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
정말 오랜 만에 절집 답사기를 쓴다.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중심 사칠로 종로에 있다. 지난날에 서울 인사동을 방문하면서 여러번이나 들리기도 했고, 절집 앞을 지나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찾아간 일이 없었다. 백팔사 답사의 백 여듧 번 째 절을 찾아갈 즈음에 겨울이 왔고, 이번 겨울은 지독하게 추웠다. 백팔사 답사기를 쓰지 않고 지금까지 미룬 이유이다.
이번 절 답사기는 백 여듧 번 째 절이니까 이왕이면 의미 있는 답사가 되었으면 싶었다. 마음 먹은 절은 은해사 암자인 중앙암(돌구무 절)이었다. 백흥암에서 중앙암으로 오르는 산길은 너무 가팔라. 노인네인 우리 부부가 오르에는 무리다 싶었다. 백흥암까지 차로 간다면 되리라 싶었지만, 불교 신자가 아니어서 차로는 일주문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거의 포기하고 지냈다.
이번 구정에는 서울의 아들네집에서 맞기로 했다. 서울에 간 김에 조계사에 들리자고 한 것이 조계사 답사기를 쓰게 되었다. 이왕이면 백 여듧 번 째 절집 답사이니 이름 난 절이면 좋겠다. 아들네 집에 들린 김에 조계사를 다녀오자고 집사람과 말을 맞추었다. 아들에게 조계사에 가보고 싶다고 하였더니 차로 모시겠다고 했다. 조계사는 불교 조계종의 종찰이니 백 여듧 번 째 답사로는 나름대로 의미도 있다고 여겨져서 잘 되었다 싶다.
조계사는 오래 된 절이 아니다. 역사는 짧고, 겉 모양도 보잘 것 없더라도 한국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픈 역사일망정 조금 알아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절은 조선말-왜정 초기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억불정책으로 대한제국시대는 조선 불교를 총괄하여 관할하는 중심 사찰이 없었다. 이때 일본 불교가 들어와서 총독부의 비호 아래에 조선 불교를 지배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개탄한 조선 불교는 만해 한용운이 중심이 되어서 민족적 불교를 만들려고 발벗고 나셨다. 민족주의적 불교 인사들과 손잡고 새 종단을 만들어서 한국 불교를 바로잡으려고 하였다. 그런 와중에 조계사가 태어난 것이다.
그 전인 1902년에 각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모여서 조선 사찰을 관장하는 원종종무소(圓宗宗務所)를 만들었다. 그러나 원종을 책임진 이회광이란 분이 일본의 힘을 빌려보자는 순수한 마음에서 일을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의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회광은 결과적으로 아주 나쁜 매불인사가 되었지만, 인간적으로는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보면 판단을 잘 하느냐, 아니냐가 아주아주 중요하다. 자신이 없으면 지도자로 나서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아픈 역사로 1954년에 불교 정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의의가 아주 강한 절이다.
내가 조계사를 좋아히지 않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서울의 한 복판에 있는 절이라 하더라도 절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절집 마당도 손바닥만 하다. 대웅전의 건물도 사찰 건물 형태이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초라해보인다. 절집으로서 문화적인 요소들이 결여되었다는 느낌이다. 원래는 1395년에 지었다고 하나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사대문 안에는 절집을 지을 수가 없어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의 절집 건물은 1910년에 승려들이 모금하여 지었다 함으로 문화적 가치뿐아니라 역사성도 없다.
당시는 조선 불교의 자주화와 민족자존을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각황사를 지었다. 각황사는 한국 불교의 총본산이었고, 한국 불교의 최초의 포교당이었다. 사대문 안에 자리잡은 최초의 불교 사찰이기도 했다.
1937년에 각황사를 지금의 조계사 자리로 옮기는 공사를 했다.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즉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였음으로 절 이름을 태고사라고 하였다. 대웅전의 준공 봉불식을 1938년에 이행하였다. 말하자면 지금의 대웅전은 1938년에 지었다는 것이다. 조선 본래의 모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한국 불교 총본산이라는 사찰의 대웅전으로서는 여러 면에서 초라하다고 하겠다.
