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인들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사랑의 하나님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세상을 보면 갸우뚱해진다. 전지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인데 왜 이렇게 불평등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까? 3세기 마니는 이런 논리적 모순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만 사랑이 없던지, 사랑은 있지만 전지전능하지 못하던지, 전지전능하지 않고 사랑도 없던지 3가지 중 하나다. 전지전능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세상을 이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개신교인들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믿는 것을 탓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이 세상을 고통에 밀어 넣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국내 코로나19의 확산은 그릇된 신앙에서 비롯됐다. 같은 하나님을 따르면서 이단논쟁을 벌이는 것에 국민들은 관심 없다. 개신교 원로로 불리는 조용기 목사도 한때 이단의 딱지를 붙이고 살았다. 따라서 이단과 정통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하다. 코로나19 확산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거나, 교회에서 기도하면 코로나19가 치유된다고 떠드는 목사들은 이단을 넘어 사이코패스들이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전염병을 퍼트려 무차별적으로 목숨을 빼앗는 끔직한 일은 금수만도 못한 잔악무도한 일이다. 또 병이 신앙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목사들이 병원에 가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한다. 병에 걸리거나 낫지 못하는 것은 신앙심 부족일 테니 말이다.
코로나19는 정부의 노력과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국민적 운동으로 극복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코로나19가 교회를 통해 확산되면서 국민적 분노가 일고 있다. 교회에서 코로나19를 예방한다며 소금물을 뿌렸다 80명 가까운 사람들이 감염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도 많은 교회가 일요예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정부와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으면 못할 일이 없다. 전지전능함은 그 속에서 나온다. 제발 교회를 통한 코로라19 확산이 멈출 수 있도록 기도는 홀로 골방에서 마음껏 하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