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 ~ 기원전 257년 11월)
중국 전국 시대 진나라(秦)의 장군이다. 출신 자료가 거의 없다.(이 말은 출신 가문이 별 볼 일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의 소양왕 때 등용되어 수많은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BC 286년에 초나라를 공격한다. 이떼 굴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후 초나라를 여러 번 공격하여 승리한다.
(이때 양즈강 유역의 강국 초와 황허를 대표하는 강국 진의 전쟁은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고, 위,조 등 6국과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백기 장군 이야기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조나라와 붙은 장평대전이다. 장평대전에서 포로가 40만 명이었다. 백기는 이 군사들을 살려두면 훗날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였다. 포로로 대리고 있으려니 포로가 너무 많아서 식량이 문제였다. 때문에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렸다.
1995년, 중국 산서성 고평시(高平市) 영록촌(永祿村)에서 장평대전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인골(人骨)이 집단으로 파묻힌 구덩이 10여 곳이 발견되었고, 각 구덩이마다 20세~45세 사이의 남성 130여 명이 매장되어 있었다. 유골은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있어서 장평대전의 포로로 추정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소양왕은 백기를 파면하여 사오(士伍, 병졸)로 강등시키고는 음밀(陰密)로 유배보냈으나 이 때에 백기는 병이 들어서 가지 못했다. 11월에 백기에게 검을 보내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백기는 검을 받아들고 스스로 목을 베려다가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 하였다. 백기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 때에 조나라 병졸로서 항복한 자들 수십 만명을 내가 속여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렸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을만하다."라 하고는 자살하였다.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기며 그 고향에서 제사를 지내주었다.
백기의 부장으로서 장평에서 함께 조나라 군대과 싸웠던 사마근(司馬靳) 또한 백기와 마찬가지로 두우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후손이 바로 훗날에 《사기》를 편찬한 사마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