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列國志 제54회
신생은 호돌에게 편지를 썼다.
신생은 죄가 있어 감히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부군께서는 연로하시고 자식들은 아직 어리니 나라에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백씨(伯氏)께서는 부디 나라를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신생은 비록 죽지만, 백씨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백씨’는 대신에 대한 존칭이다.]
신생은 북향하여 재배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제49회에, 우시가 여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생은 사람됨이 인자하고 결백합니다. 결백한 자는 자신이 더럽혀지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인자한 자는 남을 해치는 것을 꺼려합니다. 자신이 더럽혀지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는 자는 분노하면 참지 못하고, 남을 해치는 것을 꺼려하는 자는 스스로를 해치기 쉽습니다.” 우시의 예측이 적중하였다.]
신생이 죽은 다음 날, 동관오는 곡옥에 도착하여 신생의 죽음을 확인한 뒤 두원관을 잡아가 헌공에게 보고하였다.
“세자는 자신의 죄를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습니다.”
헌공은 두원관에게 세자의 죄를 증언하라고 하였으나, 두원관은 크게 외쳤다.
“하늘이여! 원통하도다! 제가 죽지 않고 잡혀 온 까닭은, 세자의 마음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제사 음식이 이미 궁중에서 엿새나 묵었으니, 독을 넣은 지 오래되었다면 어찌 음식이 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때 여희가 병풍 뒤에서 다급히 소리쳤다.
“두원관이 세자를 잘못 보좌하였는데, 어찌 빨리 죽이지 않습니까?”
헌공은 역사(力士)를 불러 쇠망치로 두원관의 머리를 격파하여 죽이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몰래 눈물을 흘렸다.
양오와 동관오가 우시에게 말했다.
“중이와 이오는 세자와 한 몸이네. 세자는 비록 죽었지만, 두 공자가 아직 살아있어 걱정이네.”
우시는 여희에게 두 공자도 끌어들여 죽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여희는 또 헌공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였다.
“첩이 듣건대, 중이와 이오도 실은 신생과 공모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신생이 죽었으니 두 공자가 첩에게 그 죄를 돌려 하루 종일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진나라를 습격하여 첩을 죽이고 대사를 도모하려 한답니다. 주군께선 잘 살피십시오.”
헌공은 아직 믿지 않았다.
다음 날, 근신이 와서 보고하였다.
“포읍과 굴읍의 두 공자가 문안을 드리러 관문까지 왔다가, 세자가 변고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수레를 돌려 돌아갔습니다.”
헌공이 말했다.
“그놈들이 말도 없이 돌아갔으니, 필시 공모한 것이리라.”
헌공은 환관 발제(勃鞮)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포읍에 가서 공자 중이를 잡아오게 하고, 가화(賈華)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굴읍에 가서 공자 이오를 잡아오게 하였다.
호돌은 둘째 아들 호언(狐偃)을 불러 말했다.
“중이는 변협(騈脅)과 중동(重瞳)을 지닌 사람으로, 풍모가 비범하고 또 현명하여 훗날 반드시 큰일을 이룰 사람이다. 이제 세자가 죽었으니 마땅히 다음 차례는 그가 될 것이다. 너는 속히 포읍으로 가서 그를 도와 달아나게 해라. 그리고 너의 형 모(毛)와 함께 한마음으로 그를 보좌하여 훗날을 도모하도록 해라.”
[‘변협’은 갈빗대가 나란히 붙어서 통뼈로 이루진 것처럼 보이는 늑골, 즉 통갈비를 말하고, ‘중동’은 한 눈에 눈동자가 둘 있는 것, 즉 겹눈동자를 말한다. 제8회에, 호돌의 첫째 아들 호모는 중이가 포읍으로 갈 때 수행하였다.]
호언은 부친의 명을 받들어, 밤새 포성으로 달려가 중이에게 변을 고했다. 중이는 크게 놀라 호모·호언 형제와 달아날 일을 상의했다. 그때 발제가 이끄는 군사가 이미 도착하였다. 포성 사람들이 성문을 닫고 항거하려고 하자, 중이가 말했다.
“군명에 항거해서는 안 된다.”
