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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13,26-33>
그 무렵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요한 14,1-2)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밝혀줍니다.
그리고 당신은 본 바를 말하니, 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아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한 토마스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요한 14,5)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4)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발언이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진리'라 함은 '진리(áληθεια) 원어의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곧 진리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임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진정 알게 됩니다.
참된 앎은 진리를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믿고서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요한 14,1)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내 있을 곳은 어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현재의 거처가 아니라 미래의 거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은 나의 거처, 곧 내 머물 곳이 어딘지 생각해볼 것입니다.
진정 내 머물 곳은 어디입니까?
어디여야 하고 죽고 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미래 거처는 죽기 전의 거처가 아니라 죽고 난 뒤의 거처인데, 옛날 우리 조상들은 골로 간다고도 하고, 혼비백산한다고도 하였지요.
골로 간다는 말은 그리 좋은 뜻이 아니지요.
골로 간다는 말의 유래와 관련하여 여러 설이 있지만 골이 관의 옛말이라는 설이 맞다면 우리의 미래 거처가 관이라는 것이니 말입니다.
혼비백산도 죽으면 혼은 날아가고, 백은 흩어진다는 뜻이니 우리의 미래 거처가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고, 혼비백산하기 전까지 100년은 묘지가 우리의 거처가 되고 그 이후에는 거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가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죽고 난 뒤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는 말도 있는데, 그러니까 죽고 난 뒤 우리 조상들의 미래 거처는 그 어떤 것이건 하나같이 있을 곳이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두가이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죽으면 명부 곧 Hades에 간다고 믿었지요.
그러니 주님께서 오늘 아버지의 집에 거처가 많고,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에 가신다는 말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머물 곳으로 아버지의 집을 제시하시며 그 자리를 준비하러 먼저 가신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골로 가거나 혼비백산하거나 구천을 떠도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우리는 두말할 것 없이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할 터인데, 지금 즉시 주님을 따라 아버지 집으로 가자고 하시면 어떨까요?
좋을까요? 기쁠까요? 망설여질까요?
좋거나 기쁘지 않다면 아버지 계신 곳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마 지금 있는 이곳이 더 좋고 그래서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고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듯이 그런 것일 겁니다.
부자 청년이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시무룩하여 떠난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지금은 이럴지라도 우리 신앙이 깊어지고 하느님 사랑이 커져 언젠가는 진정한 부활을 우리가 희망하며 살아야 할 것이고, 위령 미사 감사송처럼 영원한 거처에 대한 찬미가를 읊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주님,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흔들리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견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마저 배신하는 끔찍한 세상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가 머물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러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 속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계산하면서 결국은 주님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수단이십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길이신 그분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 그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을 추구하기에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걸으신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힘들면 힘이 들수록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요한 14,3)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에 믿음을 두는 만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흐르는 본성 때문에 사랑이 있으면 질서가 반드시 생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는 것이 당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러 가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성막을 짓기 위해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40일을 머문 것과 같습니다.
모세를 따르는 이들은 그래서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거처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거처가 곧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이 모든 신비를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정리해주십니다.
‘길’은 통로입니다.
모세가 곧 하느님께 머무는 통로가 되어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집에 머물 수 있습니다.
‘진리’는 계시입니다.
예수님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진리와 은총을 흘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은총이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시는 방법은 십자가의 자기 봉헌입니다.
항상 제물 위에 성령의 불이 내려오십니다.
성령은 생명이시기에 당신을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에게만 오십니다.
하느님을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는 자신을 죽음으로 인정하는 이와 같습니다.
자기를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 때 내려오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땠습니까?
하느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방법이 선악과를 바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생명의 주인임을 자처하려 한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느님이 생명의 원천임을 인정하는 자기 봉헌이고 제사이고 기도입니다.
