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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주서(家獐注書)
개고기 요리를 바쳐 얻은 벼슬자리
家 : 집 가(宀/7)
獐 : 노루 장(犭/11)
注 : 부을 주(氵/5)
書 : 글 서(曰/6)
돈이나 재물을 주고 벼슬을 사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은 다양한 말이 남아있는 만큼 예부터 성했던 모양이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전가통신(錢可通神)이라 했으니 개도 멍 첨지(僉知)라며 누구나 벼슬을 사고팔 수 있다고 봤다.
중국에선 포도주 한 섬을 보내 지방관 벼슬을 땄다는 일곡양주(一斛凉州)나 빚을 내어 장수가 되고 시장판이 된 관아라는 채수시조(債帥市曹)란 말이 있다. 우리나라선 큰 재물이 아니라도 특산 기호품으로 벼슬을 따낸 예화가 많다. 조선 중기 더덕을 바쳐 사삼재상(沙蔘宰相)으로 불린 한효순(韓孝純)이나 희귀한 채소를 상납한 잡채판서(雜菜判書)의 이충(李冲)이 그들이다. 여기에 개고기 요리를 권력자에 입맛에 맞게 한 덕에 벼락출세한 중종(中宗) 때의 이팽수(李彭壽)가 더해진다.
중종실록 78권, 중종 29년 9월 3일 2번째기사
以趙仁奎爲承政院左副承旨, 南世健爲同副承旨, 蔡無擇爲弘文館直提學, 金紀爲典翰, 安玹爲司諫院司諫, 全公侃爲獻納, 申石澗爲弘文館副校理, 李彭壽爲承政院注書.
조인규(趙仁奎)를 승정원 좌부승지에, 남세건(南世健)을 동부승지에, 채무택(蔡無擇)을 홍문관 직제학에, 김기(金紀)를 전한(典翰)에, 안현(安玹)을 사간원 사간에, 전공간(全公侃)을 헌납(獻納)에, 신석간(申石澗)을 홍문관 부교리에, 이팽수(李彭壽)를 승정원 주서에 제수하였다.
史臣曰: 全公侃, 江陵人也. 與沈彦光同里相親, 因彦光吹噓, 入薇垣. 人皆腹非, 而不敢言, 當時之事, 可謂寒心.
사신은 논한다. 전공간은 강릉 사람이다. 심언광(沈彦光)과 한마을에 살면서 서로 친했다. 언광의 추천으로 미원(薇院: 사간원의 별칭)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 감히 말을 못했다. 당시의 일이 한심하다고 할 만하다.
李彭壽, 無政院之薦, 而金安老擅擬之. 初彭壽與安老, 居于一鄕, 而彭壽之父, 爲安老家臣, 安老視彭壽如子弟.
이팽수(李彭壽)는 정원의 천거도 없었는데 김안로가 마음대로 천거한 것이었다. 본시 팽수는 안로와 한마을에 살았으며 팽수의 아비는 안로의 가신(家臣)이었으므로, 안로는 팽수를 자제처럼 여겼다.
安老好狗肉, 彭壽爲奉常寺參奉, 擇貿肥大狗餉之, 每適其口, 安老稱善不已. 一日忽置淸班, 時人謂之家獐注書.
안로는 개고기를 좋아했는데, 팽수가 봉상시 참봉(奉常寺參奉)으로 있을 적에 크고 살진 개를 골라 사다가 먹여 늘 그의 구미를 맞추었으므로 안로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청반(淸班)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고 불렀다.
조선 중종(中宗)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개고기를 매우 좋아하여 봉상시(奉常寺) 참봉 이팽수(李彭壽)가 늘 개를 대어 주었다. 그리하여 이팽수를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에 임명하자,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겨 '개장주서'라고 하였다.
왕실과 민간 모두 널리 먹었다는 개장국은 집에서 기르는 노루(家獐)라 했는데 임금의 사돈인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무척 즐겼다. 어릴 때 같은 동네서 자란 이팽수가 국가제사 관장의 봉상시(奉常寺)에 말단으로 있으면서 맛좋은 개고기 요리를 자주 상납했다.
틈만 나면 이팽수의 개고기 요리를 일품이라며 칭찬하던 김안로가 어느 때 그를 임금 비서실인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라는 정7품으로 발탁했다. 주위의 추천도 없었는데 벼락출세하자 면전에서 반대는 못하고 사신이 말한 것이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나온다.
