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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13,13-25>
13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4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15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18 그리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시고,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시어 그 땅을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주셨는데,
20 그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 뒤에 사무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시고,
21 그다음에 그들이 임금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벤야민 지파 사람으로서 키스의 아들인 사울을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임금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22 그러고 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3,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
분명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체가 높은 주인이 지체가 낮은 종을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모든 자가 복된 것이 아니라 이를 알고 실천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실행하는 자가 참으로 복됩니다.
그러니 ‘섬김의 도’는 실행하는 자만이 배울 수 있는 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가르치시고 섬김과 기도를 가르치시되, 동시에 그것을 배울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은 유일한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섬기면서 섬김을 배우고,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우고,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는 방법입니다.
곧 실행을 통해 배우는 방법입니다.
마치 수영을 배우는 방법은 수영을 하면서 배우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길은 자전거를 타면서 배우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전거를 타지 않고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섬김을 배우는 방법도, 사랑을 배우는 방법도, 기도를 배우는 방법도, 그것을 실행하면서 배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실천’이 중요합니다.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실행되지 않은 섬김은 섬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공관복음에서 말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태 20,28; 마르 10,45)
이토록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서로에게 “종이 되어라” 하십니다.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요한 13,8)
그러니 우리는 이미 주님의 섬김을 받은 이들입니다.
주님의 섬김에 한 몫을 받은 이들입니다.
결국 진정 섬김을 받은 자만이 진정 섬기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섬김과 존경을 받고 싶고, 크고 높은 자 되고 싶어 합니다.
진정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먼저 섬기는 이가 섬김을 받고, 먼저 존경하는 이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낮출수록 사실은 더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20)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7)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7)
주님!
저희가 서로 발을 씻어주게 하소서.
서로에게 종이 되게 하소서.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아는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실천하여 진정 알게 됨이 저의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받아들임에 대하여>
어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맞아들이고 받아들임에 대하여 두루 성찰하고자 합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갈수록 받아들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고, 그만큼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사랑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왜 갈수록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어 갈까요?
그것은 우리가 감성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성의 시대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중에서, 곧 이성과 의지와 감성 중에서 감성에 더 의존하고 다른 것들보다 더 감성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감성에 따라 산다는 것은 좋고 싫은 감정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사람은 아무리 싫어도 의지적으로 해야 할 것을 하며 살고, 이성적인 사람은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데 비해, 감성적인 사람은 자기가 좋아야지만 하고 아무리 옳아도 또 아무리 다른 사람이 원해도 싫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성의 시대인 오늘날, 좋다느니, 완전 좋다느니 그런 표현이 많고, 아무리 어른이나 집단이 원해도 싫다는 말을 너무도 쉽고 당당하게 하여 이전 세대의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러니 좋아하는 사람은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사람은 거부할 수밖에 없고, 좋고 싫은 것이 너무도 분명하고 까다로운 사람은 싫은 것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며칠 전에 엄마와 아들이 저의 식당에 오셨는데 저희 실수로 음식이 그분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맛 없어도 아깝다고 다 먹고 아들은 조금 먹어보고는 거지반 남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음식값을 받지 않겠다고 돌려드리니 자식은 받아 가려는데, 엄마는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며 굳이 돈을 내고 가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도 감성적인 사람이었고, 회개하기 전에는 싫은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환우를 피해다닐 정도였는데, 주님의 은총으로 회개한 다음에는 나환우를 받아들였으며 이때 그는 역겨웠던 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다고 그리고 세속을 떠났다고 유언에서 회고하지요.
사랑이 없고 자기가 강한 사람이 싫고 좋음이 강합니다.
그래서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으며, 좋은 사람은 받아들이고, 싫은 사람은 강하게 거부합니다.
싫은 일도 사랑으로 하고 싫은 사람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싫고 좋음이 없고 설사 싫은 것이 아직 있어도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 중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사랑 까닭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두를 받아들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모를 진정 사랑하는 자식이라면 부모가 사랑하는 다른 자녀들, 곧 자기의 형제들을 형제로서 사랑하고 받아들일 것이는 것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사랑 까닭에 주신 것으로 모두 다 받아들일 것입니다.
고통과 고통을 주는 사람도 받아들일 것이며 마침내 죽음까지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것으로, 그리고 자매와 형제로!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분수를 알면 여유가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 일 때가 있습니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하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알아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아는 데 있어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은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그 자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울러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몫이 있는데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신분에 따라 다양한 몫이 있는데, 성직자나 수도자로서,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남편 자식으로서의 몫이 다르고, 스승과 제자로서의 위치도 다릅니다.