미사 때 이 봉헌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성체로 모셔도 그분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생명의 주체로 여기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먹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그 사람이 생명의 주인을 자신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창조자로 두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 덕분으로 자신이 산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자기 능력으로 자기가 살고 있다고 믿는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 덕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 그 아이는 분명 다른 아이의 돈을 빼앗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와 관계가 좋다면 생명까지 주신 원천이 옆에 있기에 굳이 타인의 것에 손을 뻗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EBS 육아학교’에서 ‘물건 뺏는 첫째, 뺏기고 우는 동생’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지민이는 언니이고 지윤이는 동생인 자매입니다.
처음에 지민이는 동생이 생겼을 때 매우 잘 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지윤이가 기어서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지민이는 지윤이의 모든 물건을 다 빼앗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합니다.
엄마는 ‘둘째에게 갈 수밖에 없는 사랑에 첫째가 질투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자연스레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입니다.
유아 전문가 선생은 엄마가 두 자매와 노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민이는 지윤이가 가지고 노는 것을 다 빼앗았고, 엄마는 지윤이에게 욕심 많은 언니에게 지윤이가 양보하도록 합니다.
지금 이것은 엄마가 질서를 해치는 행위입니다.
지민이를 포기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지윤이를 어른 취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선생은 엄마에게 따끔하게 말해줍니다.
지민이를 언니로 먼저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지윤이에게 양보하게 가르치면 언니는 영원히 욕심쟁이로 남습니다.
지민이는 장난감을 빼앗긴 지윤이에게 심지어 엄마가 듣는데도 “너네 엄마 저기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윤이는 이런 지민이에게 다가가면 안 됩니다.
그에게서 흐르는 사랑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기도할 줄 모르면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서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피를 빨립니다.
만약 지민이를 포기하고 지윤이에게 더 사랑을 주면 지윤이는 나중에 엄마에게 고마워할까요?
사랑은 흐르는 것입니다.
지민이가 엄마에게 먼저 다가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윤이를 위한 공간을 언니가 마련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모두에게 흐를 수 있습니다.
언니를 그렇게 외면한 엄마가 언젠가 자신도 외면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 지윤이도 결국 엄마가 주는 사랑의 부담 때문에 엄마를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군가를 인정해준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있다고 믿어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엄마는 그것이 지민이가 아닌 동생 지윤이에게 더 있다고 믿어주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게 깨집니다.
먼저 지민이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그래서 지윤이에게 엄마에게로 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정은표 씨 가족 지웅이의 예를 들어볼까요?
정은표 씨는 김하얀 씨와 테니스를 칩니다.
그리고 지웅이에게 동생을 마중 나가라고 시킵니다.
지웅이는 아빠 미소로 동생을 돌봅니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목욕도 시켜줍니다.
어떻게 중3 아이가 남동생에게 그렇게 잘할 수 있는 것일까요?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잘한 것입니다.
지웅이를 동생의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으로 삼은 것입니다.
동생은 형 지웅이를 통해 부모에게 올 수 있고 지웅이는 부모에게 가기 위해 동생을 보살핍니다.
아마 정은표 씨에게는 자녀들보다 아내일 것입니다.
아내도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자녀들을 위해 남편에게 먼저 가야 함을 알 것입니다.
이렇게 이 가족은 사랑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흐르는지 잘 아는 가족입니다.
그래서 한 명도 소외되지 않고 에덴동산에 사는 것처럼 삽니다.
민수기에 모세의 형인 아론과 누나인 미르얌이 모세에게 대든 적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방인인 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미르얌은 하느님이 동생 모세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통하여도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이 셋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에는 질서가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길을 건너뛸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인 구름이 물러가자 미르얌의 피부에 나병과 같은 병이 일어났습니다.
깜짝 놀란 아론은 미르얌을 위해 모세에게 중재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러자 미르얌의 병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당신 사랑에 질서를 잡아주시는 이유는 모두에게 사랑이 흐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제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사제를 무시하고 신자들끼리 주님께 은총을 청한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길로 지정해 준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은총보다 오히려 안 좋은 것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라고 교회를 파견하셨는데, 그 교회를 무시하고 직접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겠다고 하는 개신교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무시하는 꼴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입니다.
