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20일인 오늘은 ‘엉클 톰스 캐빈(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스토우 부인(이것이 더 친숙할 거예요)이 탄생한 날입니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링컨 대통령이 스토우 부인의 손을 잡고 “당신의 소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노예 해방에 동참 하게 했는지 모를거예요” 하면서 감사함을 표했다고 하더군요.
노예생활에 잘 몰랐던 사람들이나 외국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요.
기억을 더듬어 가니까 저 역시 이 책을 읽었더군요.
마지막 장면인 톰이 죽어갈 때 그를 사서 해방하기 위해 찾아왔던 전 주인의 아들과의 대면이 지금도 머리에 남아 있군요. 너무나 불쌍해서 울면서 봤을 거예요.
‘플란다스의 개’를 읽었을 때와 같이......
“흑인을 인간으로 보느냐, 말하는 동물로 보느냐”에 따라 노예 찬성론자가 되고 노예 반대 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후에 히틀러에 의한,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과 다른 민족의 열등성의 철학.
그래서 육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서도 별다른 가책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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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은 미국의 사실주의 작가이자 노예제 반대자인 헤리엇 비처 스토(1811년-1896년)가 1852년에 발표한 대표작이다. 이 소설은 노예제의 비참함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노예제 반대론자와 찬성론자간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려졌다. 반대론자들은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소재가 되었고, 찬성론자들에게는 "편견으로 가득찬 책"이었던 것이다. 폭력에 반대하다가 악마같은 노예주 레글리에게 구타당한 톰이 "비록 나의 몸은 당신에게 팔려 왔지만, 내 영혼만은 하느님의 것입니다."라고 외친 선언은 노예제에 대한 반대하는 작품의 성격을 잘 설명해준다.
《National Era》라는 잡지에 처음으로 연재되었던 첫 장편 소설이며, 1850년에 발표된 도망 노예 단속 법안과 노예 제도에 대한 반발로 쓰여졌다. 해리엇은 아이들을 모두 재운 뒤 밤마다 이 소설의 집필에 매달렸다고 한다.
[편집] 줄거리
켄터키주(州)의 지주 셸비는 노예들에게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으나, 사업에 실패하고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하여 그에게 충실하였던 노예 톰과 혼혈 노예 일라이저 사이에 태어난 다섯 살난 아들 해리를 노예상인에게 판다. 아들 해리와 헤어지게 된 것을 안 일라이저는 도망쳐 평화주의교회인 퀘이커교회 신자의 도움으로 무사히 캐나다에 당도한다. 한편 톰은 팔려가는 도중, 배가 강을 따라 내려갈 때, 같은 배의 승객인 에바의 생명을 구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의 아버지 오거스틴 세인트클레어에게 팔려 한동안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나 에바와 클레어가 연이어 죽었고 냉혹한 시몬 레글리의 손으로 넘어가 목화밭에서 혹사당하며 원래 주인 셸비의 아들이 다시 매수하려고 찾아오기 직전에 사망한다.
kys0915 님의 답변
07.10.02 19:20 답변공감 답변 내용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쓴 헤리엇 비처 스토는 1811년 미국 북부의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열두 남매중 일곱째인 해리엇은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노력파였고 글쓰기를 좋아하였다.
1832년 아버지가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 세운 새 신학교 교장이 되자 언니 캐서린과 함께 그 학교에서 일하다가 스물다섯 살때에 그 학교 신학교수인 캘빈 스토 박사와 결혼했다.
결혼하여 일곱 자녀를 둔 스토 부인은,어려운 살림을 돕기위해 틈틈이 소설을 쓰는 한편,전도를 위한 여행도 자주 했다.
켄터기 여행중 흑인노예들이 학대 받는 것을 보고 흑인을 동정하여 노예제도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50년 '도망 노예 단속법'이 제정되자 이 법이 옮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하루라도 빨리 노에 제도를 없애려고 쓴 것이 바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이다.
스토부인은 그 외에도 '드레드','목사의 청혼'.'마을사람'등의 많은 작품을 남긴 뒤,여든다섯 살인 1896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헤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1811년-1896년)는 미국의 사실주의 작가이다.
1811년 미국 코네티컷주 리치필드의 유명한 침례교 목사이자 노예찬성론자인 리만 비처의 10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해리엇이 5살 때 어머니였던 록산나 비처가 세상을 떠나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랐던 그녀는 노예라는 이유 때문에 강제로 엄마와 헤어져야 하는 흑인 소년소녀들에게 더 깊은 연민과 동정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노예제반대론자들에게 소총을 보내서 협박한 그래서 비처의 소총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 아버지 리만 비처와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신학을 공부한 해리엇은 언니인 캐서린과 초등학교를 열고 선생님으로서 재직하기도 했는데, 그녀가 처음으로 쓴 아동용 지리서는 1833년 언니 캐서린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1836년에 해리엇은 신학교 교수였던 캘빈 스토와 결혼하여 슬하에 7자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