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섬 / 박주병
옛날의 한강은 참 운치가 있었다. 특히나 뚝섬이 그랬다. 넓은 모래밭이며 수양버들 버드나무 따위 우거진 나무들이며 새들이며 돛단배며 조각배며 그리고, 얼어붙은 강에서 얼음낚시를 하던 그 노인, 그 고적하고 허허한 분위기 같은 것들이 눈 감으면 아련히 떠오른다.
단기 4289년 대학교 일 학년 때였다. 뚝섬에는 친구 하나가 살고 있었다. 나는 가끔 동대문에서 동차를 타고 뚝섬으로 갔다. 봄여름에 자주 갔지만 가을에도 겨울에도 더러 갔다.
아이들처럼 물장난을 치며 깔깔거린다든가, 모래톱에 널어 둔 친구의 빨래를 걷어찬다든가, 배갈을 병째로 둘이서 번갈아 들이켠다든가, 괜히 고함을 질러댄다든가, 예쁜 여학생 곁에서 휘파람으로 새소리 흉내를 낸다든가, 강이 얼면 얼음낚시를 하는 노인 곁에 우두커니 서 있다든가 그런 것들이 마냥 즐겁기만 하던 그때 그 시절, 나는 처지가 퍽 구차스러웠지만 아, 젊어서 좋았지 않았는가!
그 친구와 나는 풀밭에 앉아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같은 교수한테 같은 형법 공부를 하면서도 그 친구는 형벌이란 범죄에 대한 응보라고 하는 객관주의 형법이론을 선호했고 나는 형벌이란 개인과 사회의 범죄로부터의 예방이라고 하는 주관주의 형법이론에 끌렸기 때문에 논쟁이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와 나와의 논쟁이 점점 재미있게 되어 간 것은 수업시간에 어느 교수한테서 들은, 옛날 정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어느 날 해남에서 그의 친구 윤영희를 만나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흉내내게 되고부터다. 한번은 방학이 끝나고 그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말을 걸기를 정다산처럼, “안 죽고 만나니 이상하구나!”(不死而相見異哉)라고 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윤영희처럼, “사람이 죽기가 어찌 쉬운 일이냐?”(人死豈易事耶)라고 했다. 내가, “사람이 죽는 건 가장 쉬운 일이야.”(人死最易事)라고 했더니 그는, “죄악이 다한 뒤에 사람이 죽지.”(惡盡然後人死)라고 했다. 나는, “복록이 다한 뒤에 사람이 죽지.”(祿盡然後人死)라고 했다. 말마다 그는 윤영희를 흉내냈고 나는 정다산을 흉내냈다. 내가 고등고시 사법과를 두고 물었더니 그는, “한 번뿐인 인생인데 한 번뿐인 젊음을 걸기엔 너무 좀스럽지.”라고 했다. 나는,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한 번뿐인 젊음을 걸어야 좀스럽지 않지.”라고 응수했다. 이때도 역시 그의 말은 윤영희 식의 말투가 되고 나의 말은 정다산 식의 말투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친구는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중학교 때 연달아 부모를 여의었다. 아버지의 청계천 봉제 공장은 삼촌이 맡아서 하게 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부도가 났다. 삼촌은 행방불명이 되고 그 가족과 이 친구는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그때 이 처지를 알고 있던 한 처녀가 친구를 거두었다. 그 처녀는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던 여자였다. 둘은 누나와 남동생이 되어 뚝섬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학비는 그녀가 해결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우락부락한 사내 둘이 쳐들어와서 그녀를 끌고 갔다. 그 후 그녀는 끝내 소식이 없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처자가 빚이 좀 있다더니….”
일찍이 풍상을 겪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그에겐 어딘가 남달리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와 기미상적(氣味相適)했지만 그는 나보다 잘생기고 속이 깊었다.
하지 아니하여도 되는 것이 하늘이라더니 가정교사 하기가 대학교수 하기보다 더 힘들다던 그 시절에 그는 부잣집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는 졸업 후 딸만 일곱인 대단한 재벌가의 맏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많은 변호사를 거느리며 한때 기업의 실세로 탁월한 경영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부르지 않아도 부른 듯이 오는 것이 운이라더니 무슨 잘못이 있었기에 군부(軍部)의 미움을 사서 끝내 회사가 망하고 말았다. 그 충격인지는 몰라도 들리는 소리로는 맑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종국에는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친구의 부침(浮沈)을 지켜보면서 인제는 죄악이니 복록이니 하는 생각이 없어졌다. 죄악이든 복록이든, 생명을 얻었다는 이 사실이 나에겐 한없이 경이로울 뿐이다. 내 이미 육허(六虛)에 두루 흐르고 오르내림이 속절없음을 알았는데 남은 세월에 뭘 더 바라랴!