사랑은 흐름이기 때문에 질서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리 들어오너라. 여기가 내 집이고 곧 네 집이란다!>
헨리 나웬 신부님이 큰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맨 적이 있습니다.
비장이 크게 파열되고, 수술 중 출혈이 심해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수술을 집도한 의료진들도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다행히 헨리 나웬 신부님은 고비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소생하게 되는데...
생사가 오락가락하던 절체절명의 순간 헨리 나웬 신부님 역시 요르단강을 건너갔다가 되돌아온 임사 체험을 했고, 그것을 회복 후 뚜렷이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체험의 조각들은 나중에 소책자로 엮어 출간되었는데, ‘거울 너머의 세계’입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은 죽음 체험의 순간이 너무나 은혜로워 의외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순간 어떤 크신 분, 따뜻한 분, 충만한 사랑으로 가득한 분의 현존이 느껴졌는데, 예수님임을 확신할 수 있었답니다.
그 순간 그분께서는 세상 자상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 헨리, 잘 왔다.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문을 하나 열어주시면서 말씀을 이어가셨답니다.
“이리 들어오너라. 여기가 내 집이고 곧 네 집이란다.”
그 순간 헨리 나웬 신부님은 자신이 평생토록 안고 살아왔던 걱정과 근심, 고통과 슬픔, 죄책감과 우울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신비 체험을 할 수 있었답니다.
크신 분의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모든 어둠이 사라지는 느낌, 다시 태어나는 느낌, 꿈에도 그리던 영원한 고향에 안착한 느낌을 받았답니다.
오늘 요한복음 사가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 체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요한복음 14장 1~3절)
따지고 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수명이 다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특급 서비스를 베푸십니다.
당신 아버지 집에 우리 거처를 마련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아버지 집으로 안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살이가 힘겨워질 때마다, 고통과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마다, 언젠가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올 때마다, 우리는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황공스럽게도 예수님께서 친히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길이 머물 자리를 마련해놓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를 그 집으로 친히 안내해주신다는 것을.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요한 14,1)
이 말씀 앞에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는 말씀이 있고(요한 13,21), 당신이 떠나신다는 말씀(요한 13,33)과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말씀이(요한 13,38) 있습니다.
그 말씀들을 듣고 제자들은 몹시 불안해졌을 것이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불안감과 두려움은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입니다.
모르니까 무서운 것입니다.
만일에 모든 일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면 용감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수난 당시에는 겁에 질려서 달아났지만,예수님 부활 후에는 모두 용감하게 순교했습니다.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을 때에는 죽음 자체를 무서워했지만,이 세상을 지나가면 저 세상에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확신하게 된 다음에는 믿음과 기쁨과 평화 속에서 순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은 곧 닥칠 일들 때문에 불안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과 용기를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불안을 극복하여라.” 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든지 간에 ‘인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는 변함이 없고 또 아무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눈앞의 일만 보고서 흔들리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크게 방해를 받은 일이 아니라 구원 사업의 한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있다고 해도, 죽음과 이별은 슬프고 아픈 일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도 신앙인은 ‘믿음과 희망’으로 사별의 슬픔과 아픔을 극복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로마 8,24ㄱ.25)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믿음, 그리고 언젠가는 하느님 나라에서 모두 함께 모이기를 바라는 희망.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 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가려고 노력하면 모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악의 세력에게 패배하는 일이 아니라 부활의 전 단계라는 것입니다.
‘다시 와서’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재림’이 아니라 ‘부활’을 뜻합니다.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뒤의 18절에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고아처럼 버려두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의 근거입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너희는 나의 수난의 의미와 결과를 알아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수난 예고와 부활 예고 말씀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 때문에 슬퍼하거나 두려워하기만 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들을 완전히 깨닫고 이해하고 믿게 된 때는 예수님 부활 후입니다(요한 2,22).
