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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78
11월13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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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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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_n4WeexxL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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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해루질을 해보니 은근 중독성이 있습니다. 쏟아져내리는 별들을 등에 이고, 광활한 밤바다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 다니다보면, 여기저기서 게나 물고기, 골뱅이나 소라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손에 넣기라도 하면 로또라도 당첨된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공적인 해루질의 관건은 뭐니뭐니해도 강력한 밝기의 랜턴에 달려있습니다. 평소 쓰던 랜턴이 빈약해서 새로 하나 장만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랜턴을 켜면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희미한 바닷물 속도 시원시원하게 보이니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밝기의 랜턴이었는데, 동녁에 해가 떠오르니, 즉시 별 것 아닌 초라한 존재로 전락해버리더군요. 강렬한 태양빛 앞에 가로등이나 랜턴 등 모든 빛이 존재감이나 가치를 상실해버렸습니다.
언젠가 사람의 아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세상과 인간을 심판하실 때,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날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시는 주님! 그분 자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분의 등장 앞에 다른 모든 존재나 대상들은 즉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마치 강렬한 태양 앞에 촛불 한 자루처럼 말입니다.
그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날 유일한 의미요 가치인 주님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잘 경청하고 실천했는가? 우리가 그분을 얼마나 빼닮았는가? 우리가 그분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바로 그것이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께서 과월절 날 밤에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밤은 심판이 시작되는 날, 그 밤에 주님께서 첫 단계로 하실 일이 악인들로부터 의인들을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의인들은 하느님께 봉헌될 것이며, 악인들은 영원한 지옥에 버려질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천국과 지옥, 갈림길의 기준에 대해서 루카 복음 사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복음 17장 34~35절)
무시무시한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묵상해봅니다. 예수님 말씀은 일종의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 영적인 삶, 하느님 중심의 삶은 뒷전인채, 오로지 은행 잔고 늘이는데만 전념하는 사람들을 향한 애끓는 경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심을 늘 염두에 두고, 현세의 삶도 최선을 다하지만, 또 다른 삶, 영적인 삶, 하느님 안에서의 삶에도 소홀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분 나라에서의 영원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빨리 사라질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쌓아올린 명예와 재산, 한평생 추구했던 자리와 학벌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은 그간 우리가 쌓아왔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작은 선행, 따뜻한 마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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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살아있는 ‘시체’가 안 되려면>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pAeS8m7El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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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심판, 혹은 죽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나 세상의 심판을 ‘사람의 아들의 날’이라고 칭하십니다. 아마 당신께서 ‘심판관’으로 우리 각자 앞에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어디에서 일어날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여기서 ‘시체’는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시체의 삶과 생명의 삶과의 차이점을 알고 결코 시체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체에게 독수리가 언제 내려와도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죽음 앞에서 시체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고 당황스러워할 것입니다.
1977년 4월 20일 대낮에 쇠망치로 장정 4명을 죽인 사건이 광주 무등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살인자는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던 ‘박흥숙’이었습니다. 박흥숙은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형도 안타까운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박흥숙은 중학교 수석 입학을 했지만, 외할머니,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둘을 책임져야 했던 작은 가장으로서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흥숙은 무등산 중턱에 작은 움막을 짓고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구청 철거 일용직 7명이 들이닥쳐 집을 부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까지 지르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다시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흥숙은 당시 23세였고 고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한 상태였습니다. 오갈 데 없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제발 불 만은 지르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을 짓지 말고 땅속으로 들어가 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을 질렀고 3년 동안 가정부를 하며 모아둔 어머니의 돈 30만 원까지 타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실신하였고 여동생은 반항했습니다. 박흥숙은 저들도 자신들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며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로하였습니다.