기관의 장이나 구성원이 해야 할 일이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위치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분수를 알면 알맞은 처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을 빌미 삼아 나를 내세우지 말 것이며 오로지 주님의 도구로써 만족하라',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믿음을 표현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 안에는 주인이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았으니 그보다 높지 않은 종은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탐할 때 반역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중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내가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고 하셨습니다.
모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걸립니다.
지금 열심히 사는 사람은 더 열심히 하고, 아직도 부족한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간의 연약함을 탓하고 맙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는 주님의 말씀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습니다.
지금 여기서 나에게 주어진 몫에 더욱 충실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분명 우리는 파견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의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 예기치 않은 일 등등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은총의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더더욱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헤아려 지금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알면 아는 만큼 실천할 일입니다.
실천하면 행복합니다.
분수에 맞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의 길: 발을 씻어주되 먼저 하느님이 되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할 것이란 약속을 해 주십니다.
행복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낮아짐’이 행복이라 말씀하십니다.
한 여인이 군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 주 모하비 사막 훈련소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지독한 무더위 속에 시도 때도 없이 모래바람이 불어 입과 눈과 음식으로 들어가기 일쑤였습니다.
뱀과 도마뱀이 우글거리지만 주위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몇 달 만에 우울증에 걸린 그녀는 고향 부모에게 이렇게 하소연하였습니다.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차리라 감옥에 가는 게 나아요. 정말 지옥이에요.”
그러나 아버지의 답장은 이 단 두 줄만 적혀 있었습니다.
“감옥 문창살 사이로 밖을 내다보는 두 죄수가 있다.
하나는 하늘의 별을 보고, 하나는 흙탕길을 본다.”
이 두 줄의 글을 받아들인 그녀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꺼리던 인디언들과 친구가 되었고, 공예품 만드는 기술과 멍석 짜기도 배웠습니다.
사막의 식물들도 관찰해보니 매혹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사막의 저녁노을은 신비한 아름다움을 선사했습니다.
그 속에서 『빛나는 성벽』(Bright Ramparts)이란 소설을 썼는데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델마 톰슨(Thelma Thompson)은 말합니다.
“사막은 변하지 않았다.
내 생각만 변했다.
생각을 돌리면 비참한 경험이 가장 흥미로운 인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개미와 같은 존재가 겸손해지는 기쁨을 가질 수 있을까요?
겸손해지는 기쁨을 가지려면 먼저 높아져야 합니다.
사람이 동물에게 잘 대해줄 때 기쁜 이유는 내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체가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으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발을 씻어주시며 그 방법으로 낮아져야 함도 알려주십니다.
요한복음엔 성찬례 제정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성찬례의 의미를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삶이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삶이 되지 못하면 성체의 삶을 사는 게 아닙니다.
성체는 내가 양식이 되어주며 상대도 자신보다 높을 수 있음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를 높여주면 상대가 교만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겸손해집니다.
내가 상대를 겸손하게 하려고 찍어누르려 하면 상대는 교만해집니다.
당장은 겸손한 척하겠지만 뒤에서 칼을 갑니다.
상대를 겸손해지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를 한없이 들어올려야 합니다.
이 방법이 상대를 자신보다 이미 높은 사람으로 여겨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나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낮아져서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게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학자, 혹은 이적 엄마라고 많이 불린다는 자녀교육 멘토 ‘박혜란 작가’가 자녀들에게 한 가장 많은 말은 “알아서 커라!”입니다.
박 작가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란 말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세 아들이 모두 서울대를 졸업했습니다.
현재 첫째는 건축학과 교수이고, 둘째 이적은 가수이며, 셋째는 방송국 드라마 PD를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는 비법을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이를 키우려 하지 마라.
이것이 비법이다.”
그래도 아이들을 키운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제가 키웠다면 아이들이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라며 웃습니다.
『믿는 만큼 자란 아이들』이란 책의 제목처럼 어머니는 아이들을 그저 믿어주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언제 우리를 키웠다고 그런 책을 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내가 언제 키웠다고 쓴다고 그러디? ‘난 너희들이 믿는 만큼 자라는 것을 지켜봤다’라고만 쓸 거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박혜란 씨는 “아이를 손님처럼 대하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동등한 어른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적 씨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저희를 애들 대하듯이 잘 안 대했습니다.”
