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포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다. 특별히 공포를 느끼기 위해서는 아니다. 하지만 공포영화를 통해서 느끼는 순간의 짜릿함 나도 모르게 놀라서 엉덩이가 들썩할 때의 그 등골의 서늘함이란 공포영화를 통해서 밖에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솔직히 난 공포영화를 무서워했다. 귀신이나 괴물 이런걸 굉장히 무서워했는데 어느정도냐 하면 예전에 외화 중에서 V라는 미국 미니시리즈물이 있었다. 거기서 초반에 도노반(남자 주인공)이 외계인의 비행선에 숨어 들어가서 세면장을 몰래 지켜보다가 외계인이 얼굴가죽과 안구를 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걸 보고 악몽때문에 잠을 못 잤을 정도 였으니까.(이 외에 그램린이란 영화를 보고도 잠을 못 잤던 기록적인 사건이 있었다.)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먼저 나온다.
어찌나 무서웠는지 그때 나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렇게 겁 많던 내가 언제 부턴가(그 피가 설탕물에 빨간 물감 탄것이며 그 괴물은 고무 가죽때문에 안에서는 사람이 땀띠 때문에 죽어난다는 사실을 안 그 때부터) 공포영화를 즐기기 시작했으며 진짜 무서운 귀신이 나오는 영화를 봐도 끝나고 나면 흥분상태에 그다지 오래 머물지 않게 되었다.
또한 내가 공포영화의 공포로 부터 벗어난 것은 사춘기 시절과도 맞물려 있다. 어린 시절 세상의 진정 무서운 것은 귀신이나 괴물인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사춘기시절로 접어 들면서 어느 정도 철이란 것이 들려고 했던 시절 누구나 그렇겠지만 무서운 것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성적표(^^:), 길가의 깡패, 무식하게 사람을 패는 선생님, 강도 등등 이렇게 공포의 대상들이 늘어가면서 공포 영화가 주는 공포들은 어느 덧 그림 속의 환상으로 다가왔던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미국의 B급 공포영화들이 보여주는 피 튀기는(스플래터) 장면들을 웃으면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이 보여주는 거짓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접하게 된 공포중에 조지 로메로 감독의 `좀비 3부작`과 감독 이름이 기억이 안나지만 그 유명한 `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 들을 보면서 느낀 감정들은 정말 독특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좀비영화에서 좀비보다 사람이 무섭다거나(실제로 주인공이 좀비보다 사람을 피해서 도망을 다니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사람을 납치하고 피를 뽑아서 가죽밖에 안남은 할아버지에게 먹여 장수(?)시키는 웃긴 가족들(그 할아버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미국 백인 중심 사회의 정신병적 상태를 상징한다.)을 보며 귀신도 괴물도 아닌 것이 무섭구나라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결국 나의 성장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현실을 경험하면서 공포영화에 대한 관념도 바뀌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귀신과 같은 비현실적인 공포보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들 사이의 탐식, 탐욕, 나태, 분노, 정욕, 교만, 시기. 일곱가지 죄(단테의 신곡에 명기된 7가지 죄악)들이 진정한 공포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4인용 식탁을 보면서 느낀 공포는 바로 이러한 근원에서 시작한다. 물론 표면적인 공포의 원인은 주인공들이 귀신을 본다는 것이지만 그 공포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먼저 연이가 있다. 연이는 무당의 딸이다. 귀신을 보는 능력과 다른 사람의 과거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연이는 삶 속에서 끊임 없이 고통을 받아온 캐릭터다. 그녀가 가진 능력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으로 부터 고통을 받아왔으며 그 능력을 사용한 결과도 끔찍했다. 그 결과 사람하는 사람을 잃게 되었으며 자신 또한 상실한다.
대표적으로 그녀가 휘말린 법정사건을 보여주는데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남편이 범인을 연으로 단정한체 증인을 돈으로 매수해 사건 결과를 조작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연의 남편은 그녀를 미친 것으로 단정하고 미친여자인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죽인 것으로 믿고 있다.
