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속의공간] ⑥ 아파트
닫혀있다 낯설고 적대적으로 굳게 닫혀있다
오늘날 아파트는 주거의 특수한 형태라기보다는 보편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아파트가 이 땅에 처음 도입된 것은 불과 수십 년 전이었으나, 이제 그것은 다른 모든 형태의 주거지를 양과 질로 압도하면서 `집' 그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허름한 산동네와 도시 근교의 논과 밭, 바닷물을 막아 확보한 간척지에까지 마치 경주라도 하듯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그뿐인가. 오래 된 저층 아파트는 빼곡한 고층 아파트로 속속 변신한다. 어느새 이 나라는 아파트 공화국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럴 만한 까닭이 없지는 않다. 인구에 비해 좁은 땅덩어리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 현대인의 생활 방식에 맞추어 편리하게 설계된 안팎 구조 등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시인과 소설가들은 아파트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들에게 아파트는 소시민적 욕망과 이기주의, 또는 비인간적 단절과 폐쇄성의 상징으로 파악된다. 최인호가 1970년대 초에 발표한 단편 <타인의 방>에서 주인공 `그'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매우 낯설고도 적대적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한다. 일주일간의 출장에서 매우 피로한 심신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한 것은 아내가 집을 나간 채 비어 있는 아파트이다. 아내가 부재하는 공간에서 그는 방안의 물건들이 자신을 상대로 일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본다.
“크레용들이 허공을 난다. 옷장 속의 옷들이 펄럭이면서 춤을 춘다. 혁대가 물뱀처럼 꿈틀거린다. 용감한 녀석들은 감히 다가와 그의 얼굴을 슬쩍슬쩍 건드려 보기도 하였다. 조심해 조심해. 성냥갑 속에서 성냥개비가 중얼거린다.”
사태가 이 지경으로까지 발전하기 전에 작은 `사건'이 있었다.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자 그는 현관 문을 마구 두드린다. 그 소리에 놀란 이웃들이 문을 열고 나와 그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자신이 집 주인임을 밝히는 그에게 한 사내가 말한다. “우리는 이 아파트에 거의 삼 년 동안 살아왔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소.”
이동하의 단편 <문 앞에서>의 주인공은 먼 지방에 있는 직장에서 한달여 만에 집에 돌아오지만, 아내가 출타한 아파트 현관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제 몫의 열쇠도 없었던 주인공은, 마침 시골에서 올라온 늙은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과 식당, 쇼핑센터 등지로 하릴없이 배회한다. 소설은 두 부자가 어둠이 내린 어린이놀이터에서 안주인의 귀가를 기다리며 졸거나 잠에 떨어진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김혜순의 시 <남과 북>에서는 옆집 남자가 죽은 사실을 알면서도 “호수(號數)가 다르니까” 문상가지 않는 인물이 나온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도 삶과 죽음으로 완벽하게 갈라짐은 물론, 그 간극을 메우는 상징적인 행위라 할 문상조차도 거부되는 관계란 동족이면서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남과 북의 사이와도 같다는 인식이 엿보인다. 시인이 “그는 죽어서 1305호 관 속에 누워 있고/나는 살아서 1306호 관 속에 누워 있다”고 쓸 때, 그는 아파트의 삶을 죽음과 다름없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파트에서 하루 종일 지내다시피 하는 전업주부들은 어떻게든 이웃집 여자들과 교분을 트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곤 한다. 김형경의 단편 <담배 피우는 여자>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저'로 지칭되는 인물의 독백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화자는 담배를 끊지 못해 결국 죽음에 이르는 옆집 여자의 얘기를 들려준다. 아내의 흡연을 반대했던 남편은 아내를 심하게 구타하면서까지 담배를 끊게 만들고자 하지만, 아내는 좀체로 담배를 끊지 못한다. 남편의 구타를 피해 베란다를 넘어 옆집으로 오곤 하던 여자는 어느 날 역시 난간을 건너다가 7층 높이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죽고 만다. 자궁암 수술을 받은 여자가 담배 때문에 일찍 죽게 될까 봐 걱정했다는 남편의 말이 후일담처럼 덧붙여진다.
역시 독백 형식을 택한 하성란의 단편 <옆집 여자>는 표면적으로 매우 우호적인 옆집 여자에게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는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묘미는 화자인 주인공 여자의 현실 인식과 실제로 되어 가는 상황 사이의 괴리에 있다. 일종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은 소설의 끝에서, 상황이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 다음에야 옆집 여자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명희와 남편, 그리고 내 아들 성환이는 마치 한가족처럼 보입니다. 남편과 내 아이, 다른 물건들처럼 이번에도 돌려주지 않을 작정일까요?/명희, 저 낯선 여자가 누굽니까. 507호, 옆집 여잡니다.”
황지우의 근작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는 아파트를 무대로 한 시가 몇 편 들어 있다. 그 시들에서 아파트는 실패한 삶에 대한 회한과 자괴감이 부글거리는 공기족관(空氣族館)과도 같다.
“아침마다 머리맡에는 15층이 있다//이부자리에 엎드려 머리카락을 움켜쥐고,/이건 삶이 아냐/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어./속으로 울부짖는 나는/비닐 봉지 속의 금붕어를 생각하고 있었다/머리맡에는 `한겨레신문'이 놓여 있다//(…)//그거다/베란다에서 1미터만 걸어가면/아침마다 머리맡에는 15층이 있다”(<비닐 봉지 속의 금붕어>)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에서는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인물을 등장시켜 극도의 무력감과 자괴감을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 조금이라도 복수심을 갖고 있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천함보다야/무위도식배가 낫지 않겠는가!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하루종일,/격조 있게, 놀았다.”
그러나 의식이 족한 연후에야 예절을 안다고 했던가. 아파트에 대한 이 모든 비판과 반성도 그 아파트에 `입성'하고자 하는 서민들의 비원에 비하면 사치스러운 것이라고나 해야 할지 모른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각각 아파트로 인해 쫓겨난 철거민들의 슬픔과 분노를 연작 형식에 담은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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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속의공간] ⑥ 아파트
해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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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8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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