박흥숙은 아프신 할머니들이 사시는 다른 움막들엔 불을 지르지 말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차 없이 모든 움막에 불을 질렀습니다. 가난한 이웃이었던 노인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육박전으로 그들을 막았습니다. 박흥숙은 철거반원들 보고 노인들에게 사과하라고 했습니다. 철거반원들은 “법대로 하는데 사과는 무슨 사과야!”라며 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박흥숙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들이 들고 온 쇠망치로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철거를 지시했던 정부는 불을 지르도록 지시한 사실을 일절 밝히지 않게 하고 박흥숙을 남의 돈을 빼앗아 광주에 집을 세 채나 소유한 깡패로 묘사하도록 언론을 조작하였습니다. 박흥숙은 자신에게 피해를 본 이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잠잘 곳이 없어서 남의 집 화장실이나 처마 밑을 찾아본 사람만이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할 것이라 말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참조: ‘망치로 성인 4명을 때려 눕힌 무등산 타잔 박흥숙’, SBS NOW; 꼬꼬무 7화]
사실 그날 사망한 철거반원들도 박흥숙도 모두 시대의 피해자라 할 수 있습니다. 철거 반원들도 살기 위해 한 행위였습니다. 처음 박흥숙은 박해받는 사람으로서 죽어 있었으나 자신이 살아나서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죽어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나면 ‘시체’가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시체가 되면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 눈에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고, 세상에서 산 사람은 하느님 눈에는 시체입니다.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것 자체가 세상에서 죽는 유일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이 갑자기 다가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체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구약의 두 사례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의 홍수’이고 하나는 ‘소돔의 멸망’입니다.
노아는 홍수 때 홍수가 나자 노아는 침착했고 다른 이들은 당황했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침착할 수 있었을까요? 이미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언젠가 닥칠 것으로 예상하여 세상에서 죽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홍수가 들이닥칠 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또 하나는 소돔의 멸망 때입니다.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은 두 천사의 도움으로 소돔이 곧 멸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돔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 위에 유황불이 불타고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 것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세상 것을 섬기는 사람이 시체입니다. 시체에겐 심판이 도둑처럼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절대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체에게 독수리라는 죽음이 갑자기 내려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세상에서 죽읍시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고 말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죽음으로 보이나 우리에겐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하루에도 “나는 죽었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해보십시오. 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비로소 시체의 삶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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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26-37 :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때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옛날 노아와 롯의 때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 끝 날도 갑자기 닥칠 것이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으며,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27-28절), 노아 때에는 홍수가 닥쳐 한 가족 말고는 모두를 멸망시켰고, 롯 때에는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두 멸망하였다. 이는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방주를 짓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을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방주를 짓는 일 자체가 설교였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비웃었다. 오늘날도 그들을 본받는 자들은 믿지 않는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세워지고 있지만 그들은 역시 비웃고 있다. 홍수와 같은 심판이 그들을 위협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27절) 이 홍수는 믿는 이들에게는 세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도 돌로 비유하고 있다. 그 돌은 믿는 이들에게는 주춧돌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라고 하였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31절) 우리는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거기에 굴복하여 영적 삶에서 육적 삶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간 사람은 지난날을 뒤돌아보거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시련에도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돌아서지 마라.”(31절) 하느님의 말씀이 씨 뿌려져 영적인 열매를 갈망하고 덕성스러운 수고의 열매를 거두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변치 말고 부지런히 열매를 거두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고 하셨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절) 롯의 아내는 뒤를 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남편이 도와주었지만 뒤돌아보는 바람에 결국 산에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때에 두 사람이 전 생애를 함께 지내왔다 하더라도 하나는 선택을 받고 하나는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선한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해도 그 자신에게 과오가 있다면 버림을 받는다는 경고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37절) 믿음이 있는 곳에는 성체성사가 있고 거룩함이 머문다. 교회 안에서 세례의 은총으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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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신부님]