그 옛날 언제나 신골을 치던 뚝섬 가는 동차가 자주 생각이 난다. 마주선 여자와 배가 서로 대여도 몸 돌릴 틈이 없어 숨막히던 그 고약한 동차가 왜 이리 그리울까. 그 동차는 다 어디로 갔을까?
노을이 지는 불그스레한 강줄기를 따라 뗏목이 흘러내릴 때도 있었지. 일제히 손을 흔들며 뚝섬이 떠나갈 듯 환호하던 사람들. 뗏목도 그립고 사람도 그립다. 다 어디로 갔을까?
뚝섬의 애가(哀歌) / 박주병
눈감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뚝섬! 1956뇬 대학 일학년 때이니 뚝섬에 가본 지가 얼마 만인가? 그 뚝섬이 지금은 어떻게 변해 있는지 가보지 않았으니 모르지만 가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자칫 깨어질세라 옛날 뚝섬의 모습을 그대로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을 뿐이다.
옛날의 뚝섬유원지는 강물이 맑고 백사장이 넓었다. 수양버들 버드나무 같은 수목이 우거졌고 온갖 새소리도 가관이었다. 특히 봄부터 가을까지는 수영하는 사람, 뱃놀이 하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간혹 유유히 흘러내리는 뗏목의 그 장쾌한 광경이며, 강이 얼면 얼음낚시를 하는 어옹의 그 적막한 분위기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잊을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 당시 뚝섬에 가면 심심찮게 「한강」이란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뚝섬이 떠나갈 듯 합창을 하기도 하고 남녀 학생이 듀엣이 되어 부르기도 했다. 하모니카로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허밍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나 또한 뚝섬에 가면 친구와 더불어 언제나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돌아다녔다.
이십대 중반의 최병호라는 서울중앙방송국 직원이,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부산방송국 뒤뜰에 판잣집을 마련하여 쓸쓸히 피난살이를 하게 되었다. 전쟁 중이지만 두고 온 뚝섬유원지의 애틋한 추억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하다가 그런 심정을 작사가도 작곡가도 아닌 그가 손수 가사를 쓰고 곡을 붙였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서 피난 온 방송국 전속 가수들에게 이 곡을 주어 출연시켜 보았지만 이 곡을 적절히 소화하지 못하여 고민에 빠졌다. 그 무렵 그는 대구 문화극장에서 방송관계의 공무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 극장에 기거하던 심연옥이라는 가수에게 이 곡을 줘서 부르게 했다. 1952년 가을의 일이었다. 첫 공연은 이듬해 초에 대구 문화극장에서 했는데 열화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고 한다. 당시는 아직 휴전을 몇 달 앞둔 전쟁 중인 때라서 노래에 담긴 최병호의 우수는 서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니 그 시절 모든 사람들의 우수이기도 하거니와 그 우수가 이십대 초반의 여가수, 심연옥의 애수 짙은 음색이며 섬섬한 자태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 많은 강가에 늘어진 버들가지는……
나는 대학을 마치고 직장 따라 이 고을 저 고을로 떠돌던 시절에도 노래를 불러야 할 계제가 되면 막판에 가서는 꼭 이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그까짓 음정 박자야 맞든 안 맞든 돼지 멱따는 소리로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며 새벽닭이 나를 따라 울 때까지 노래를 불렀던 그 허름한 술집, 술집…. 빈 주전자만 들락거려 놓고 슬슬 눈치를 살피며 자원해서 곱사춤을 추던 그 주막집 주모. 대학 예비고사에 실패하고 집을 뛰쳐나왔다는 내 누이 같던 여자. 팁을 뿌리치며 내 손등을 가만히 눌러 주던 내 누님 같던 여자, 여자…. 술값을 서로 내겠다고 허세를 부리던 친구들. 대낮 같은 달빛 아래 비틀거리며 알 수 없는 슬픔에 울먹이던 그 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던가. 그 술집 그 여자 그 친구들은 다 어찌 되었을까. 그때가 삼십대에서 초로에 막 접어들 무렵이니 아직 젊었지만 더 젊었던 시절이 애틋했던지, 뚝섬에서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돌아다니던 그때 생각에 울컥하여 노래를 다 부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요즘은 이 노래를 불러 보아도 그저 덤덤하다. 잿불이 다 식어가는 모양이다. 내가 아직 살아남아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오늘을 애틋해 할 세월이 내게 남았겠는가.
적막한 가을밤이다. 세월은 전보다 더 빠른 것 같은데 밤은 더 길고, 귀는 전만 못한데 귀뚜라미 우는 소리는 더 크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