오늘날의 우리는 사도들의 그 깨달음과 믿음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그 깨달음과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5-6)
토마스 사도의 질문은 당시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는 말은 예수님 수난의 끝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길’을 모른다는 말은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로 해석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신앙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비롯해서 많은 가르침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미 가르쳐 주셨고, 그곳으로 앞장서 가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예수님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고, 또 ‘문’입니다(요한 10,9).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들과 가르침들만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는 ‘진리’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참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다른 생명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을 필요도 없고, 또 읽으면 안 되는 책들도 많습니다.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진리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의 여정 - 기쁨, 감사, 행복>
“멋지고, 아름답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에디트 수녀님!
예수님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예수님 부활상 사진에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보낸 감사의 메시지입니다.
어제는 참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평생 아름답고 거룩하게 살아 온 믿음의 수녀님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포천에 거주하고 있는, 또 피정중인 베네딕도회 수녀님들의 미사와 고백성사를 위해 수녀원을 방문했습니다.
이 또한 우연이 아닌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신록으로 빛나는 왕방산이 배경을 이루며 품에 안고 있는, 흡사 어머니의 품안에 있는 듯한 참 평화롭고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수녀원이였습니다.
순간 ‘아, 나도 산같은 배경의 품이 되어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종일관 환대의 분위기도 좋았고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맑고 평화로운 모습의 수녀님들이었습니다.
“오늘 특히 기뻐하며 감사하며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그리고 제가 방금 미사 때 한 강론 원고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바로 고백성사 보속입니다.”
‘기뻐하며 감사하며 행복하게 지내라’는 보속이니 얼마나 멋진지요!
내심 아주 흡족했습니다.
사실 기쁨과 감사보다 더 좋은 영혼의 명약도 없습니다.
참으로 기쁘게 감사하며 살면 영혼의 건강에 육신의 건강도 저절로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흡사 고백성사가 찬미와 감사의 성사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모든 수녀님들이 편안하고 행복하다 고백했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정리와 정화를 위한 아주 귀한 시간이 마련되어 기쁘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부지런히 기도하고 일하며 관상적 정주의 삶을 사시는 모습이었습니다.
90세 최고령의 건강한 릿타 수녀님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귀도 눈도 밝고 음성도 분명했습니다.
“저는 평생 성경과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만 읽습니다.
다른 책은 전혀 읽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도 매일 성서 필사를 합니다.”
몸소 작은병에 담아 온 향기로운 오미자술을 따라 주어서 한잔 마시니 영혼은 기쁨으로 취하는 듯 했습니다.
위로와 평화를 담뿍 선물로 안고 수녀원을 떠났기에 어제 소풍으로 인한 피곤도 다 풀린 듯 참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믿음이요,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믿음의 빛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의 믿음의 여정인지요.
제가 늘 강조하는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1. 품위있는 노년의 삶을 위한 우선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절대 이 우선순위가 바뀌어선 안된다.
2.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자녀들에게 물려줄 참 좋은 최고의 유산은 단 하나 하느님 믿음뿐이다.
오늘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격려하시며 위로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주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얼마나 은혜롭고 고마운 약속인지요!
그러니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전혀 안해도 됩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함께 넓은 내적공간에 내적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천국을 앞당겨 삽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의 집, 천국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느님께 이르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우리 또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되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멸망에 이르는 화려하게 포장된 거짓된 길들은, 죽음의 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또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이런 이들에게 하느님께 이르는 진리의 이정표, 생명의 이정표가 되는 예수님을 닮은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가 이의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바오로의 감동적인 설교입니다.
이미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천국을 앞당겨 사는 진리의 이정표, 생명의 이정표가 된 바오로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예수님을 살리시어 우리에게 약속을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시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바로 “오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새롭게 부활하시어 우리 모두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평화, 파스카의 생명을, 찬미와 감사의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 내용의 바로 전 대목(요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수난과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신 후,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십니다.
또 충성을 장담하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하리라고 예고하신 뒤에 바로 오늘의 대목으로 이어지지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1)
이미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심정이 어떨지 헤아리고 계십니다.