구약 성경이 전하는 노아의 방주나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모두 죄에 따른 심판으로 재앙을 묘사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생각과 일만을 일삼았고, 이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없애 버리시기로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때에 물로, 소돔에는 불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십니다. 두 이야기에 공통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위하여 재앙을 내리시지만 노아와 롯을 구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재앙 가운데서도 의로운 이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도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에 예고 없이 심판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디’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지 예수님께 여쭙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죄와 악이 가득한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사람들의 모습을 반복하여 묘사하는 오늘 말씀은 일상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에서 죄와 악을 피하고 선과 정의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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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의 아들의 날>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이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테살로니카 전서에 나옵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2-6) 노아 때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던 모습들은, 또 소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했던 모습들은, ‘평화롭다, 안전하다.’ 하면서 일상생활을 했던 모습들인데, 그 일상생활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을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것은 죄입니다. (노아 때 사람들이나 소돔 사람들이 일상생활 때문에 멸망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죄 속에서 살면서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대홍수를 일으키시기 전에 그 일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창세 7,4)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레가 지나면”이라고 예고하셨는데, 그 7일은 회개하라고 주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지시하실 때에 이미 대홍수를 예고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방주를 만드는 모습도 대홍수를 예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모든 예고를 무시했고, 회개하지 않았고, 무사태평하게 일상생활을 하다가 모두 멸망을 당했습니다.) 또 소돔의 멸망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예고하셨는데(창세 18,16-33), 아브라함이 소돔의 멸망을 막으려고 애쓴 것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예고를 소돔 쪽에 전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소돔 멸망 전날 밤에 롯을 찾아온 천사들은 소돔의 멸망을 롯에게
알려 주었고, 롯은 다시 그 일을 사위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창세 19,12-14) 그때 롯의 사위들은 롯이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생각했고, 롯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태도는 곧 소돔 사람들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어떻든 소돔의 멸망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미리 예고된 일이었고, 그 예고는 회개하라고 기회를 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멸망 예고를 무시했고, 죄 속에서 살던 대로 살다가 모두 멸망을 당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소중함을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신앙인은 ‘일상생활의 소중함’이 아니라 ‘회개의 중요함’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회개’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일상생활의 소중함만 생각하고 ‘삶의 변화’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것’은,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구원을 향해서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1-33)
이 말씀은, “세속의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만 집중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그날’이 된 뒤에 실행해도 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날’이 닥치기 전에, 즉 ‘지금’ 바로 실행해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세속의 재물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지 말고,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이 말씀은, “심판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회개는 각자 스스로 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심판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공평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일’입니다. 동시에 각 개인의 구원과 멸망은 각 개인별로 따로 심판함으로써 결정된다는 점에서 ‘개별적인 일’입니다. 심판이 보편적이라는 것은, 아무도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고, 어떤 특혜도 없고, 어떤 특권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심판이 개별적이라는 것은, 각 개인의 죄는 각 개인에게 물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멸망을 당할 때, 그 죄인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과 함께 멸망을 당하는 억울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회개한 의인이 구원을 받을 때, 그 의인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의인과 함께 구원을 얻는 불공평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죄’는 ‘나의 책임’입니다. 물론 어떤 죄에 대해서 ‘연대책임’을 묻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경우에도, 내가 짓지 않은 죄인데도 나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선과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은 죄’입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헤로데와 헤로디아,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에게 그 살인죄를 물으시겠지만,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고관들, 무관들, 유지들에게도(마르 6,21)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저희는 아무 일도 안 했습니다.”라고 항의할 텐데, 그들이 헤로데와 공범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살인이 행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일도 안 한 것’ 자체가 그들의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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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 전영준 바오로 신부님의 ‘영성신학’에 대한 글이 10회에 걸쳐 연재되고 있습니다. 