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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향(沈香)의 역사 1 역사상 침향은 희소, 진귀하여 국왕과 고급관료의 전리품으로 썼으며 일반대중들은 대할 기회가 없었다. 침향의 신비한 약효와 미묘한 향기는 국가간 선사하는 최고급 선물이며 개인의 부유와 품격을 상징하는 물품이었다. 우리나라, 중국과 일본의 역사기록에는 국왕과 부호들이 침향에 대한 중시와 애호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침향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침향 자체가 소량의 수입품목에다 각 시대 국왕의 전리품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아래 내용들은 우리 역사 중 침향과 관련되어 있는 자료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및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에서 뽑은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新羅) 헌덕왕(憲德王) 11년 (919년) 왕이 지시하기를 “관료들이 귀중한 수입품인 침향을 앞다투어 사치품으로 쓰고 있으니 지금 이 시간부터는 진골계급을 포함하여 침향사용을 엄히 금지한다” 고려사(高麗史) (1) 약용으로 진귀한 선물 문종(文宗)의 나이가 연로하고 건강이 쇠퇴해지면서 마비 증상이 생겨 국내 많은 명의가 진료처방을 하였으나 증상이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 송(宋)나라 왕에게 신농백초(神農百草, 100종의약초)를 부탁하였으며, 이에 송나라 왕은 고려에 파견되는 88명사신중 한림(翰林)의관(名형조)과 100종류의 약재도 보냈다. 약재목록을 보면 침향이 맨앞에 열거되어 있었는데 이는 침향이 당시 얼마나 진귀한가를 잘 나타내 주는 부분이다. (高麗史9卷─世家9) (2) 외교 선물 송나라와 금(金)나라 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송나라는 고려를 우방국으로 만들기 위해 귀중한 선물을 자주 보내왔다. 한번은 송왕이 사신 서덕영(徐德榮)을 통해 금각과 은각에 침향을 가득히 채워서 고려국왕에게 보내도록 했다. (高麗史9卷─世家18) (3) 침향 조각품 已酉왕은 침향으로 불상을 조각하여 궁전에 모셔 둘 것을 지시했다. (高麗史17卷─世家17)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 침향 구하기가 힘들어 갑절을 주더라도 반드시 사도록 했다. 세종(世宗)은 중국에서 들어오는 진귀한 약재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주사(朱砂)와 용뇌(龍腦)는 비록 귀한 약재라도 중국에 가면 구할 수 있지만 침향은 중국에서도 쉽게 구하지 못한다. 그리고 왜인들 역시 널리 다른 나라에서 구하여 오는 것이니 비록 갑절을 주더라도 가하니 예조에게 이를 의논하라.” (世宗14年 서기1431年, 3집 421면) (2) 국왕의 전리품 성종(聖宗) 25년 호조참판 이집과 참의 신수근이 와서 아뢰기를 왜인들이 가격을 과도하게 올려 이로 인한 폐단이 심해짐을 우려하므로 왜인과의 사거래를 금지함이 옳다고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나머지 물건은 무역할 필요가 없으나 용뇌(龍腦), 대랑피(大浪皮), 침향(沈香)을 모두 국용으로 긴용하니 그 값을 물어서 무역하도록 한다” (聖宗25年서기2593年, 12집546면) (3) 국왕이 친전(親奠)할 때만 침향을 쓰도록 했다. “제전(祭奠)도 짐이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경우에는 침향을 쓰지 말고 자단향(紫檀香)으로 대용하도록 하라” (正祖10年서기1785年, 45집568면) 인산전(因山殿)에 날마다 다섯 번 전(奠)을 올리는데 친전할 때에는 경신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대내(大內)에서 내린 침향을 진용하고 대전(代奠)할 때에는 자단향(紫檀香)을 봉입(封入)하라고 명했는데 이는 승지의 계품(啓稟)을 따른 것이다. (順祖5年서기1804年, 47집 505면) (4) 세자의 백팔 침향염주 세자가 어려서부터 몸에 지니던 침향염주가 분실되자 궁인이 상전(上殿)에 아뢰어 의심스런 사람을 엄히 신문할 것을 청하였다. 세자는 “만일 그렇게 한다면 옥석이 함께 타는 화가 생길 것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 이러한 보물은 사람들 사이에 돌아다니다가 결국 가야 할 데로 돌아갈 것이니 다시 볼 수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하였다. 과연 그 뒤에 염주는 전매되어 궁중에 들어 왔고 대내를 수리하던 공인이 창을 뚫고 훔쳐갔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때 비로서 공인을 치죄하니 나머지 무고한 사람들은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듣는 자들이 모두 세자의 어짊과 총명에 탄복하였다 한다.(中宗36年서기1541年,18집442면) (5) 귀하여 영의정도 구하지 못했다 영상 김전이 병이 위독하여 침향강기탕을 조제해 쓰려고 하나 침향을 구하지 못하는 사실을 정원이 왕에게 아뢰자 왕이 내의(內醫) 한 사람을 보내어 합당한약을 조제하도록 지시했다. (中宗18年서기1523年, 16집193면) (6) 세조가 일본국왕에게 침향으로 만든 부처를 요구했다. “듣건데, 귀국의 그림 병풍과 그림 부채는 제조가 매우 정교하며 침향으로 새긴 부처는 더욱 진묘하다고 하니 만약 보내 준다면 어찌다 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世祖3年서기1457年, 7집 200면) (7) 명, 청(明, 淸)나라 왕의 선물 매번 조선국왕이 즉위하면 송, 청나라에서 이를 축하하기 위해 물품을 보내온다. 이때 반드시 침향과 관련된 선물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예로 침향색 소례 복갑, 침향병풍, 침향부채, 침향색 예복 등이 있다. (8) 일본과 침향 일본 정부와 상인은 조선시대 침향 공급의 주요 제공처 였다. 예로 일본 장군들이 세종에게 침향을 주요 예물로 받쳤으며, 일본국왕이 불경을 얻기 위해 조선 국왕에게 침향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9) 하사품 및 사치품 조선시대 왕들은 공로가 있는 관료들에게 침향, 금, 은으로 만든 물품을 하사했다. 이로 인해 관료들은 침향과 침향으로 만든 장식품 소유가 자신의 신분 직위의 상징이 되었다. 침향이 희소 진귀하여 간신(諫臣)들은 왕에게 침향을 절제하여 쓸 것과 관료들이 침향으로 만든 장식품 사용을 금지하도록 건의하였다. 장식품으로는 도금변 침향대, 침향대, 침향이 장식된 악기등이 있다. (10) 침향과 관련한 건축물명과 무도명 침향산 : 세종시대에 건축되어 역대왕들이 잔치를 즐기는 곳 |
첫댓글 통도사자장암카페에서..퍼온글입니다..내용중에..일본이..침향산지라는내용이잇는데...
지금의일본에서는..침향이생산되지않는걸로알고잇습니다..
현 일본열도는 과거 왜가 아니었고, 왜는 동남아시아일대로 보입니다.
이내용상으로는..그런것같습니다..전세계침향생산지는..인도북부버어마월남등지뿐인걸로보아서..그렇게추정이가능한것같습니다만..
지금은침향목이따로잇지만..옛날에는..참나무를..바다와밀물이만나는지점에뭍어서..수백면지난후에캐어서.썻다고하네요..
다른나무들도..죽어서수천년간땅속에서..썩고남은뼈대에서..기름을추출하여..침향유로..사용한것이니..자세한것은좀더알아보는것이좋을듯합니다..
부연설명 고맙습니다. 왜가 조선에서 만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데에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왜는 열대족속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