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참회의 생활로 거룩해진 자녀들의 마음을 비추시고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4-20.91-92.95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복음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는 이유
6·25전쟁 당시 흥남 철수 작전 중 60명이 정원인 배에 피란민 1만 4,000명을 구한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선장의 시복 시성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라루 선장은 전쟁을 겪은 뒤인 1954년 20년간 생활한 바다를 등지고 마리누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베네딕도회에 들어갑니다.
12월 23일 흥남 부두를 떠난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수많은 기뢰가 있던 동해를 항해했지만,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주님 성탄 대축일인 25일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렀습니다. 항해하는 이틀 동안 배 안에서 아기 5명이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구조된 1만 4,000명의 후손은 현재 약 1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의 부모도 이 배를 타고 거제도에 왔었습니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수도원에 들어갔을까요? 이웃 사랑을 포기한 것일까요?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사춘기가 되면 부모를 새로 정해야 합니다. 부모는 나의 존재 이유입니다. 따라서 사춘기까지 육체적인 부모가 생존만을 강조했다면 사춘기가 된 아이는 이제 진화론이나 윤회설, 연기설과 같은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론이 자기 삶의 방식과 맞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전쟁에 나가 사람들에게 추앙받기를 원할 때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되자 그렇게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수도회를 설립합니다. 더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나 원의가 먼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의 대로 아버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이나 윤회설, 연기설 등이 자기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찾는 창조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론도 다 창조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의 근원을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를 따릅니다. 자연의 이치는 생존입니다. 하지만 나의 생존은 역시 정글의 법칙처럼 누군가를 죽이는 법칙입니다.
생존욕구는 사랑과 반대됩니다. 결국 인간이 믿는 아버지는 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나 아니면, 자연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였다면 하느님은 부모처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사춘기가 되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게 되고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싶은 사람들은 그것을 적합하게 해 주는 종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도 자연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과학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창조론처럼 증명될 수 없습니다. 그저 각자가 자기 삶의 방식을 정당하게 해 줄 아버지를 찾는 방식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사랑하려는 결단, 그것이 더 큰 행복임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는 신앙 생활은 거짓이 됩니다. 실제로는 내가 섬기는 사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이용하게 됩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기 전에 내가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줌으로써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합니다. 거짓은 나를 관계의 행복보다는 생존의 행복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친구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한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사춘기가 되어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며 살게 됩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새로운 아버지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면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여 그 뜻을 따르게 되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서 그분을 아버지로 선택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https://youtu.be/1Qb803OHkbE
유튜브 묵상 동영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꼰대 패션 탈출법’이라는 이상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패션은 ‘꼰대’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다. 패션은 자유이지만, 꼰대의 성향상 ‘내가 편하다’는 이유로 시간과 장소에 맞지 않는 스타일을 고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유행에 뒤처진 헐렁한 슈트도 모자라, 와이셔츠 안에 메리야스를 받쳐 입고 하얀 양말까지 고수한다면 꼰대일 확률이 높다. 신발이 안 보일 정도로 길이가 긴 바지를 선호한다거나 청바지, 면바지 등 캐쥬얼 차림에도 정장 구두를 매치해야 직성이 풀린다면 100% 꼰대다. 자신의 체형보다 큰 크기의 옷을 선호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글에 따르면 저는 확실히 ‘꼰대’였습니다. 그냥 저 편한 대로 입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누구에게 특별히 잘 보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제 맘이 가는 대로 특히 편한 복장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와이셔츠(끌러지 셔츠) 안에 메리아스는 반드시 입어야 하고, 청바지, 면바지 등 캐쥬얼 차림에도 정장 구두를 신기도 하고, 제 체형보다 큰 크기의 옷을 선호합니다.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꼰대 패션 탈출법’에 의하면 저는 분명히 ‘꼰대’였습니다.
솔직히 패션은 자유라면서도 다른 이의 패션을 평가하는 것이 더 ‘꼰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나이 많은 사람이 꼰대일 것으로 판단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변의 다양한 비판에 귀를 닫거나, 개성이라는 이유로 자기 기준만 맞다고 생각하면 다 꼰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부모의 말을 꼰대 같다면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 자녀 역시 꼰대입니다. 꼰대를 싫어한다면서도 자신이 꼰대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유다인이 주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자기 기준에서 벗어난다면서 틀렸다고 하고, 자기들을 비판한다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꼰대’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주님의 참 제자가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통해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죄의 종이 될 뿐입니다(요한 8,32 참조).
주님의 뜻이 때로는 우리에게 커다란 걸림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의 뜻을 바라보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꼰대’에서 벗어나 주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최고가 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하세요. 이것이 바로 현재 제가 사는 방식이랍니다(오프라 윈프리).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