영성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글을 보내주신 전영준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10월 18일 지면에는 ‘정화, 조명, 일치’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정화, 조명, 일치를 성서의 말씀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정화, 조명, 일치는 영성의 과정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고,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시편 34,15) 정화의 단계에서 악을 피하고, 조명의 단계에서 선을 행하고, 일치의 단계에서 평화를 찾게 된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정화의 단계에서 자신을 버리고, 조명의 단계에서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하며, 일치의 단계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향주삼덕(向主三德)을 통해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정화의 단계에서 믿음으로 악을 멀리하고, 조명의 단계에서 희망으로 덕행을 실천하며, 일치의 단계에서 사랑으로 선을 실천하다고 말합니다. 정화의 단계에서 믿음으로 악을 행하면 벌을 받을 것을 생각하여 악을 피하고, 조명의 단계에서 희망으로 선을 행하면 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육신과 세상의 쾌락을 피할 것이며, 일치의 단계에서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열정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정화, 조명, 일치의 단계를 운전면허 시험을 통해서 해석해 보았습니다. 정화는 필기시험과 같습니다. 교통법규를 이해해야 합니다. 교통신호를 이해해야 합니다. 교통법규와 신호를 모르고 운전하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자동차는 사용법을 알면 편리한 이동 수단이 되지만, 사용법을 모르면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조명은 실기시험과 같습니다. 수영은 이론만 알아서는 수영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직접 물속에 들어가서 해봐야 합니다.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감독관으로부터 검증을 받습니다. 신호의 준수, 법규의 준수, 주차능력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필기시험을 합격했어도 실기시험에서는 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치는 운전면허증과 같습니다. 실기시험에 합격하면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운전면허증은 자격을 주지만, 책임도 요구합니다. 교통법규를 어기거나, 신호를 어기면 벌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심각한 위반이면 운전면허가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운전면허증을 가진 사람은 늘 준법운전, 안전운전, 양보운전을 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계명을 잘 지키는 분들은 준법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권하는 교육, 피정에 열심히 참석하고 선을 행하는 분들은 안전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하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분들은 양보운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가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이야기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 수행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달았으면 더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 돈오돈수입니다. 깨달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더 이어가는 것이 돈오점수입니다. 정화, 조명, 일치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날 일치의 단계를 체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돈오점수의 삶이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고백록에서 “주여, 당신 위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함이 좋사오니 내가 그 안에 있지 아니하면 잠깐이라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의 여정은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일치의 삶을 사는 길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돈오점수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밭’에 하느님께서는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지구라는 별’입니다. 지구라는 넓은 밭에 ‘보물’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랑은 같은 말 같습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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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야기>
루카 17,26-37 (사람의 아들의 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이야기>
아득히 먼 옛날부터
알 수 없는 마지막 날까지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온 누리에 넘쳐나는데
그 이야기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크게 둘로 나뉘는 거야
나의 이야기 아니면
남의 이야기
나에게 하는 이야기 아니면
남에게 하는 이야기
나의 것으로 삼고픈 이야기 아니면
남에게 돌리고픈 이야기
대개 사람들이란 이기적이라서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속으로는 말이지
기쁜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축복 가득한 이야기들은
제 것처럼 여기고
슬픈 이야기
불행한 이야기
추악한 이야기
저주스러운 이야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듯하지만
사실
때와 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머무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나의 이야기도 아니고
남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인거거든
그러니 말이야
쓰면 뱉고 달면 삼키듯이
이야기 가운데 무언가를
취사선택하지 말고
모든 이야기들을
삶의 양식으로 받아먹어야 해
그러다 보면
좀 더 참다워지고
좀 더 착해지고
좀 더 아름다워지고
좀 더 사람다워지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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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겪게 될 재앙을 미리 예고하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날에 아무런 준비 없이 먹고 마시며 흥청망청 지내던 이들이 맞이한 무서운 재앙을 이제 유다인들이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역사적으로 주후 70년경에 유다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짓밟혀 참혹한 재앙을 맞고 예루살렘 성전마저 파괴되는 아픔을 겪고 맙니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무너진 성전의 서쪽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며 그곳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탄원의 기도를 올립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까요? 인류의 역사상 전쟁과 폭력이 멈춘 적이 없지만, 과학자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인간의 탐욕과 자만이 불러온 환경 파괴로 말미암은 갑작스러운 홍수, 태풍, 폭염과 지진 등과 같은 자연 재앙이 미래의 현실적인 종말의 두려움을 키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 내가 맞이하게 될 개인적인 종말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을 마치는 순간이 곧 내가 사는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과연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마주 뵐 수 있을까요?
