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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9일(산상변모주일)
베드로후서 1:12~21
말씀은 어두운 인생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저는 책을 읽다가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고 공감을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밥을 같이 먹는 것입니다. 밥을 같이 먹는 것은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는 가족들끼리도 하루 세끼 밥을 같이 먹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과 하루 세끼 밥을 같이 먹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밥을 같이 먹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밥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초청하면, 예수님께서는 나와 더불어 밥을 잡수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을 먹는 일입니다. 그 옛날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아모스 선지자는 인생에 닥친 근원적인 문제점은 육신을 즐겁게 하는 양식이나 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인 기근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사실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요즘처럼 우리나라 역사에 먹을 것이 풍성한 시대가 또 언제 있었습니까? 물론 오늘날에도 극한 가난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계신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은 육신의 양식은 풍족히 누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먹어서 건강의 위협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경고처럼, 이 시대는 영적인 양식이 없어 기근을 느끼는 영적인 위기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의 말처럼,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쪽, 저쪽을 비틀거리며 돌아다녀도 결국 얻지 못하고 다 갈하여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암 8:12~13).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시몬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우리가 주님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영생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표현대로라면, 예수님에게서 영적인 밥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베드로는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이 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는 이제 자기 죽음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과연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16절에 보면,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목소리라도 직접 들어온 일이 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이천 년의 시간 간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라나고, 갈릴리에서 사역하다가,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보고 나서야 그분의 말씀을 믿으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알기를 원한다면 오직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예수님과 직접 생활하였으며, 예수님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보았던 사도들의 증언을 참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베드로 사도가 “우리는 그의 크신 위험을 친히 본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그의 증언이 매우 권위 있고 최종적인 증언임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기도하다가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여러분의 체험이 과연 역사적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베드로의 체험과 똑같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역사적 예수의 크신 위엄을 친히 목격했던 사도들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받은 은혜와 체험이 사도들의 증언을 부정하거나, 사도들의 증언을 능가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보았다고 하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입니까? 그 내용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변화산 사건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모두 기록할 정도로 제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 몇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는데, 그 순간 구약의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구약의 선지자를 상징하는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시는 겁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성경에 보면, 이때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눅 9:33). 여러분도 살면서 그런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너무나 황홀한 꿈을 꾸었거나 광경을 목격했을 때, 자신이 한 말이 어떤 말인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했던 경험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황홀했던 경험도 잠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밀려오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눅 9:35).”
베드로가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자, 그동안 베드로의 눈을 사로잡았던 위인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습니다(막 9:8).
저는 이 사건에 특별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이는 성경을 읽으면서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에게 마음을 현혹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것은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약 5:17). 우리의 눈은 부족한 인간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에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신비한 현상에 마음을 현혹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너무나 영적이어서 이 세상의 현실을 외면하고 기도원에 올라가 신비한 은사나 체험들만을 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은사와 체험이 불필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체험은 사막같이 건조한 우리의 심령에 은혜의 물줄기를 내고, 바짝 마른 나무토막 같은 우리의 심령에 은혜의 불꽃을 튕겨줍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의 심령이 불붙게 하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삶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하지는 못합니다.
또 어떤 이는 초막 셋을 짓는 수고와 봉사에 마음을 현혹당하기도 합니다.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고자 합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도전이고 헌신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러한 베드로의 수고와 헌신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초막 셋을 짓는 수고와 봉사는 결국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만족을 위한 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했을 때 그 동기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하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동기에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과 마음을 현혹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물론 저는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동기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헌신하고 싶은 순수하고 간절한 동기로 출발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혹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동기로부터 출발한 헌신과 봉사라면 더 늦기 전에 여러분은 주님을 향해 올바른 동기부터 먼저 세우고 그다음에 헌신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베드로가 직접 보았고, 들었던 변화산 사건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한 음성으로 오늘 본문 중에서 17절과 18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과연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이십니다.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앞에 나타났던 여러 현상, 즉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고,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희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결국 다 사라질 것들이고 결국 남은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뿐이었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은 내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와의 친밀한 관계가 있는가가 신앙생활의 관건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라는 사실을 내가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체험이 불필요합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는 체험에 근거해서 이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체험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고백하는 신앙은 체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입니다.
19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우리에게 있는 더 확실한 예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20절에서 말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언젠가 베드로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의 체험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체험 너머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라는 증언은 베드로의 체험보다 더 중요합니다. 체험은 불확실하지만, 사도들의 증언을 기록한 성경은 체험보다 더 확실합니다.
성경은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과 같습니다. 언젠가 날이 새어 샛별이 우리의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주의하여 기억해야 할 진리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기록한 성경의 예언입니다.
여러분은 꿈이나 신비한 체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인 성경 말씀을 더욱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두운 인생을 밝히 비추는 등불이 성경임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샛별 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실 때까지 성경을 주의하여 읽기를 사모하십니까?
여러분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 날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죄의 세력을 이기고,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성령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성경은 꿈이나 체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요, 어두운 인생을 밝히는 마음의 등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주님 앞에 서기 전까지, 우리는 성경을 주의하여 읽어야 합니다. 성경 읽기를 통해 과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날마다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만나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우리의 주님이시오, 내 인생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날마다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본질은 결국 예수님과의 친밀한 만남입니다. 여러분의 눈과 마음을 현혹하는 것들은 결국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십시오. 예수님과 한 식탁에 앉아 삼시 세끼 꼬박꼬박 영적인 밥을 드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은 풍성함과 만족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의 인생에 영원토록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