(岳珂)란 사람이 1232년에 겨우 남은 글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 <보진영광
집(寶晉英光集)>(8권)이다. <화사>를 제외한 책들이 대부분 사고전서에 포함돼 있다.
미술사에서 미불은 특히 장강(양자강) 일대의 산수를 그리며 비가 많고 안개가 낀 그 지역을 생생한
인상으로 묘사하여 표현해내고자 나중에 '미점법(米點法)'이라 불리는 화법을 창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먹이나 물감을 묽게 쓰는 이 발묵(潑墨)기법은 이후 명나라를 거치며 남종문인화의 화풍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양식적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미불을 소개하며 빠뜨릴 수 없는 일화가 한두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괴석(怪石)을 애호한
그의 남다른 취미로, "미불이 돌에 절하다[米芾拜石]"란 말이 생겼으며 그림으로도 남아 전해오고 있다.
게다가 이 때문에 '미전(米顚:들까불이 미불)'이란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이 말은 중국측에선 주로 '米
전[病부+顚]'이라고 소개되는데, '미치광이 미불', 정신나간 사람처럼 행동이 이상한 이란 뜻이다. 허청
웨이 총기획, <중국을 말한다 11. 송> 244쪽 참조)
위 왼편은 <삼재도회(三才圖會)>(명 王圻 저)에 실린 미불 초상이며 우측은 '百度百科' 사이트에
소개된 초상이다. 아래 왼편은 소주(蘇州)에 전하는 석각상, 우측은 현대중국화의 거장 이가염이
그린 <미불배석도>이다. 조선시대에도 이명기의 미불배석도 등이 전해온다.
아다시피 송나라 때는 사대부 계층이 자리를 잡으며 문인화 풍의 서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서체로는
주로 행초서 작품들이 많이 쓰였다. 이는 당나라 때의 서예가 "엄정한 법도를 좇고 이를 통해 우아한
서정을 풀어내는 풍격"을 중시했던 점과는 반대로 "서예를 통해 자아의 의지와 정취를 표현"코자 애썼던
결과라고 풀이된다. 말하자면 송대의 서예는 내면세계의 자유와 주관적인 정감을 드러내려는 것을 중시
함으로써 '상의(尙意:의를 숭상함)'의 서풍을 특징으로 한다는 말이다. 또 옛사람의 서체만 모방하고
자신만의 서체를 이뤄내지 못하면 그건 '노서(奴書:노예의 글씨)'라고 폄하되곤 하였다 (임태승, <
인물로 읽는 중국서예의 역사> 참조).
송나라 때는 서예가 과거시험 과목이 되면서 서예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미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
가지로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왕희지(王羲之:321-79년 혹은 303-61년)를 극력 연구한 끝에 서도(
書道)를 얻어 자신만의 서체를 지니게 되었다. 미불체를 직접 보자. 아래 좌측은 <촉소첩>, 우측은 <
다경루시첩(多景樓詩帖)>(상해박물관) 사진이다.
전마(戰馬)가 돌진하는 듯하고(소식) 쾌검(快劍)을 찍어내리는 듯한(황정견) 느낌을 주는 미불의 서체는
그 자신의 말로 황제 앞에서 '쇄자(刷字)'라고 표현한 바 있었다. 쇄자란 글자를 씻어내리듯 쓴다는
말이다. 그의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입신의 경지에서 노니는 듯한 자유로움과 멈출 줄 모르는 경쾌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글씨에서 기법을 매우 중요시하였음에도 그 자신 글씨란 "자연스럽게 형체를 이루
어야지 작위로 조탁해서는 안 된다[貴形不貴苦]"는 말을 하였다. 서예사에서는 이런 그만의 풍격을 두고
'미서(米書)', '미법(米法)'이라 부르며, 그의 독특한 예술적 경지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
된다.