아이를 애들 대하듯이 대하면 아이는 크지 않습니다.
비가 갑자기 올 때도 다른 아이들 어머니는 우산을 들고 아이들을 마중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적 어머니는 한 번도 오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운했을까요?
그는 뿌듯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어른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장난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며 이런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한 번 젖으면 더는 안 젖는구나!”
엄마가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고3 막내아들에게 도시락을 싸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형들은 대학생이니 늦게 일어나고 엄마는 외국에서의 삶으로 바쁘니 막내가 일찍 일어나 형들 먹을 밥을 해 놓고 자기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막내는 제가 고3인 것과 어머니와 무슨 상관이냐며 외국에 가서 일 보시라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어머니가 자신들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는 독립적인 존재로 믿어준다는 것이 바로 자녀를 이용하여 자기 만족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마음을 죽인 피 흘림인 것을 압니다.
이 피 흘림으로 자녀들의 자아의 발꿈치가 닦여지는 것입니다.
이적(이동준) 씨가 중3 때 ‘엄마의 하루’란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습한 얼굴로, am 6:00이면, 시계같이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지어, 호돌이 보온 도시락통에 정성껏 싸, 장대한 아들과 남편을 보내놓고, 조용히 허무하다.
따르릉 전화 소리에, 제2의 아침이 시작되고, 줄곧 바삐, 책상머리에 앉아, 고요의 시간은, 읽고 쓰는데, 또 읽고 쓰는 데 바쳐, 오른쪽 눈이 빠져라, 세라믹 펜이 무거워라, 지친 듯 무서운 얼굴이, 돌아온 아들의 짜증과 함께, 다시 싱크대 앞에 선다.
밥을 짓다, 설거지를 하다, 방바닥을 닦다, 두부 사오라 거절하는, 아들의 말에, 이게 뭐냐고 무심히 말하는, 남편의 말에, 주저앉아 흘리는 고통의 눈물에, 언 동태가 되고, 아들의 찬 손이 녹고, 정작 하루가 지나면, 정작 당신은,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되뇌시며, 슬퍼하는.
슬며시 실리는, 당신의 글을 부끄러워하며, 따끈히 끓이는, 된장찌개의 맛을 부끄러워하며, 오늘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무심한 아들들에게, 되뇌이는. ‘강철 여인’이 아닌, ‘사랑 여인’에게, 다시 하루가 길다.”
엄마는 해 준 게 없다고 여기지만 자녀는 압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것만큼 피를 흘리는 사랑은 없다는 것을.
진정 믿어주는 만큼 자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내 살을 깎아내는 아픔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동물처럼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어주셨습니다.
그 믿음의 표징이 바로 당신의 살과 피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하느님처럼 순결하고 거룩하고 능력자로서 살아갈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자녀들을 어른으로 대하고 믿어줄 때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하느님 대하듯이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당신이 낮아지고 그 낮아짐으로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이웃을 이미 하느님이 된 존재로 믿어야 합니다.
믿고 정말 하느님이 되는지 바라보면 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믿어줌으로써 내가 피 흘리고 낮아지기 때문에 나는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하니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이웃을 하느님으로 대하며 자신도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성체의 삶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세족례는 당신의 진심, 본심을 말해주는 행동이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주 높은 벽 앞에 서시곤 했습니다.
아무리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귀를 닫고 마음을 닫아버렸기에, 목청껏 외쳐도 그 말씀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특히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향한 노골적인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있었기에, 그저 고발 건수를 찾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지,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의도는 아예 없었습니다.
때로 제자들마저도 말씀의 진의를 알아듣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였습니다.
한번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점심 때 먹을 빵을 챙겨오지 않았다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오늘 복음만 해도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자주 아래로 내려가라, 군림하지 말고 섬겨라,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라고 강조했지만, 전혀 알아듣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는 제자들의 모습에 얼마나 안타까우셨던지,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가르침을 주셨는데, 세족례였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허리를 깊이 숙인 후 그들의 더럽고 냄새나는 발을 일일이 씻겨주신 스승님께서 일어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복음 13장 16~17절)
과거 유다 문화 안에서 세족(洗足)은 노예 가운데서도 몸종들이 주로 하던 일이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기후는 건기의 여름과 우기의 겨울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덥고 건조한 여름의 경우 바깥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먼지와 땀으로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었습니다.