결국 연의 고통은 소외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병... 서로간의 소통의 단절로 인한 소외. 연 자신의 외부에 벽을 쌓고 외부와 격리 되어 있다. 그것은 본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이유에서 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신이 본 것 알고 있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으려 하며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하기 때문이며 자신을 믿었던 사람들 조차 현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현실을 기피하며 자신에게서 멀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은 고립을 면할 수 없으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이 보고 믿는 것 그리고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여 지지 않는 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니까. 그녀가 앓고 있는 정신병인 기면증은 바로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상태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죽어있는 연의 현실을 암시한다.
`연의 현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공포 중 첫번째 소외를 말한다`
다른 중심인물은 정원이다. 그는 능력있는 인테리어 장식가다. 이미 결혼을 압둔 이쁜 약혼녀도 있으며 아낌 없는 사랑을 주는 아버지와 동생까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그는 전철에서 자신의 앞과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두 아이를 두고 전철을 내린다. 다음날 뉴스에서 자신이 탄 전철에서 두 아이가 죽은 채 발견된 것을 안 그는 섬찟한 공포에 사로 잡힌다. 아무도 없는 마지막 종착역에서 보호자 없이 누워 자고 있는 두 아이를 두고 내린 것에 대한 죄책감일까?
그는 결국 두 아이의 유령을 자신의 식탁에서 보게 된다. 하지만 정원은 일상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무관심이란 일상적인 것이니까. 자신의 아이도 내다 버리는 현실에서 우연히 전철 옆에서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정원에게 있어서 이 사소한 사건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정원에게는 7살 이전의 기억이 없는데 그것은 정원이 어린 시절 경험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 때문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 달동네의 삭막함 달동네는 소외의 상징적인 장소다. 자본주의 사회의 외부인들, 지역사회에 편승하지 못하고 떠밀려 온 사람들이 모인 곳, 바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중대한 사건임에도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다. 부모의 보살핌 없이 방치된 아이, 그 아이는 청소차의 바퀴에 무참히 짓밟히지만 하수도 구멍에 유기되며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현실은 유지 된다. 아이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며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일을 시키는 아버지, 그에게 학대를 당하며 사육되는 아이는 결국 술에 취해 골아 떨어진 아버지의 옆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 같이 잠든다. 하지만 화재가 나게 되고 홀로 구조되어 살아 남은 정원, 정작 살리기 위해 벽장에 재워 놓은 동생은 타죽고 말았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들은 실존했던 사건이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사건의 당사자인 정원에게 조차도... 연은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격은 일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기억해요`라고. 결국 우리 우리 사회의 기억이라는 것은 좋은 것 행복한 사람들의 기억만을 남기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정연이 기억하는 7살 이후의 기억은 평범하지만 행복한 그런 기억들이며 이것들은 잊혀지지 않았다. 연에 의해 그 기억이 되살아 나게 된 순간 정연은 그 기억에 의해 고통스러워 하며 그 현실에서 도피하려 한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소외를 낳게 되고 돌이 킬 수 없는 결말로 나아가게 된다.
`정원은 또 하나의 사회적 폭력 망각을 의미한다`
4인용식탁은 이 영화의 제목이다. 4인용식탁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것은 현대 사회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4인용식탁은 존재 하지 않는다. 넓은 반상에서 3대가 같이 식사를 하고 그렇게 함께 모인 자리에서 단절된 변화가 아닌 동시대에 공감을 이룰 수 있는 변화를 도모한다. 하지만 산업화라는 명목하에 대가족은 흩어지고 단절되며 고립되었다.