요한 사도는 종말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을 마주 뵙는 순간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문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맞이하게 될 종말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계명을 지키고 날마다 사랑하며 살다 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마주 뵐 종말의 날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날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기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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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님]
<종말론적 삶>
저와 함께 종신서원을 했던 수사님의 서원식 소감 한마디가 떠오릅니다. “수도생활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제 입에서 나오는 마지막 말이 예수 그리스도이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가 다 울컥했지요.
삶의 마지막 순간이 아직 한참 멀었다고 느껴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실상 우리는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을 잊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소중하게 살아간다면 죽음 속에 감추어진 신비를 사는 셈입니다.
세상과 개인의 종말에 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주검이 모여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라며 죽은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참된 생명을 살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일상 속에서 인간의 욕심과 중상, 싸움만 있는 곳이 곧 멸망일 테고 하느님의 현존이 함께하시는 곳이 곧 구원일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심고, 팔고, 집 짓는 일상의 일들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이는 종말론적 삶의 자세를 갖고 사는 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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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해성사 보속이 아주 특이한 어느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보속을 주신다고 합니다. “시장에 한 시간 동안 있으십시오. 병원에 1시간 동안 돌아보고 오십시오. 공동묘지에 한 시간만 앉았다 오세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 1시간만 봉사해 보세요. 장애인 집에 가서 1시간 동안 봉사하십시오.” 등등의 보속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에게 이런 보속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 주는 보속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자리에서 만족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장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한 것만은 아닙니다. 힘든 삶 안에서도 커다란 행복으로 기쁨을 외치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를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앞선 신부님의 보속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만을 바라보면 힘듦의 기준을 제대로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을 먼저 바라보고 또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갑작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십니다. 그때를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길을 제시해주십니다. 노아의 홍수,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이야기하시면서 심판 날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옥상에 있는 이는 아래로 내려가지 말라는 것은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입니다.(집 안에 있는 세간을 챙기러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두지 말라는 것)
들에 있는 이들은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씨 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계속하며 손에서 쟁기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고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여자는 자기 재산이 다 타 버린 소돔을 돌아다보았다가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영적인 삶에 집중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라는 것, 그리고 세상 것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만을 기준으로 내세우면 그 말씀이 와닿을 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사건, 그 밖에 성경에서 언급된 모든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이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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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 따라가기>
현재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는 친구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퇴직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겨우 50이 넘었는데, 벌써 퇴직 준비를 해?”
“요즘에는 40대 말이나, 50대 초가 되면 눈치껏 퇴직을 해야 해. 그래서 ‘사오정’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래도 아직 퇴직하기에는 너무 젊지 않냐고 묻자,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어서 나이가 들수록 따라갈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 ‘노땅’소리를 듣는다고 하더군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은퇴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를 보면서, 교회 역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하셨지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시대에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렇게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데 교회 안에서 우리는 어떤가요?
더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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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에 초점을 맞추었고,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곳에서’ 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아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 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미련을 갖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최양업 토마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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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품위 있고 행복한 삶과 죽음>
-기도와 회개, 깨어있음의 은총-
아주 예전 목사님과의 간단히 주고 받은 대화 내용이 거의 20여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지금 물어도 이 대답일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품위있고 행복한 삶과 죽음입니다. 대부분 산대로 죽습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남은 위령성월의 날들, 하루하루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도록 늘 기도와 더불어 회개하며 깨어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깨어 맑은 정신으로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요, 참으로 불행한 이들은 준비없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일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보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바오로 사도의 윗 말씀은 품위있고 행복한 삶과 죽음을 위해 최고의 처방전 말씀입니다. 아마 제가 가장 많이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써드렸을 것입니다. 어제도 하루 단체 피정온 본당 자모회 6분 자매들에게 써드린 처방전 말씀입니다. 여기에 “웃어요!”라는 스탬프도 찍어 드렸습니다.