왜정을 거치는 동안 일본 불교가 조선의 불교를 지배하다시피 함으로 조선 불교의 전통성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1954년에 조선 불교에 일본의 잔재를 씻어내자는 불교 정화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조계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 불교 조계종의 본산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뒤에는 내세울 것이 거의 없다는 서글픔을 안고 있어,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안타까움도 불러준다.
더구나 스님들이 막대를 휘두르면서 시주의 깡패들과 다름없는 행태들이 이 절을 배경으로 사진에 찍혀 신문의 일면을 도배하였으니, 조계사이 이미지는 더욱 나쁘다. 한편으로는 일본이라는 외세에 혼을 뻬앗기고, 이제 그 혼을 되찾으려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지만, 종교라는 개념에서는 나쁜 인상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겨울 추위가 매서운데도 아내와 나는 아들의 차를 타고 가서 절에 들렸다. 집사람은 이전의 절을 답사할 때마다 하였듯이 나에게 만 원 짜리 지폐 몇 장을 받아들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 나는 절 마당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서울 한 복판의 땅이다보니 좁을 수 밖에 없지만 절 마당은 좁았다. 많은 사람들이 마당을 메웠다. 문이 열린 법당 안을 보니, 부처님의 존상이 어마어마하게 크다. 나는 대웅전의 석가님보다는 벽에 그려진 벽화들이, 절문에 새겨진 꽃무뉘 창살들이 훨씬 더 볼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절 마당을 거니는 사람들의 행색이 대체로 초라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나누었다. 아마도 동남아의 불교 국가에서 온 근로자들이 아닌가 싶다. 손을 마주잡고 돌아다니다가 탑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그들의 모습이 경건하고 간절해보여 가슴이 찡하게 해준다. 간간이 광관객인 듯이 보이는 백인들도 눈에 뜨인다. 백인들은 카메라를 손에 들고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체구가 작고, 피부가 가므잡잡한 사람들과는 태도가 다르다.
이 절은 서울의 중심지에 위치하다보니 강남지역의 봉은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시주가 제일 많이 들어오는 절이라고 하였다. 그 시주를 어디에 쓸까. 절 답사를 다니면서 수없이 보았던, 절집 꾸미는데 쓰이는 것은 아닐까. 어디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건 절을 상품으로 하는 장사꾼 중들이나 하는 짓이고, 자기 수양을 하고, 자비를 베푸는 참 스님도 많습니다. 그럴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쁜 생각은 않기로 했다. 이런 소리도 들렸기 때문이다. ‘이 어리석은 중생아. 니 마음이나 닦아라.’
산골 절과는 다르지만, 어마어마한 규모의 일주문도 갖추었다. 大韓佛敎總本山曹溪寺(대한불교총본산조계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총본산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교하여 절마당은 좁다. 절마당의 대중전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 9호인, 500년 나이인 노송이 있다. 절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 절과는 무관해보이는데도 사람들은 그 앞에서 합장하고 머리를 숙인다. 불교가 존재하는 이유라면 대중들의 간절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금 있으니 아내가 법당에서 나왔다. 아내의 소망은 무엇일까. 그야 뻔하다. 우리 가족에 복을 주십사. 이다. 아들이 차를 가지고 우리를 태우러 왔다. 아들의 차를 타고 딸의 집으로 가면서 이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현대 불교라고 하더라도 절집은 산중에 있어야 제 맛이 난다. 종단 사찰이라는 빌미로 서울의 한 복판에 있으니, 속세의 온작 찌꺼기들이 쌓이기 마련이다. 이런 절에서 스님들이 과연 옳은 수행을 할 수 있을까.
불교의 좋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이유라면 조계사가 속세 중의 속세인 서울의 중심지에 자리잡은 탓이 아닐까.
24-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