사람이 주가 아닌 산업이 주가 되는 사회 사람들은 변화하는 사회시스템에 맞추기 위해 가족의 테두리에서 격리 되기 시작했고 가족의 적정 인원은 4인으로 규정되었으며 영화 전반에 배경이 되는 아파트라는 틀 속으로 들어간다. 아파트는 핵가족 시대를 대변하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부지에 높다랗게 서있는 건물들 그 안에서 4인으로 한정된 많은 수의 소가족이 거주하지만 두꺼운 벽으로 분단되어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옆 집에서 하도 냄새가 나서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할머니의 시체가 썩고 있었다. 이런 사고를 경험해 본적이 있는가? (내가 실제로 자원봉사 중에 경험한 사건이다. 내가 그 집 청소를 했다. 그때 처음 사람이 부패하는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이런 엽기적인 사건이 아무런 정신적 충격없이 사라지는 사회의 한 가운데에 아파트라는 문화가 서있는 것이다.
그 가정마다 4인용 식탁은 존재한다. 정원의 여자친구가 말했다. 조명을 식탁이 아닌 의자의 위치에 맞춘 것은 식탁은 식사만 하는 곳이 아니라 대화를 하는 곳이라고, 식탁에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조명의 방향까지 조절해야 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소통이 사라진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4인용 식탁은 무섭다. 그 공포의 근원을 제공하는 원인에 나 또한 포함 된다는 것. 나 역시 이 괴담의 당사자 일 수도 있다는 것. 4인용 식탁은 내게 말한다. "너는 오늘도 가족들과 4인용 식탁에 앉아 말없이 밥을 먹고 미디어에서 말하는 수많은 죽음들에 익숙해져 `또 죽었어?`라는 시큰둥한 반응으로 흘려 버릴거야, 그리고 친구가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호소할 때는 `뭘 그런걸 같구 그러냐?`면서 웃으면서 지나치겠지?"
P.S: 이 글 쓰면서 무서웠습니다. 컴퓨터 옆에 누가 같이 앉아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무심코 지나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그 괴로움을 내가 제공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세상이 넓어지고 빨라질 수록 잊고 사는게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술은 현대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나마 술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만나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도 주고 잠시나마 고통을 마비시켜 주니까요 ^^ 웬지 술 광고 하려고 글 쓴거 같은데 그건 절대 아닙니다. 아무튼 4인용식탁 여류 감독이 만들었는데 상당히 공을 들였더군요. 다만 소용돌이는 이토준지의 만화에서 연의 친구 언니의 기억은 링을 연상시키더군요. 하지만 전반적으로 정말 짜임새 있게 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화를 단순하게 보며 기존의 장르공식에 따르지 않으면 이해를 못하는 분들은 이 영화를 보는 것을 극렬히 반대합니다. 그런 분들은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한체 엉뚱한 리뷰를 남발해 타인의 올바른 가치 판단을 흐려 놓기 때문이죠, 그런 분들은 아예 안보시는게 4인용 식탁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만 줄이죠
저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무섭게 잘 봤어요..근데 친구들이.."그건 왜그런거야? 그건 무슨뜻일까?"라며 영화의 장면장면을 하나하나 알길바랬구요..전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고 보아서 확실히 그건 그거야 라고 말을 못했었죠..그래서 함 이곳에 와봣더니.아..~~~~이렇게 많이 얻어갑니다~!
항상 영화를 보면 그날은 곰곰히 생각을 합니다. 특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을 때 말이죠. 영화보고 정리를 하는 습관이 영화 보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어느 분인가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긴 했지만 영화던 소설이든 개인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를 수 밖에 없겠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저두 좀 여느 공포영화보다 재미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작품에 대한 완성도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많이 가네요. 님의 생각과 같았지만 이렇게 좋은 언어로 표현하진 못했었거든요. 고맙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무섭게 잘 봤어요..근데 친구들이.."그건 왜그런거야? 그건 무슨뜻일까?"라며 영화의 장면장면을 하나하나 알길바랬구요..전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고 보아서 확실히 그건 그거야 라고 말을 못했었죠..그래서 함 이곳에 와봣더니.아..~~~~이렇게 많이 얻어갑니다~!
정리가 잘된 글. 부럽습다
항상 영화를 보면 그날은 곰곰히 생각을 합니다. 특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을 때 말이죠. 영화보고 정리를 하는 습관이 영화 보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어느 분인가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긴 했지만 영화던 소설이든 개인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를 수 밖에 없겠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