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흘리는 나무 외 1편
길상호
수목장엔
철쭉이 피었었나 봅니다
비가 내려서
바닥이 다 투명한 꽃
가발을 벗은 봄이
희죽희죽 웃습니다
밤이 오면
옆자리 뼈하고 손을 잡고 다닌다고
불을 지나 꽃을 지나
비를 흠뻑 맞고서
그녀가 다가옵니다
감정 표현을 못해
이름이 대신 철쭉을 쓰다듬습니다
상복을 모두 벗은 나무들
푸르러질 수 있을까요
수목장엔
흰 꽃 천지입니다
밤바치*
겹겹 안개에게 기도하는 동네가 있다네
돌을 넘겨 가재를 읽고 바닥을 읽고
물을 다 읽고 나면 여길 나가야지
고립을 기르다가 고립이 제 덩치보다 커지면
훌쩍 산길이 혼자 뜀박질도 하는 동네가 있다네
목이 쉬어 저녁은 오고
밤하늘 갈아 씨 뿌리는 하나님이 있다네
다래 순으로 음악을 짓던 곳
기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여 회의를 하는 곳
안건은 풀이 되기도 하고 물이 되기도 하고
문 닫은 분교 운동장만 철봉을 하네
비가 이장을 맡은 동네 있다네
이곳저곳 비느라 사람들 등은 굽고
하나님도 주름을 보이며 눈부시게 웃는
주소도 아득한 동네
한번 들어간 시내버스는 보이질 않네
*강원도 홍천군 내면 살둔마을에 위치함.
길상호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외 다수.
산문집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 외 1권.
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천상병 시상, 김종삼 문학상 등 다수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