따라서 주인의 귀가 시간에 맞춰 몸종은 주인의 말을 씻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몸종은 주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허리를 굽혀 먼지투성이의 발에 물을 붓고 뽀득뽀득 씻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정성껏 발의 물기를 닦곤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시대 세족은 철저하게도 노예에게 주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일회성 행사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매스컴을 의식해서 적당히 포즈만 취하고 마는 그런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먼 길 떠나기에 앞서 당신께서 극진히 사랑했던 제자들 한명 한명을 위해 기도하며 정성껏 행하신 세족례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행동, 당신의 본심을 말해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예의 일이었던 세족을 하느님의 일인 세족례로 승격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족례를 통해서 이제 세족은 노예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었습니다.
몸종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
이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말씀과 합해서 읽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요한 13,13-15)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서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따라서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서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서로’ 라는 말은 누구는 낮추기만 하고, 누구는 높임을 받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 또 누구는 섬기기만 하고, 누구는 섬김을 받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두가 낮추어야 하고, 모두가 섬겨야 합니다.
그게 완벽하게 실현된다면, 그곳이 곧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 모두가 서로 섬기는 나라입니다.)
“너희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복되다.”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복되다.’ 라는 말은 ‘구원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도(사도라고 해도)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경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4-35)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 라는 명령과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명령은 ‘같은 명령’입니다.
낮춤과 섬김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이유입니다.
만일에 낮춤과 섬김에 사랑이 없다면, 그 낮춤과 섬김은 아무 가치 없는 ‘비굴함’입니다.
또 사랑에 낮춤과 섬김이 없다면, 그것은 세속에서 말하는 ‘좋아하는 감정’일 뿐이거나 소유욕일 뿐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낮춤과 섬김으로써 실천하는 사랑은 예수님의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사랑이 없이는 신앙을 증언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일을 할 때, 즉 선교활동을 할 때, ‘낮춤과 섬김으로써 실천하는 사랑’ 없이 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증언하지 못하는 ‘헛일’이 될 뿐입니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한 13,18)
예수님께서 낮춤과 섬김을 강조하시다가 ‘갑자기’ 유다의 배반을 말씀하신 것은 낮춤과 섬김 없이는 사도직 수행을 할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하신 것일 수도 있고, 유다가 배반하게 된 이유를 암시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유다는 서로 발을 씻어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반감을 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마도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기를 바라고서(루카 22,25) 예수님을 따랐던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시니까(루카 22,26) 예수님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유다는 최후의 만찬이 행해지기 훨씬 전에 이미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활동 초기부터 낮춤과 섬김을 가르치셨습니다(루카 9,48).
유다는 예수님의 그 가르침에 실망하면서 점점 더 멀어지다가 수난이 임박하자 완전히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19-20)
여기서 ‘일’이라는 말은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의 수난,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모르고 당한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한 일도 아니고, 인류 구원이라는 하느님 뜻의 실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제자들이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도단 안에서 배반자가 생긴 일 때문에 사도들의 위신이 실추되더라도 위축되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배반자가 되어서 떨어져 나가도 다른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위와 권한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보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에게 맡겨진 직무와 권위와 권한은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흔들지 못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공동체 성서의 렉시오 디비나 - 우리는 예수님과 하느님을 배경한 형제들이다>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시편 89,2ㄱ)
정말 화답송 후렴처럼 살고 싶습니다.
제 지론은 신구약 성서뿐 아니라 자연성서와 믿는 이들의 우리 삶의 역사 또한 성서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은 신구약성서는 물론 자연성서, 우리 각자 삶의 성서라 말합니다.
강론 준비할 때도 이 세 측면의 성서를 전부 활용합니다.
물론 기본 텍스트는 신구약 성서구요, 저는 여기에다 하나를 더 첨가합니다.
믿는 이들의 교회 공동체 역시 하나의 살아있는 미완의 성서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선교사로 파견되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유다인 회당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한 바오로의 설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가 봉독된 후 회당장의 요청으로 바오로의 유려한 설교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이어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의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로 설교를 끝맺습니다.
그대로 이스라엘 구세사에 대한 바오로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문장의 주어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주인공이 되어 섭리하시는 구약은 예수님의 출현으로 끝나고 이어 신약의 예수님의 교회를 시작으로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지금까지 2000여년 동안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미완의 성서이듯이 교회 공동체 역시 미완의 성서라는 것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 성서입니다.
