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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31일 목요일
[(백)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에스파냐 칸타브리아의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느끼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직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 그레고리오 13세 교황께서 그를 시성하셨다.
말씀의 초대
모세가 성막을 세우고 증언판을 가져다 궤 안에 놓자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찬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에 비유하시며, 세상 종말에는 악한 자들을 가려낼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구름이 만남의 천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40,16-21.34-38
그 무렵 16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17 마침내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성막이 세워졌다.
18 모세는 성막을 세우는데, 먼저 밑받침을 놓은 다음
널빤지를 맞추고 가로다지를 끼운 뒤, 기둥을 세웠다.
19 또 성막 위로 천막을 치고 천막 덮개를 그 위에 씌웠다.
이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였다.
20 그런 다음 증언판을 가져다 궤 안에 놓았다.
그 궤에 채를 끼우고 궤 위에 속죄판을 덮었다.
21 또 궤를 성막 안에 들여놓고 칸막이 휘장을 쳐서 증언 궤를 가렸다.
이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였다.
34 그때에 구름이 만남의 천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35 모세는 만남의 천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구름이 그 천막 위에 자리 잡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36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모든 여정 중에,
구름이 성막에서 올라갈 때마다 길을 떠났다.
37 그러나 구름이 올라가지 않으면, 그 구름이 올라가는 날까지 떠나지 않았다.
38 그 모든 여정 중에 이스라엘의 온 집안이 보는 앞에서,
낮에는 주님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47-53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10,31―11,1)와 복음(루카 14,25-33)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하늘 나라는 온갖 종류의 고기가 들어 있는 그물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일러 주시듯이 세상과 공동체 안에는 ‘좋은 것’인 의인들과 ‘나쁜 것’인 악인들이 있습니다. 이 비유를 우리 내면에 적용한다면 우리 안에도 선함과 의로움 같은 것이 있고, 악의와 악습 같은 것도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세상이든 내 안이든 나쁜 것은 다 없애고 좋은 것만 남겨 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둘 다 있게 하십니다. 여기서 모두를 포용하시는 하느님의 너그러우심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같이 놓아두시지는 않고 가려내시어 저마다 걸맞은 장소에 두심은 그분의 의로우심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저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다양한 면을 모두 인정하고 품는다면, 그 자체로 덕을 넘어서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마태 13,49)라고 말씀하시면서 의인들에게 초점을 두시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것을 품더라도 좋은 것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닮아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안에 무엇을 담고 버릴지 식별한다면 그 자체로 주님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어부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고자 그물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듯이, 우리도 숨은 생각과 감정을 밖으로 꺼내 놓아 마주해야 합니다. 그 생각과 시선과 행동이 늘 그분을 닮기를 바랍니다.(김태훈 리푸죠 신부)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당해도 좋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위대한 성인(聖人)의 탄생은 그 시대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의 표시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지난 교회 역사를 뒤돌아보면, 교회나 사회가 큰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위대한 성인이 출현하였습니다.
산업화의 그늘에서 착취당하던 청소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던 시절, 청소년의 사도 동보스코가 등장했습니다. 교회가 부자들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하던 시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등장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등장으로 인해 가톨릭 교회의 근간이 심각하게 흔들리던 시절,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든든한 기둥이자, 진리의 투사요 옹호자로 유명한 성인을 보내주셨는데, 그분이 바로 이냐시오였습니다.
결정적 회심 이후 이냐시오가 보여준 결연한 의지는 놀랄 정도였습니다. 오랜 방황 끝에 그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첫발을 내딪는데, 그 때 나이가 서른 셋이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조소를 받아가며 고등학교 과정을 밟았습니다. 한참 어린 동생들 사이에서도 그는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향학열을 활활 불태웠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이냐시오는 공동체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을 규합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는데, 그런 과정에서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단자로 취급되어 사람들에게 결박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당해도 좋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1540년 9월 27일 드디어 이냐시오가 간절히 고대했던 예수회에 대한 교황청으로부터의 인가가 정식으로 내려졌습니다. 예수회는 종래 수도회들과는 상당한 차별점을 보였습니다. 교황에게 특별 순명을 서약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그분의 영적 왕국 건설을 위해 그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하고 분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보편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가던 순간 이냐시오는 동료 수도자들과 분연히 일어나 가톨릭교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직한 군사로서 실추되고 분열된 교회의 위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분골쇄신했습니다.