발제가 성중으로 들어와, 중이의 집을 포위하였다. 중이가 호모·호언 형제와 함께 후원으로 달려가자, 발제가 검을 들고 뒤쫓아 갔다. 호모·호언 형제가 먼저 담장으로 올라가서 중이를 끌어올렸다. 그때 발제가 중이의 옷소매를 잡고 검을 휘둘렀는데, 소매만 잘리고 중이는 가까스로 탈출하였다. 발제는 소매만 가지고 보고하러 돌아갔고, 세 사람은 적(翟)나라로 달아났다.
적후(翟侯)는 전날 밤 청룡(靑龍)이 성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晉나라 공자가 오자 흔쾌히 맞아들였다. 그런데 잠시 뒤에 성 아래에 수많은 수레들이 연이어 당도하여 성문을 열라고 다급히 소리쳤다. 중이는 혹시 추격병이 아닐까 의심하고, 성 위의 병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하였다. 그러자 성 아래에서 사람들이 소리쳤다.
“우리는 추격병이 아니오! 우리는 晉나라 신하들로서 공자를 따르고자 온 사람들이오.”
중이가 성 위에 올라가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 가운데 앞장선 한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는 성은 조(趙)이고, 이름은 쇠(衰)이며, 字는 자여(子餘)인데, 대부 조위(趙威)의 아우로서 晉나라 조정의 대부였다.
[제3회에, 조숙대가 유왕에게 간했다가 관직을 삭탈당하고 晉나라로 갔다. 그리하여 진나라의 대부 조씨 가문의 조상이 되었는데, 조쇠와 조돈 같은 사람이 바로 그 후예라고 하였다. 여기서 조쇠가 등장한다.]
중이가 말했다.
“자여가 왔으니, 내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즉시 병사들에게 명하여 성문을 열고 들여보내게 하였다. 조쇠 외에도 서신(胥臣)·위주(魏犨)·호사고(狐射姑)·전힐(顛頡)·개자추(介子推)·선진(先軫) 등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 외에도 말채찍을 잡거나 전대를 매고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호숙(壺叔)을 비롯해 수십 명 뒤따라왔다.
[호사고는 호언의 아들이다.]
중이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공들은 조정에 있어야 할 터인데, 어찌 여기로 왔소?”
조쇠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주군이 덕을 잃어 요사한 여희만 총애하여 세자를 죽였으니, 晉나라는 조만간 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저희들은 평소에 공자의 관인(寬仁)함을 알고 공자를 따르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적후는 그들을 모두 들어오게 하여 인사를 나누었다.
중이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여러 군자들께서 협심하여 돕겠다니, 마치 죽은 뼈에 살이 붙어 다시 살아난 것만 같습니다. 죽더라도 그 은덕을 어찌 잊겠습니까?”
위주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수년 동안 포성 사람들에게 은덕을 베푸셨기 때문에, 포성 사람들은 모두 공자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제 적나라의 원조를 받고 포성 사람들을 동원하여 강성(絳城)으로 쳐들어갑시다. 조정 안에는 이미 분노가 깊이 쌓여 있을 것이니, 필시 내응하는 자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주군의 측근에 있는 악을 제거하고 사직을 안정시켜 백성들을 위무하십시오. 어찌 망명객이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시겠습니까?”
[강성은 晉나라 도성이다.]
중이가 말했다.
“그대의 말이 비록 장하기는 하나, 도망친 아들로서 감히 부군을 놀라게 할 수는 없는 일이오.”
위주는 단지 용맹만 있는 자였기 때문에, 중이가 자기 말을 듣지 않자, 교아절치(咬牙切齒)하면서 발을 구르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여희의 무리를 맹호나 독사처럼 두려워하시니, 언제 대사를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호언이 위주에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여희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명분과 대의를 두려워하시는 것이오.”
위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옛 사람이 고풍(古風)의 시 한편을 지어, 중이를 따라 망명한 신하들의 강성함을 읊었다.
蒲城公子遭讒變 포성의 공자가 참소의 변을 당하니
輪蹄西指奔如電 서쪽을 향해 달리는 수레바퀴 번개 같도다.
擔囊仗劍何紛紛 봇짐 메고 칼 차고 뒤따르는 자 분분하니
英雄盡是山西彥 산서(山西)의 영웅들이 다 모였도다.
山西諸彥爭相從 산서의 선비들이 다투어 따르는데
吞雲吐雨星羅胸 구름을 삼키고 비를 토하는 인걸들이 별처럼 많았네.