교회공동체 성서, 수도공동체 성서, 가정공동체 성서 등 다양합니다.
이런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역시 하나의 성서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인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주인공이 되시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펼쳐가는 구원역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에 잘 협력하면서 미완의 공동체 성서를 날마다 한쪽씩 정성을 다해 써내려 가는 것입니다.
성서 공동체를 이루는 성원들은 모두 예수님과 하느님을 배경한 한 몸의 지체들로 형제들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주님의 제자들이자 형제들인 성서 공동체 회원들의 신원을 잘 밝혀 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우리의 주제를 파악하여 겸손하라는 것이며,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께 파견된 자로서, 언제나 주님께 귀를 기울이며 경청과 순종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래야 바람직한 성서 공동체의 형성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심오한 환대의 진리를 보여 줍니다.
형제에 대한 환대는 바로 그를 파견한 예수님의 환대, 하느님의 환대에 직결됨을 봅니다.
형제들 하나하나 모두의 2중 배경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이자 하느님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되고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공동체 형제들이 얼마나 존엄한 품위의 사람인지 깨닫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형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나니 이보다 건강하고 건전한 신비주의도 없습니다.
이런 자각이 각자 자신의 존엄과 위엄을 지키게 하며, 하느님의 선물인 공동체 하나하나의 형제들을 참으로 귀하게, 존중과 배려, 경청의 자세로 대하게 할 것입니다.
각자가 미완의 성서듯이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 역시 미완의 성서입니다.
여기 요셉 수도공동체 역시 35년 역사를 지닌 살아있는 공동체 성서입니다.
제가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렉시오 디비나하며 나눴던 내용 넷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1.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2. 모든 것이 다 필요했다.
3.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4. 오늘 지금 여기를 살아라.
어제 우리 요셉공동체 형제들은 1명만 수도원에 남고 10명 수도형제들과 수도원에 잠시 거주하는 두분 형제와 함께 12명이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에 소풍차 다녀왔습니다.
미완의 요셉수도공동체 성서 한쪽이 특별히 기록된 날입니다.
함께 10명의 수도형제들이 3월중 코로나를 겪으며 한몸 공동체를 체험했고, 어제는 코로나로 인해 만 2년만에 갖는 함께 공동체 소풍이었으니 참으로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혼자라면 무의미하고 엄두도 못낼 소풍을 함께 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마 혼자 소풍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천국 입장은 혼자가 아니라 단체 입장임을 은연중 깨닫습니다.
새삼 함께 할 때 삶의 의미지 고립단절의 혼자의 삶이라면 참으로 삶의 의미를 찾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혼자 무슨 의미로, 무슨 재미로 여기 소금산의 출렁다리를 찾겠는지요!
함께 하니 기쁨의 체험이지 혼자라면 무슨 기쁨이 있겠는지요!
얼마전 공동체 시노드 1차 모임시 '기도와 전례 거행'이라는 주제로 대화 시 깨달음처럼 확인한 진리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에게 기도와 전례 거행을 빼면 무엇이 남겠는가?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이 절로 나왔습니다.
기도와 전례는 수도자들의 존재이유이자 모두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도 기도가 빠진 삶이라면 참으로 공허할 것입니다.
어제 원주 간현 관광지 소풍때 새삼스런 깨달음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먹을 것 빼면 아무것도 없네!” 정말 관광지 주변에 즐비한 대부분의 가게들이 먹을 것뿐이었습니다.
“먹는 재미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먹자고 하는 일인데.” 언젠가 들은 말도 생각납니다.
새삼 기도하고 먹고 일하고 놀고, 넷은 참된 인간 삶의 기본적 필수 요소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공동체 소풍 때는 적절히 먹으며 간략한 공동체 시간경을 꼭 바쳤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놀이와 식사가 균형잡힌 일과로 참으로 미완의 공동체 성서 한쪽을 뜻깊게 완성한 하루였습니다.
마지막 폐역인 간현역에서 약1시간에 걸친 레일파크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젊은 수도 형제들 덕분에 가능했던 체험이었습니다.
폐역(廢驛), 폐교(廢校), 폐가(廢家), 폐사지(廢寺址)를 대할 때는 웬지 모를 슬픔, 아픔과 더불어 아련한 추억에 잠기게 됩니다.