예수회 초대 총장으로서 이냐시오는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수도회 인가가 난 직후 겸손한 마음으로 총장직을 사퇴하려 했지만, 교황의 간절한 당부로 15년 세월 동안 그 고통스러운 자리에 앉아 회원들을 양성했습니다.
이냐시오의 생활은 지극히 검소했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소박한 음식에 만족했습니다. 어떤 때 그는 몇 개의 구운 밤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습니다. 그는 이웃들에게는 관대했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했습니다. 그의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무실 책상 위에는 성경과 준주성범을 비롯한 몇 권의 책만이 놓여있었습니다. 과중한 사목으로 인해 하루 수면 시간은 서너 시간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이름 이냐시오는 활활 타오르는 불이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름처럼 그는 자신의 내면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불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자신 안에 간직한 그 불길을 냉담한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이냐시오의 생애를 잘 요약하는 성경 구절을 소개한다면 이렇습니다. “나는 세상의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루카 12,49)
“나는 30년 동안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한번 마음 먹은 결심을 결코 뒤로 미룬 적이 없습니다.”(이냐시오 데 로욜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적,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자리를 조심스럽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책상이 놓인 단순한 공간이었지만, 우리 가족에겐 존경과 경외의 상징이었습니다. 탁자 위에는 아버지가 쓰던 물건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리에는 함부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있을 때나 아버지가 없을 때나 아버지의 자리는 늘 조심해서 다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아버지에 대한 경외를 알려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탁자 앞에 앉아서 책을 읽기도 하였고,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가족은 아버지의 탁자 주위에 둘러앉아 기도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자리는 성당 안의 감실(龕室)과 비슷했습니다. 감실에는 성체가 모셔져 있습니다. 교우들은 감실을 바라보며 기도 하고, 교우들은 감실 앞을 지날 때는 예의를 표합니다. 아버지의 자리와 감실은 성경에서 보면 ‘장막’과 비슷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시는 감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실을 둘러싸는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그 감실은 바로 교회의 원형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이냐시오 성인은, 이런 하느님의 영광을 온 삶으로 드러낸 분입니다. 그는 병상에서의 회심을 계기로, 세속의 영광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Ad Majorem Dei Gloriam)을 추구하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영신수련'이라는 귀한 기도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저 역시 2000년부터 영신수련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매주 200킬로미터를 왕복하며 기도 모임에 참석했던 그 시간은, 땅속에서 양분을 흡수하는 뿌리처럼 내 신앙의 뿌리를 깊게 내려준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제 영혼 깊은 곳에는 성인의 말씀 한 구절이 살아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버릴 것입니다.” 성인은 이 신앙 고백 위에 두 가지 영적 나침반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하나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 또 하나는‘겸손의 세 단계’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죄를 지은 후 회개하려는 세 부류의 사람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은 죄를 지었지만,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고 미루기만 합니다. 변명은 많고, 결단은 없습니다. 하느님보다 자기 의지가 앞섭니다.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회개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애착은 버리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따르기보다, 하느님이 자기 뜻을 따라 주시길 기대합니다. “이것만은 그대로 두고 회개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자갈밭에 떨어져 뿌리는 내리지 못하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자기 뜻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구합니다. 부귀든 가난이든, 건강이든 병고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선택합니다.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많은 열매를 맺는 신앙입니다. 이 세 번째 사람이 바로 우리가 되기를, 성인은 영신수련을 통해 초대합니다.