文臣高等擎天柱 문신들은 하늘의 기둥을 떠받들고
武將雄誇駕海虹 무장들은 바다의 무지개를 용감히 타는구나.
君不見 趙成子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조성자(趙成子; 조쇠)를
冬日之溫徹人髓 겨울철의 따뜻함이 사람의 뼈까지 통하도다.
又不見 司空季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사공계(司空季; 서신)를
六韜三略饒經濟 육도삼략(六韜三略)과 경제에 통달하였도다.
二狐肺腑兼尊親 호모와 호언은 마음을 다해 부친의 명을 받들어
出奇制變圓如輪 기지(奇智)로 변을 막아내니 수레바퀴처럼 원만하도다.
魏犨矯矯人中虎 위주는 굳세어 사람 중의 호랑이요
賈佗強力輕千鈞 가타(賈佗; 호사고)는 강력하여 천균도 가벼이 든다네.
顛頡昂藏獨行意 전힐은 뜻이 높아 기개를 지녔고
直哉先軫胸無滯 강직한 선진은 가슴속에 숨기는 말이 없었다.
子推介節誰與儔 개자추의 절개는 그 누가 따를까?
百鍊堅金任磨礪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頡頏上下如掌股 상하가 조화됨이 팔다리와 같아
周流遍歷秦齊楚 秦, 齊, 楚를 주유 편력하며
行居寢食無相離 먹고 잘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고
患難之中定臣主 환난 중에도 군신의 관계를 잃지 않았도다.
古來真主百靈扶 고래로 참된 주군은 많은 신하들이 도왔으니
風虎雲龍自不孤 풍호(風虎)와 운룡(雲龍)이 있어 외롭지 않았도다.
梧桐種就鸞鳳集 오동나무에 봉황이 모여들었으니
何問朝中菀共枯 조정의 완목(菀木)과 고목(枯木)을 누가 묻느냐?
[서신(胥臣)은 식읍이 ‘구(臼)’이고, 자가 ‘계(季)’여서 ‘구계(臼季)’라고도 하였다. 문공 때 사공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사공계자(司空季子)’로도 불렸다. 호언의 아들 호사고는 진양공 때 가국(賈國)에 봉해졌기 때문에 가타(賈佗)라고도 불렸다. 제53회에, 우시가 이극 앞에서 부른 ‘가예’라는 노래에서 여희와 신생을 완목과 고목에 비유하였다.]
중이는 어렸을 때부터 겸손하고 선비들을 존중하였다. 17세 때부터 호언을 아버지처럼 섬겼고 조쇠를 스승으로 공경하고, 호사고를 형님처럼 따랐다. 대저 조야(朝野)의 지명인사(知名人士)라면 교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망명하여 많은 환난을 겪을 때에도 따르는 호걸들이 그처럼 많았던 것이다.
대부 극예(郤芮)와 여이생(呂飴甥)은 복심지우(腹心之友)였으며, 괵사(虢射)는 이오의 외삼촌이었으므로, 세 사람은 굴성에 있는 이오에게로 달려갔다.
[‘복심지우’는 마음이 맞는 매우 친한 친구를 말한다. 제39회에, 이오가 굴읍으로 갈 때 여이생은 이미 이오를 수행하였다. 극예가 친구인 여이생을 찾아간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간 사람은 셋이 아니라 둘이다.]
세 사람이 이오를 만나서 말했다.
“가화의 군사가 조만간에 닥칠 것입니다.”
이오는 즉시 병력을 모아 성을 수비하였다. 하지만 가화는 원래 이오를 반드시 잡아가려는 뜻이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성을 포위하고 사람을 은밀히 이오에게 보내 고하였다.
“공자께서는 빨리 떠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晉兵이 계속 올 것이니,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오가 극예에게 말했다.
“중이가 적나라로 갔으니, 나도 적나라로 가는 것이 어떻겠소?”
극예가 말했다.
“주군께서 두 공자가 공모했기 때문에 토벌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또 같은 나라로 망명하면 여희가 또 말을 지어낼 것입니다. 진병이 곧 적나라로 갈 것이니, 우리는 양(梁)나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나라는 秦나라와 가깝습니다. 지금 秦나라는 강성해져 가고 있으며 우리나라와 혼인한 사이이므로, 주군이 돌아가신 후에 그 병력을 빌려 귀국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오는 양나라로 달아났다.