예전 폐역되기 전에 이런 간현역같은 목가적인 역에 역장은 참 낭만적이었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간현역에서 대략 30분 정도 관광기차를 탔고, 30분 정도는 레일위를 4인1조의 관광 기관차를 타고, 4개 달린 바퀴 페달을 밟으면서 속도를 조절하면서 주위 풍경도 감상했습니다.
지날 때마다 바뀌는 다양한 풍경들이 살아 온 인생 여정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다시는 오지 못할 지나간 날들, 각자 살아 온 나날들의 풍경도 참 다양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거꾸로 지난 날들을 향해 살라면 못살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희망 때문에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있기에 우리 인생 열차는 죽는 그날 까지 계속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 흘러가는 세월이요, 인생 차창의 풍경도 시시각각 바뀔 것입니다.
앞으로 겪게될 하루하루의 풍경을 잘 감상하면서 주님과 함께 미완의 공동체 성경, 미완의 내 자신의 삶의 성서 한쪽 한쪽을 잘 쓰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개인 삶의 성서를, 공동체 성서를 잘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잘 써가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써내려 가야 할 각자 삶의 성서, 공동체 성서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마태 28,20)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1988년 창간된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올해 창간 34주년이 되었습니다.
창간호에 실린 독자들의 광고를 보았습니다.
광고의 주된 내용은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신문이 하나만 있었더라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빛과 소금 그리고 거울로서 사랑을 꽃피우는 신문이 되어 주시길”입니다.
34년 전 미주지역의 신자들은 정의에 대한 갈망이 컸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사명을 다 해 주기를 염원했습니다.
34년 전 미주지역의 신자들은 말씀에 대한 갈망이 컸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기를 염원했습니다.
창간호를 읽으면서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그와 같은 갈망과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도 이렇게 축하인사를 전하였습니다.
“평화신문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에만 의존 할 것이 아니라 내 손은 세상의 평화를 주신 그리스도의 손이 되고, 내 눈은 그리스도의 눈이 되어 세상을 보고, 내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어 세상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면서 평화신문을 만들어간다면 어떠한 문제에라도 옳은 판단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신문을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신 재미동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 사람의 꿈은 꿈으로 끝나겠으나 많은 이가 함께 꾸는 꿈은 반드시 현실로 이룩될 것입니다.
평화를 꿈꾸는 우리 모두의 꿈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주평화신문의 꾸준한 성장과 발전을 기도합니다.”
뉴욕 대교구의 주교님께서도 이렇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평화신문 미주판 발행을 큰 기쁨으로 환영합니다.
이토록 중요한 매체를 통해 미국에 이민을 와 있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현대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사회정의와 평화의 필요성에 크게 격려되고 동시에 도전받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내가 기뻐야 전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세상의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듯이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듯이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지면을 통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또한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영적인 갈망을 풀어주는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광장이 그 도시의 역사를 알려주듯이,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언자를 보내셨고, 판관, 왕을 보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는데, 세례자 요한이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신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설명을 들었고,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음을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시적인 구원의 역사를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골목길이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참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셨고, 그들의 갈망을 풀어 주셨습니다.
사랑은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듣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미국의 ‘프레이밍햄’ 연구가 적혀 있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었습니다.
“행복한 사람과 친한 사람은 평균 15% 더 행복해진다.
그 행복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친구의 친구도 10% 더 행복해지고, 그 사람들의 친구들은 6% 더 행복해진다.
세 관계에 걸쳐 이어지는 경이로운 전달이다.”
행복과 기쁨은 이렇게 전달됩니다.
그렇다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복한 사람 곁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 곁으로 가기보다는 혼자 있으려고만 합니다.
불행의 마음이 자기 안에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또 행복한 사람들은 이렇게 불행한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관심과 배려라는 사랑을 나눠서 그들에게 행복을 전달해줘야 합니다.
행복과 기쁨을 삶에서 느끼는 사람 곁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듭니다.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더 행복해지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마음으로 절망의 상황만을 만들고 있으면 사람들은 다가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절망의 상황에 깊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 역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마음이 있다면, 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의 곁에 서는 것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역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전,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토론했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 때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께서는 이 발 씻김의 뜻을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권력 지향적이어서는 안 되고, 솔선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을 낮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고 삶으로 겸손을 보이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에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보다, 세상의 물질적인 풍요보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주님께서는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고, 자기 행복을 세상의 전하는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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