그러면 미불의 서예 공부 과정은 어땠을까? 청나라 때 옹방강은 미불의 연보인 <미해악연보(米海岳
年譜)>를 지었는데, 이에 의하면 1084년에 소식을 처음 만난 뒤로 진나라 글씨를 진지하게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첨 만난 해는 최근 이보다 2년 전, 혹은 2년 뒤라는 연구도 보인다. 추사 또한 옹방강을
만난 뒤 이 저술을 알고 미불에 대하여 새로이 관심을 가졌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아래는 1855년의
청나라 간본 모습임)
그 이전에는 당시에도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 소년 시절에 당나라 서예가인 안진경(顔眞
卿:709-785년. 魯郡公에 봉해져 '顔魯公'이라 불림)의 글씨를 임모하는 것으로 서예공부를 시작
하였다고 말한다. 안진경의 서예는 성당(盛唐)에서 중당(中唐)에 이르는 당나라의 번성과 안녹산의
난 등 사회적 혼란을 대변하면서 흔히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杜甫)와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
이었다고 평가되며, 당시까지 서예술의 집대성이라 평가된다(소식). 아무리 왕희지의 글씨가 유명
했어도 이미 당나라의 유학자 한유(韓愈:768-824년)가 <석고가(石鼓歌)>(811년. 이 시는 <고문진보>에
실려 후대에도 널리 읽히게 되었음)에서 "왕희지의 속된 글씨는 아리따운 자태만 쫓는다[羲之俗書趁
姿媚]"고 폄하했던 데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유가의 미학에서는 송나라 때도 안진경의 인품과 함께
글씨도 선호되고 높이 평가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가운데 미불이 소식을 만나 진나라 글씨에 매진하게
되면서 자신의 서재도 '보진재(寶晉齋)'라 부르며 다른 미적 취향을 추구하게 되었다. 소식은 풍부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서권기(書卷氣)가 드러나 보이면서도 틀을 벗어난 서체를 지님으로써 '서선(
書仙)'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5살 위인 소식과 미불의 교류는 아래 그림에서도 보겠지만 많은 일화와 이야기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당태종이 이미 왕희지의 진적들을 자기 무덤인 소릉에 함께 매장케 했던 뒤로, 미불의 시대에는 "왕희
지의 진서는 오늘날 세상에 없다[今世無右軍眞字]"(<서사>)고 말할 만큼 진적에 근사한 모본의 감식
문제가 중요하였다. 송나라 황실에서도 이미 비슷한 일을 하였다. 하지만 이번엔 위진(魏晉) 시기의
역대 대표적인 법첩들을 대추나무 목판에 새긴 것이었다. 이것이 법첩의 비조라 불리는 <순화각첩(淳化
閣帖)>(10권. 992년)이다. 물론 이 서첩은 미불이 보기에도 문제가 많다고 평가하였지만, 이후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행초서의 유행과 함께 첩학(帖學)이 널리 성행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미불은
당시에 전래되던 모든 진적들을 거의 다 보았다고 말해질 정도로(저술에서 말한 작품수는 총 330점
이라고 함) 높은 감식안을 가지게 되었고, 수많은 서체를 그 자신이 거듭하여 임모하기도 하였다(<보진
재법첩>). 미불에게 관심의 중점은 역시 이왕(二王:왕희지와 그의 막내아들 王獻之)에 있었다. 여러
일화 중에서도 영종의 부마였던 왕선(王詵:1048-1104년)이 미불이 모사한 왕헌지의 글씨를 진적으로
잘못 알고 바꿔서 가져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미불은 개인적으로 왕헌지의 초서를 더 높이
평가하여, "왕헌지의 천진함은 초일하다. 어찌 그의 아버지가 비교될 수 있겠는가![子敬天眞超逸 豈父
可比也]"(자경은 왕헌지의 자임)라고 한 적이 있다.