가화는 이오를 추격하는 척하다가 돌아와, 헌공에게 이오가 이미 망명했다고 복명하였다. 헌공은 크게 노하여 말했다.
“두 아들 중에 하나도 잡지 못했으니, 대체 용병을 어떻게 한 것이냐?”
헌공은 좌우에 명하여 가화를 포박하여 참수하라고 하였다. 비정부가 아뢰었다.
“주군께서 전에 포읍과 굴읍에 성을 쌓고 병력을 모아 지키게 하셨으니. 가화의 죄가 아닙니다.”
양오도 아뢰었다.
“이오는 평범한 자이므로 염려하실 필요가 없지만, 중이는 현명하다고 이름이 알려져 있어 많은 자들이 그를 따라가 지금 조당(朝堂)이 텅 비었습니다. 게다가 적나라는 대대로 우리의 원수이므로, 적나라를 정벌하여 중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후에 필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헌공은 가화를 사면하고, 발제를 부르게 하였다. 발제는, 가화가 겨우 죽음을 면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적나라를 토벌하겠다고 자청하였다. 헌공이 허락하자, 발제는 군사를 이끌고 적나라로 쳐들어갔다. 적후(翟侯)는 채상(採桑)에 진을 벌리고, 晉軍과 대치하였다.
양군이 대치한 지 두 달이 지나자, 비정부가 헌공에게 아뢰었다.
“부자간에는 은혜를 끊을 수 없으며, 두 공자의 죄악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미 다른 나라로 망명했는데, 굳이 뒤쫓아 가서 죽이려 하는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적나라에게도 반드시 승전한다고 할 수 없는데, 공연히 우리 군사들만 피로하게 하는 것이며, 이웃 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헌공도 마음이 조금 바뀌어, 발제의 군대를 소환하였다.
헌공은 많은 공자들이 중이와 이오의 도당이어서 훗날 필시 해제의 장애물이 되지 않을까 의심하여, 공자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명을 내렸다. 晉나라 공족들은 감히 나라 안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헌공은 해제를 세자로 세웠다. 이오(二五)와 순식을 제외하고, 백관 가운데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이나 노령을 핑계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때는 주양왕 원년, 진헌공 재위 26년이었다.
그해 가을 9월, 진헌공은 제환공이 소집한 규구의 회맹에 참석하러 가던 도중 회맹이 이미 끝나 되돌아오다가 병이 들었다.
[진헌공이 규구의 회맹에 가다가 돌아온 일은, 제48회에 말미에 나왔었다.]
여희는 헌공의 발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주군께서는 골육 간에 틈이 생겨 공족들을 모두 추방하고, 첩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셨습니다. 만일 주군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저는 여자요 해제는 아직 어린애라, 여러 공자들이 타국의 원조를 받아 쳐들어오면 저희 모자는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헌공이 말했다.
“부인은 염려 마시오. 태부 순식은 충신이니, 과인이 그에게 어린 세자를 부탁하겠소.”
헌공은 순식을 불러 물었다.
“과인이 듣건대, 선비는 충(忠)과 신(信)을 근본으로 하여 입신(立身)한다고 하였소. 무엇을 일러 충신(忠信)이라 하오?”
순식이 대답했다.
“마음을 다하여 주군을 섬기는 것을 충이라 하고, 죽어도 식언(食言)하지 않는 것을 신이라 합니다.”
“과인은 태부에게 어린 세자를 부탁하고자 하는데, 허락해 주겠소?”
순식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헌공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여희의 곡성이 장막 밖에까지 들려왔다.
며칠 후 헌공은 훙거하였다. 여희는 어린 해제를 안고 나와 순식에게 맡겼는데, 이제 겨우 11세였다. 순식은 헌공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해제를 상주로 삼았고, 백관이 모두 곡읍하였다.
여희는 헌공의 유명에 따라 순식을 상경으로 삼고, 양오와 동관오를 좌우 사마에 임명하여 병력을 모아 나라 안을 순시하면서 비상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나라 안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순식에게 고한 후 시행하게 하였다. 다음 해를 신군 원년으로 하기로 하고, 제후들에게 국상을 알렸다.
첫댓글 춘추 오패는 제 환공,진의 문공,초 장왕,
오 합려,월 구천인데.
아마, 진 문공은 어린 혜제는 아닌 것 같다.
고정 독자 이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