또한 이냐시오 성인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지를 겸손의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겸손은 죽음의 위협이 와도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자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가장 우선인 삶입니다. 운전으로 생각하면 준법 운전과 같습니다. 속도와 차선을 지키고, 교통법규를 지키는 신앙입니다. 두 번째 겸손은 부귀와 가난, 존경과 모욕, 건강과 질병 중에서,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라면 어떤 것이든 기쁘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상태입니다. 운전으로 생각하면 안전 운전과 같습니다. 앞과 뒤의 차를 살피면서, 적당한 휴식을 취하는 신앙입니다. 세 번째 겸손은 오히려 예수님처럼 가난과 멸시, 십자가를 더 사랑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기를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운전으로 생각하면 양보 운전과 같습니다. 운전이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도구가 되는 신앙입니다. 이 겸손은 수동적인 인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능동적으로 나 자신을 바치는 용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이냐시오 성인은 그러한 지혜로운 집주인이었습니다. 자기 안의 상처와 아픔도 꺼내어 하느님의 빛 아래 놓았고, 과거의 기사도 정신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영적 전투로 바꾸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이 있는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유형의 사람에 가까우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겸손의 단계를 살아가고 계십니까? 오늘, 성 이냐시오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 모두도 세 번째 사람, 세 번째 겸손을 향해 나아갑시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삶을 봉헌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당신의 품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9-50)
오늘
당신의 품에
있게 하시듯이
내일도
당신의 품에
있게 하시고픈
당신께
오늘
당신의 품에
있듯이
내일도
당신의 품에
있을 수 있는
나를
오늘의 성인
성 이냐시오(Ignatius)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 로욜라(Loyola)
활동연도 : 1491-1556년
같은이름 :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이니고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Azpeitia) 읍 위쪽의 로욜라 성에서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네스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이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인 1517년에 성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Navarra)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해 주었고, 로욜라의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성 안에 그러한 책은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회심 후 로욜라를 떠난 성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Monserrat)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수련”(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을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예루살렘 순례 후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Barcelona)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Paris)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성 이냐시오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단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부아 출신인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2일), 나바라(Navarra)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anciscus Xaverius, 12월 3일),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J. Laynez)와 살메론(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S. Rodriguez) 등이다. 이들은 성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달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Montmartre)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온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Venezia)에서 9명의 동료들과 모였으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성 이냐시오는 동료 성 베드로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Roma)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성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하던 성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성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성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성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Justin de Jacobis)
신분 : 선교사, 주교
활동지역 : 에티오피아(Ethiopia)
활동연도 :1800-1860년
같은이름 :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누스, 저스틴
유스티누스 데 야코비스(Justinus de Jacobis, 또는 유스티노)는 이탈리아 루치아나의 산 펠레(San Fele)에서 17명의 자녀 가운데 14번째 아들로 태어나 나폴리(Napoli)에서 성장하였다. 1818년 선교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1824년 6월 12일 브린디시(Brindisi)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티오피아 선교단(빈첸시오회)의 일원으로 1839년에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였다. 2명의 동료 사제와 함께 그는 서서히 그 지방의 문화를 익히며 주민들의 친구도 되고 종도 되면서 온갖 장애들을 극복하며 선교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 선교활동은 주민들의 무지와 중상모략으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위하여 방인 사제 양성에 주력하여 3명의 방인 사제를 배출하고 자신은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주 대중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1853년경 에티오피아의 교세는 20명의 방인 사제와 5천명의 신자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곤다르(Gondar)에서 체포되어 7개월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추방되었다. 그 후 그는 재차 입국에 성공하였으나 또 다시 감옥에 갇혔고,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지만 1860년 7월 31일 열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에티오피아 교회의 재건자였던 그는 1939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5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제르마노 (Germanus)
활동년도 : 378?-448년
신분 : 주교
지역 : 오세르(Auxerre)
같은 이름 : 게르마노, 게르마누스, 제르마누스
성 게르마누스(또는 제르마노)는 378년경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 있는 오세르의 좋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갈리아(Gallia)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후 로마(Roma)에 가서 법학을 공부하여 로마 시의 변호사가 되었다. 황제 호노리우스로부터 갈리아 지역을 다스리는 6명의 고위 관리 중 하나로 임명받아 지방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내적 회개를 체험한 성 게르마누스는 관직에서 물러나 사제가 되었다.
오세르의 주교였던 성 아마토르(Amator, 5월 1일)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그가 사망하자 즉시 선출되어 418년 7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이때 그는 자신의 부인(로마에서 결혼한 에우스타키아)과 헤어져 엄격한 고행을 택하여 수도자로 생활하였다. 그는 투르(Tours)의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와 더불어 갈리아에 공동체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당시 영국에는 이단인 펠라기우스주의가 퍼져 교회가 동요하고 있었다. 영국 주교들의 도움을 요청하자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 4월 6일)는 429년 성 게르마누스에게 영국으로 가도록 지시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영국으로 가는 도중 후에 성녀가 된 어린 시절의 제노베파(Genovefa, 1월 3일)를 만나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는 영국의 이단들을 평정하고, 영국 군대로 하여금 픽트족과 색슨족의 연합 공격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승리는 ‘알렐루야 승리’라고 기록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성 알바누스(Albanus) 무덤 앞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승리의 기쁨을 하느님께 돌렸다. 그는 448년 7월 31일 라벤나(Ravenna)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게르마누스는 여러 세기 동안 투르의 마르티누스 다음으로 가장 사랑받고 공경을 받는 프랑스 성인이다. 말과 행동과 기적의 능력이 뛰어난 성인으로서,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은 그를 일컬어 ‘갈리아의 기적의 게르마누스’라고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