미불의 이런 서예이론들은 서예사적 접근을 통한 지식체계의 형성이라는 면과 서예미학의 주요개념을
예술적 가치로 천명하였다는 점으로 요약될 것이다(위의 레더로제 참조). 미불은 서예의 실천에 앞서
서예사에서의 감식과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서예의 학문적이고 지적인 면을 강조하였고,
서예미에서는 초일, 평담 (平淡), 천진이라는 개념을 가장 높이 샀다. 헌데 이런 관점은 이왕 등 동진(
東晉)의 대가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당나라의 대가들에겐 미흡한 기준일 수 있다. 그래서 안진경의
<쟁좌위고(爭座位稿)>를 최고작이라 치면서도 "안진경과 유공권(柳公權:778-865년)의 비틀거리는
작품은 당말의 추악하고 이상한 글씨 습관에 근본이 있다"고 폄하하거나 안진경 해서에서 보이는 노획
(努劃:세로획)과 책획(책劃:파책)의 톱니모양 같은 특별한 운필법을 '도척(挑척:발부리에 걸림)'이라
부르며 너무 자주 사용한다고 흠을 잡았다. 이런 심한 평가의 결과 "왕희지 전통의 라이벌인 안진경
전통의 힘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고 말해질 정도였다.
여기서 잠깐! 장차 '육조' 이야기를 해야 하니 혼란스런 나라이름을 먼저 도표로 눈여겨 봐두자.(아래
표는 Naver에 오른 두산백과사전 그림임을 밝혀둠)
중국 강남의 인문정신을 말할 때 흔히 그 뿌리로 육조(六朝)를 말하는데, 육조란 삼국시대부터 남북조
시대까지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그 양자강 주변에 도읍을 뒀던 오(吳), 동진, 송(宋), 제(齊), 양(梁), 진
(陳)의 여섯 나라를 말한다. 4세기 초에 흉노나 선비족 등 오호(五胡)의 오랑캐가 북쪽에서 내려와
중원을 차지하자 한족이 세운 서진(西晉)왕조가 건강(建康:지금의 南京)으로 천도하여 동진을 세우면서
한족의 강남 시대가 새로 시작되었고 6세기 말에 수나라가 다시 통일할 때까지 이어졌다. 육조는 귀족
정치를 꽃피워 나갔고, 역사상 이들 귀족만큼 '낭만'을 즐긴 지배층도 없었다고 일컬어진다(이런 강남
문화의 역사기행서로 추천할 만한 책으로는 박한제, <강남의 낭만과 비극>, 2003년).
미불 이야기를 계속하자.
동진의 왕희지가 353년(永和 9년) 회계(會稽:현재 소흥) 산음(山陰)현의 난정(蘭亭)에서 모두 42명의
명사들과 함께 3월 삼짓날 수계사(修계事:흐르는 물에 상서롭지 못한 것을 씻어 몸을 맑게 하는 행사)를
하며 유상곡수(流觴曲水:구불구불 흐르는 물에 술잔을 흘려보냄)의 시회를 하고 <난정서(蘭亭序)>라는
불후의 작품을 써서 남기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불 역시 1087년 변량(汴梁:북송의 수도로 현재의 開封)에 있던 부마 왕선의 정원인 서원(西園)에서 소식, 소철, 황정견, 이공린(李公麟:1049-1106년), 장뢰(張耒), 진관(秦觀) 등 16인의 예술가들이 아회(雅會)를 열었던 데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름하여 '서원
아집(西園雅集)'이다. 이때 화가였던 이공린이 그림을 그린 것이 그 유명한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이며, 미불은 거기에 기(記)를 지어 남겼다. 하지만 이공린의 그림은 지금 전하지 않고, 대신 가장 오랜
것이 남송대의 마원(馬遠)이 그린 <서원아집도>(미국 넬슨미술관 소장)라고 하며, 명대로 내려와 구영
(仇英)이 그린 <서원아집도>도 유명하다.
위는 마원의 아집도이고 아래는 구영의 아집도와 조맹부가 모사해 그렸다는 그림 사진이다.
아래는 현대 중국화거장 장대천(張大千)의 아집도이며, 오른편은 위의 아집도들에서 따온 미불의 캐리
커쳐 모습이다.