시간이 되기에 역시 성호경을 바친후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서 성화聖畫같은 사진도 찍어 드렸고 사진과 더불어 나눈 “사진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사세요! 사랑하는 성녀聖女, --- 자매님!” 비슷한 내용의 카톡 메시지입니다. 어느 자매의 다음 답신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찬미 예수님, 인자하신 신부님 뵈니 맘이 편해지고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수도원 피정 특별한 은총과 기쁨으로 채워 주신 자애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께 찬미영광드립니다.”
요즘 만나는 형제자매들에게 드릴 메시지가 있으면 저는 의도적으로 ‘사랑하는 성인聖人---형제님!’ 또는 ‘사랑하는 성녀聖女---자매님!’ 꼭 잊지 않고 써 드립니다. 사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보면 모두가 성인성녀같다는 생각도 들고 모두가 성인성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원도 지닙니다.
정말 성인성녀처럼 깨어 사랑하면서 맑고 향기롭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살아감이 최고의 선종의 죽음 준비도 될 것입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행복한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실감나는 장면 역시 회개하며 깨어 살아야 하겠다는 경각심을 줍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나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아, 이런 준비없이 갑자기 닥친 죽음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무하고 불행하겠는지요. 예나 이제나 계속 반복되는 무지한 사람들의 현실이 아닙니까? 전혀 영혼을 돌보지 않고 육적 욕망에 눈먼 삶을 살다가 갑자기 닥친 불행한 죽음들이요, 오늘날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회개와 즉시 주님과 함께 앞으로 가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방심으로 과거의 것들에 미련을 두고 집착하여 뒤돌아 보는 순간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버리고 떠나는 회개와 탈출의 삶에 과감, 신속하라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은 현실도 내적 삶은 판이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하여 천국을 사는 이도 있고, 냉담으로 지옥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다음 복음이 이를 입증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내인생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좋고 아름다운 외적 환경이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지체없는 회개가 구원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뜻밖의 사고나 죽음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기도와 회개를 통한 깨어 있는 삶의 은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을 제1독서 요한 2서가 줍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의 방향 전환의 회개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너의 행복은 나의 행복입니다. 참으로 중요하고 실질적인 것이 가까이 있는 이웃 형제자매들을 깨어 살피고 아끼고 친절히 대하며 행복하게 해주는 사랑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보내 준 선물이 가까이 만나는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사가의 다음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않고 충만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도 우리 모두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아버지와 아드님을 모시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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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맞는 우리의 자세를 이야기하십니다.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6)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8)
예수님께서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도 그 때와 그 시간을 모른다는 전제에서 말씀하시지요. 노아 때, 그리고 롯 때에 세상에는 극소수의 의인이, 악에게 휩쓸린 대다수의 사람들 틈에서 제 방향을 고수한 채 분투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노아나 롯은 어려움 중에서도 그 경외심을 부여잡고 살았지요. 악을 일삼는 이들은 제 멋대로 욕망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멸망이 닥친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 내려가지 말고, ... 들에 있는 이도 뒤를 돌아서지 마라."(루카 17,31)
예수님께서 당부하십니다. 두고 온 재산이나 뒤에 남은 것들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의미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살아온 지향과 방향성, 품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라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진작부터 살아온 그 모습 그대로 그날을 맞이할 테니까요.