계속되는 유다인들의 배척과 공격도 힘겨웠지만, 설상가상으로 방금 스승님이 보여주신 행위는 마치 유언과도 같습니다.
당신 스스로 수난과 죽음을 받아안고 계시지만 제자들로서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비유나 상징이기를 바라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마 설마 하면서도 마음이 갈라지고 어지러워지는 건 피할 수 없었겠지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요한 14,1)
사실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입니다.
한없이 추락해 곤두박질 친 밑바닥에서, 발끝조차 디딜 곳 없는 벼랑 끝에서, 희미한 빛 한 줄기 찾을 길 없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죽음밖에 남은 게 없는 듯한 무기력 한가운데서 다시 힘을 쥐어짜서 생명과 진리를 부여잡게 만들 수 있는 실체는 믿음뿐이니까요.
삶의 질곡을 헤쳐오면서 깨지고 부서지고 갈기갈기 찢겨질망정 죽음같은 절망에 몸을 내맡기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킨 우리를 오늘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돌아보면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요한 14,3)
제자들에게 앞으로 이어질 일들을 찬찬히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자상함에 머무릅니다.
근데 예수님 참 바쁘시지요?
가서 자리를 마련하시고, 다시 오셔서 데려 가시고, 같이 계시겠다고 하시네요.
이미 세상에 오신 처음 움직임까지 치면 예수님의 동선이 아래위로 엄청나게 크고 게다가 반복적입니다.
그 반복을 조망하다 보면 아버지에게서 세상으로, 세상에서 다시 아버지께로, 또 세상으로, 또 아버지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하나의 길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 길 자체이십니다.
하강과 상승, 또 하강과 상승...
그런데 단순히 아래위를 몇 차례 오가시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영광, 고통과 위로, 죽음과 부활...
참으로 극적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계시지요.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사도 13,26)
오늘 독서 내용은 사도 바오로의 안티오키아 회당 설교 중 일부인데, 예수님의 강생, 즉 하강에서 시작해 상승과 하강, 또 상승의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고 하십니다.
"곳"이라는 표현 때문에 자칫 하늘 나라를 공간적으로만 상상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 존재, 하느님 현존, 하느님 주권,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심장... 등 그분 앞에 서면 미물에 불과한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감히) 깃들여 머무를 수 있는 거대하고 영원하며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모르는 하느님의 품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그런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품,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길이고 방향이고 동행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대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밟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올라가는 길일 수도 있고 내려가는 길일 수도 있지만 상관 없습니다.
목적지가 하느님이시니까요.
살다보면 오르막길도 만나고 내리막길도 만납니다.
마냥 올라갈 수도 없고, 마냥 내려만 가지도 않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외길도, 고민스러운 갈림길도, 심지어 막다른 길도 마주치게 되는 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순리입니다.
올라갈 때 목에 힘이 덜 들어간 만큼 내려가는 길이 유연할 것이고, 올라갈 때 어깨가 너무 치솟지 않았다면 내려갈 때 가벼울 겁니다.
우리가 걷거나 서 있는 모든 길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향해, 그분 품을 향해 그 안에 깃든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짊어지고 묵묵히 뚜벅뚜벅 나아가는 중입니다.
목적지가 분명한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앞으로 닥쳐올 수난과 고통, 죽음 앞에서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신 듯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벗님의 마음상태가 어떠세요?
뭔가 불안하고 걱정스러우세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하기도 한가요?
괜히 나이탓인지 우울해지고 삶의 의미도 재미도 별로 느끼지 못하시나요?
괜히 화가 나고 짜증스럽기도 하나요?
조급한 마음이 일고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지나요?
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내 마음이 이렇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럴 때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쓸데없는 걱정말고 그냥 부족한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되면 부정적으로 기울었던 내 마음이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야 내 맘이 밝아지고 나는 걸어가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학교에 들어가면 신학을 먼저 배울 줄 알았는데 철학을 먼저 배웠습니다.