그런데 미불이 지은 <서원아집도기>라는 기문은 문집에는 실리지 못했고 나중에 편집된 문헌들에
나오는 글이다. 나중에 이같은 그림들이 가능하게 된 것도 이 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불은 이
아회에서 사람마다 뭘 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묘사해 놓았다. 그 자신은 "탕건에 심의를 입고서 머리를
쳐들어 바위에 글씨를 쓰는 자가 미원장이다[唐巾深衣 昂首而题石者 爲米元章]"라고 설명하였다.
아래는 중국 사이트 검색에서 보이는 이 미불서이나 진본인지는 확실치 않다.(참고로, 서원아집도에
대해서는 워낙 말이 많으며, 애당초 그런 모임이 실제로는 없었고 단지 상상 속의 일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므로 함께 적어둠)
이 아집도 기문과 마찬가지인 것이 이제 말해야 할 자하 시에서 추사가 썼다는 미불의 시이다.
"삼협의 강물 소리 붓 밑에서 흐르고, 육조의 돛 그림자 술단지 앞에 떨어지네"라는 시구는 바로 미불이
지었다고 전하는 <망해루(望海樓)>라는 시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이 시도 그의 문집인 <보진영광집>
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문집의 권2부터 권5까지가 시 작품들로, 꽤 많은 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나중에 송시를 모아 편집한 <송시초(宋詩鈔)>(吳之振 편) 같은 책들에서 보인다. 하지만 국내의 중국
문학서들에선 송시를 말하면서 미불을 언급해놓은 책은 단 하나도 찾아보지 못하였다. 심지어 송시사나
송시선 같은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불의 시문학이 여타의 유명 시인들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학자들의 편의를 쫓는 편식이 심해 보였다. 여기서는 사고전서에 실린 <송시초> 권27에서
원문을 찾아 전문을 소개하며 번역하였다. 제목의 '망해루'는 장강(長江:揚子江) 하류지역의 바다가
바라보이는 누라는 말이다. 자하의 시와 마찬가지로 7언율시이다.
雲間鐵瓮近青天 구름 사이 철옹성은 푸른 하늘에 가깝고
縹緲飛樓百尺連 아스라이 날아갈 듯한 누각들 백 척 높이에 연이어 있네.
三峽江聲流筆底 삼협의 강물소리 붓 밑에서 흐르고
六朝帆影落樽前 육조의 돛 그림자 술단지 앞에 떨어지네.
幾番畫角催紅日 화각 소리 몇 번이나 붉은 해를 재촉하건만
無事滄洲起白煙 일 없는 푸르른 물가에는 흰 연기만 일어나네.
忽憶賞心何處是 문득 즐겁고 기쁜 마음에 어디가 또 이랬을까 생각하니
春風秋月兩茫然 봄날의 바람이나 가을날 달빛이 다 아득하기만 하네.
추사가 인용한 것은 제2연이다. 망해루의 위치를 알려주는 말이 '철옹성(鐵甕城: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한 성)'이란 말이다. 처음 수련에서는 밖에서 망해루를 쳐다보며 묘사하였고, 함련에서는 누 안에
앉아 술을 들며 시화(詩畵)의 흥취에 젖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경련에서는 시간과 공간 감각을 소리와
색채를 곁들여 표현하였으며, 마지막 미련에서는 다시 내면의 정조가 '망연함'으로 급변하며 마무리
지었다. 기승전결이 분명한 율시의 미가 잘 드러난 시이다. '화각(畫角)'이란 고대의 관악기로서 대나무
통으로 가늘게 만들어 끝을 크게 하고 겉에 채색을 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애려(哀려:처량하고 날카로움)하고 고항(高亢:소리가 높고 셈)한 소리가 난다고 한다. 주로 예전 군대에서 아침
저녁으로 시간을 알리거나 사기를 진작하고 군용(軍容)을 단속할 때 사용하였다고 한다.