제1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적들이 흘리는 교설에 흔들리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2요한 5)
이미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새로운 무엇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셨고, 행하라 명하신 사랑의 계명,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주님께서 떠나시고, 박해가 닥치고, 반대자와 이단 교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해서 간직해 온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2요한 9)
신앙은 연속성 안에서 성장합니다. 영혼은 처음 불리웠을 때 받은 그 사랑을 간직하면서 더 깊고 풍부하게 자라나지요. 악은 한 영혼이 하느님과 더 친밀히 결속되는 것을 방해하려 속이는 자들을 앞세웁니다. 아직 어리고 여린 이들의 빈틈을 파고들어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그대로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어떤 파도가 닥쳐도 헷갈리지 않습니다. 설령 "그날"이 닥친다 해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그 날, 그 때가 닥친 순간까지 살아온 모습 그대로 구원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 지상에서 구원을 앞당겨 살아온 이는 거대한 연속성 안에서 진정한 구원으로 유연히 건너갈 것입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우리는 서로 참 다릅니다. 태생과 역사와 배경, 취향과 흥미와 성향 등등, 그리스도인이라는 공통점 안에서조차 엄청나게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지요. 주님은 분명 자비하시지만 우리 각자가 맞이할 구원은 개별적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각자 삶에서 자신이 고수하고 머무른 모습이 연속성을 타고 구원으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맘껏 탐하고 즐기며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겠다는 욕심은 말 그대로 허욕이 되겠지요. 살아서 주님을 기쁘게 찬미한 이는 그 기쁨과 찬미의 완성을 누릴 것입니다. 살아서 베풀고 나눈 이는 그 나눔과 베풂의 절정 안에서 더없이 행복하겠지요. 이처럼 여한없이 사랑한 이는 마지막 때에 내려갈 필요도, 뒤로 돌아설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여태까지 걸온 그대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 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주님의 날"인듯 미련이 남지 않게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모습을 주님께서 아시니, 그분은 한눈에 우리를 알아보시고 기뻐 뛰며 맞아 주실 겁니다. 그날이 우리에게 최고의 날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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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기도와 명상과 관상은 쉽게 말하면 멍때리기이다
“시간이 정지해 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시간의 법칙이 적용 안 되고 신비스런 순간의 경험을 해본 적이있을 것이다. 예컨대, 고되게 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 해변에서 눈앞에 거대한 파도가 부서질 때,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을 때, 사랑에 빠졌을 때, 그런 순간에 미래의 계획과 현재의 걱정과 과거의 기억이 그 의미를 잃는다. -「안녕하세요, 시간입니다」에서
♣ 예를 든 것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들’이기에 그렇고 기도와 명상과 관상기도가 모두 시간이 정지해 버린 경험이 되면 바로 시간을 영위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럼으로 기도와 명상과 관상은 시간이 정지된 멍때리기입니다.
예컨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런 순간에 미래의 계획과 현재의 걱정과 과거의 기억이 그 의미를 잃습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기도, 명상, 관상의 경우와 같습니다. 성경에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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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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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의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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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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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30)
<사람의 아들의 날!>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일어나는 '심판과 징벌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리스도의 적으로 산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의 때와 롯 시대 때 일어났던 일들인 '징벌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이 우리가 예상하지도 못한 때에 갑자기 찾아오고, 우리가 먹고 마시는 평범한 일상의 삶속에서 예고없이 찾아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러니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고, 평범한 일상의 삶에 성실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인 요한 2서의 말씀은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깨어 준비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이는 자', '그리스도의 적'으로 살아가서는 안 되고,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인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화답송 후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복음 환호송)
오늘 하루를 선물로 주시어 죽지 않고 살게 해주신 하느님께 먼저 감사드리고, 이 감사 속에서 하루의 평범한 일상에 나의 성실을 담아봅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지나가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소중한 이 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 오늘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잘 준비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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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_3KijsdaL8&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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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 32)
낙엽도
길을 떠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떠나는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하느님을
향해
있어야 할
우리 마음이
다른 것들에
많이 빼앗겨
있다.
내려놓지
못하기에
떠날 수 없는
우리들이다.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우리들이다.
떠나는 길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무엇을 섬기며
살고 있는 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생명의 주인께
돌아가야 할
우리들 여정이다.
롯의 아내같이
무너져내리는
소돔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임을
기억하는 은총의
위령성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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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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