철학이 바탕이 된 후에 신학을 배우는 것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신학이라는 보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철학, 고대철학, 중세철학, 근대철학, 형이상학, 동양철학을 배웠습니다.
자연철학에서 기억에 남은 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만물의 근원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하고, 어떤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은 공기라고 하고, 어떤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은 원자라고 하였습니다.
‘흙, 물, 공기, 빛’이 만물의 근원이라고도 합니다.
철학의 방법론도 배웠습니다.
연역법과 귀납법을 배웠고, 합리론과 경험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으로 만물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배웠고, 그것이 신학이었습니다.
신학에도 종류가 많았습니다.
성서신학, 윤리신학, 교의신학, 실천신학, 교회법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전선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한분뿐이시라고 배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자유의지의 결과는 은총과 죄라고 배웠습니다.
자유의지를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데 사용하면 은총이 주어집니다.
자유의지를 욕망과 욕심을 찾고 남을 해롭게 하는 데 사용하면 죄가 드러나고 고통이 따릅니다.
지진, 화산활동, 태풍, 화재와 같은 자연재해를 통해서 고통이 드러나지만 그것은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듯이 우리가 있는 지구도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구조적인 죄, 세상의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남용하고 잘못 사용하는 인간의 죄입니다.
전쟁과 폭력이 있습니다.
2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인간의 구조적인 죄의 결과를 드러냈습니다.
인종차별, 식민지 지배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었습니다.
신분, 혈연, 성별, 세대, 이념으로 인한 차별 또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 진리, 생명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산에 오를 때 먼저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작은 표시는 큰 힘이 됩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은 먼저 간 사람들의 땀과 노력입니다.
역사는 혼자 달리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역사는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앞선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고, 후손들에게 더 낳은 미래를 남겨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류가 만들어 온 문명이며 문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 사랑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군중들의 모욕이 있었고, 제자들의 배신이 있었고, 뼈를 깎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부활의 길이었고, 희망의 길이었고, 영원한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공식을 알면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 수 있었습니다.
원리와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지도와 나침판을 가지고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교에서는 삼강오륜을 이야기합니다.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이런 가치와 척도로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유가 없는 진리는 때로 독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광신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독점하고 억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작됩니다.
알은 깨어지는 아픔을 거쳐야만 비로소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는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끊어야만 비로소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순교하였지만, 교회는 온 세상으로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명예, 성공을 추구하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생명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어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참된 생명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과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신앙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 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 항해하는 배를 안내하는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만 밝은 빛으로 안내할 뿐입니다.
밤길을 안내하는 등대도 배가 가까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등대는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등대가 밝히는 빛을 따라서 암초를 피하고,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 3월, 사순시기에 들어서면서 외부 강의가 많아졌습니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2년간 거의 강의를 못했습니다.
강의 일정을 잡아놓고도 취소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제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말이 나오면서 강의 부탁이 계속 이어졌던 것입니다.
저를 필요로 한다는 말에 어떻게 안 가겠습니까?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같이 사는 신부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이 신부와 함께 차를 타기도 했고, 식사도 같이 했었습니다.
더군다나 약간의 감기 기운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보건소에 가서 PCR 검사를 하고 하루 동안 방안에서 자가격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온갖 걱정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강의는 어쩌지? 성지 미사는 어떻게 하지? 또 안치 예식은 누가 하지? 혹시 직원들도 확진된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바로 그때,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제가 코로나 확진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미사와 안치 예식을 부탁할 신부도 충분히 있었고, 강의는 몇 주 미루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결과는 음성 판정을 받아서 모든 일정을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깨달음 하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걱정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해야 할 것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최후 만찬 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시점에서도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격려하고 안심시킬 만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오직 믿음뿐입니다.
주님은 분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요한 14,1)
스승이신 예수님의 부재가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혼란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최악의 상황인 예수님의 죽음이지만,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거처할 자리를 마련하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많은 걱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걱정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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