특히 함련은 미불이 망해루에서 느낀 정취를 표현한 핵심적인 내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양자강
상류의 삼협을 떠올리며 강물소리를 끌어오고, 지나간 역사 속에 강을 오가며 번성하였던 강남 6나라의
정취를 돛 그림자에 빗대어 술잔을 드는 호쾌한 모습과 겹쳐 놓았다. 미불 스스로 젊은시절 강남 일대를
관리로 돌아다니며 스스로 강남사람이라고 일컬었고 동진 시대 왕희지 등의 필적을 찾으며 추구하였던
기호벽을 여기서도 살펴볼 수 있으니만큼, 가히 '미전'이라는 별명이 어울려 보일 정도로 기막힌 표현이
아닐 수 없어 보인다. 미불의 이 시를 택하여 추사가 바로 이 구절을 따온 이유를 여기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망해루는 실제 어디에 있었던가? 지금도 있을까?
국내에 출판된 중국기행서들을 뒤져 보았으나 망해루를 언급한 곳은 없었다. 인터넷 검색에서는
양자강 북쪽인 강소성 태주(泰州)시에 망해루가 있다고 사진까지 보였다. 처음 이 망해루를 찾아놓고는
이것이겠거니 하고 당연시했었지만, 글을 쓰며 자세히 보니 이 망해루는 아니었다. 2006년에 새로 중건
하였다는 태주시의 망해루 모습은 아래와 같다. 앞의 호수처럼 보이는 것은 예전 태주성을 감싸던 해자
수로였다. 하지만 이 망해루는 아니다.
이 망해루가 처음 지어진 것이 남송 때인 1229년이고, 마침 창건 777주년을 맞이하며 중건하였다고
하지만 그때는 미불이 이미 타계한 뒤였다. 아마 이 망해루를 소개하면서 미불의 시도 함께 소개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착각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미불의 <망해루> 시는 마침 2003년 상해의
가오카오(高考:중국의 대입수능시험)에도 출제될 만큼 중국인들에게는 많이 읽히는 유명시였음도
알게 되었다.
미불이 말하는 망해루는 바로 강소성 진강(鎭江)시에 있던 누였다.
진강은 남경보다 동북쪽의 하류로 굽도는 양자강 남안(南岸)에 위치하는 시이다. 맞은편 북안 쪽에는
양주(揚州)시가 있다. 지금은 망해루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은지 사진은 아무리 뒤져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잠시 지도를 통해 먼저 진강의 위치를 가늠해 보자. 아래는 양자강 하구 일대의 '구글지도'에서
보이는 진강의 위치다.
진강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보자. 양자강 구비의 남쪽에 자리한 진강시의 중심부 북쪽은 지형 때문에
모래톱이 드러나는 섬들로 둘러싸여 보인다. 원 안에 중간의 수로처럼 보이는 것 아래가 원래의 강안(江
岸)이며, 미불이 살았던 근 1000년이 되어가는 예전에는 섬이 없이 다 강물이었던 모양이다.
다시 문헌자료를 찾아볼 필요가 있었다. 진강이란 도성(都城)은 당나라 말기 남당(南唐) 때 지명이 만들
어졌다. 지리서 종류인 <명일통지(明一統志)>에는 진강 관아를 설명하면서 그 안에 있던 누각들로
4) 마지막 미련(尾聯)
다시금 문소각 뒷벽에 이르러보고는 再至聞韶閣後壁
'육조범영'의 정취에 망연자실하였네. 惘然帆影六朝情
※ 이하 계속 집필하며 고쳐서 다시 올릴 예정입니다. 양해하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나) 문소각이란 어떤 건물이었나?
첫댓글 신비로움을 더하는 문소각의 실체가 하나 하나 드러나는 듯 합니다. 훌륭한 글입니다!!
정선생님 대단하십니다^^ 알면 알수록 오리무중 같아요^^ 얼마나 더 나올까???
쌤~~안녕하세용~~ 잘지내시지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네요 감기조심하셔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시 한 수로 문사철을 꿰뚫으시는 도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아! 그간 몸이 불편하여 부진하였습니다! 이제 기력을 차려 하루속히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