이팽수가 개고기를 좋아한 김안로에게 크고 살진 개를 골라 구미를 맞췄으므로 매번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받았다며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청반에 올랐으므로(一日忽置淸班/ 일일홀치청반)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개고기 주서라고 불렀다(時人謂之家獐注書/ 시인위지가장주서)." 청반(淸班)은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앞날이 보장되는 벼슬이었다.
뒤에 따르는 이야기도 쓴웃음을 짓게 한다. 이팽수의 출세를 보고 역시 봉상시의 진복창(陳復昌)이 매일같이 김안로에게 개고기 구이를 갖다 바쳤고 개 요리는 자신이 제일이라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고관의 입맛에 안 맞았는지 벼슬은 오르지 않고 비웃음만 샀다.
돈이면 죄를 없게도 하고 죽음도 면할 수 있다고 믿는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의 세상은 옳을 수가 없다. 예전의 벼슬자리는 전제(專制)의 절대자와 간신이 쥐락펴락했으니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은 어떨까. 공직이나 대기업 등은 공채(公採)가 확립돼 있으나 그렇지 않은 정무적인 자리가 많다.
당파적 충성에 좌우되는 현대판 엽관제(獵官制)는 낙하산 인사에서 시퍼렇게 살아 있다. 정권이 바뀌기 전에 한 몫 한다며 마구잡이 요직에 내리꽂는 현상은 민주화된 이후에도 욕하면서 닮아간다. 능력을 감안하지 않은 인사도 수시로 나타난다. 개고기 주사를 떳떳하게 욕할 수도 없는 세상이다.
의주 판관 최윤복(崔閏福)의 뇌물 상납사건
1423년(세종 5년) 10월 초, 가을이 한창 무르익는 들판을 따라 한 선비가 장기로 유배를 왔다. 바로 그해 9월 26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최윤복(崔閏福)이란 사람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의주 판관으로 있었다.
그는 개국공신의 아들이었다. 윤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고려말 조선초 경상도 창원 출신 무신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다. 그의 친형인 최윤덕(崔閏德)은 꽤 유명하다. 세종 때 김종서와 함께 평안도와 함경도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낸 뒤 4군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우리나라의 북쪽 국경선을 확정지은 인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무인 출신이었지만 정승까지 역임하고 세종으로부터 궤장(나라에서 국가에 유공한 늙은 대신에게 내려 주던 궤와 지팡이)까지 하사받았다. 괜찮은 가문의 엄격하고 인자한 형님 밑에서 자란 최윤복이었지만, 불미스럽게도 그는 ‘뇌물공여’ 사건을 저지르고 장기로 유배를 오는 신세가 되었다.
세상 어디든 뇌물이 없는 사회는 없었다.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에도 뇌물은 성행했다. 조선시대의 뇌물은 ‘분경(奔競)’과 함께 따라다녔다. '분경'이란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추구함'을 가리키는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이다. 즉 뇌물을 들고 권세가의 집으로 찾아가 청탁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관직 사냥이라고 하여 '엽관운동(獵官運動)'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를 연 태조부터 적극적으로 뇌물 타파를 외치며 분경을 없애려고 했다. 태조는 뇌물로 관직을 사고파는 엽관운동이 고려 말부터 성행했던 것을 꼬집으며 이를 없애려 했지만,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뇌물 수수가 만연했다. 정종(定宗)이 분경을 금지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는데도 실효성은 별로 없었다. 태종 때는 김점(金漸)의 뇌물 비리가 조선 천지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는 후궁인 숙공궁주((肅恭宮主)의 아버지로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너무 많은 뇌물을 받아 문제를 일으켰다. 여러 고을에서 뇌물을 거둬들인 것은 물론 감형을 원하는 죄수들에게도 뇌물을 요구했다. 북경에서 사신과 함께 돌아오는 상인(商人)들에게는 뇌물을 받아야만 입국을 허락했을 정도였다. 이를 알고 김점을 문책하던 태종은 “숙공궁주가 그대로 궁중에 있으면 공정한 의(義)와 사정(私情)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라며 후궁을 궐 밖으로 내쫓았다.
이후 태종은 분경금지를 법제화한다. 하지만 분경은 그 특성상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지라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다.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들이 한양으로의 출셋길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중앙 권력자들에게 줄을 대고 노골적으로 뇌물을 바쳤던 것이다. 군대 징집이나 세금 면제, 형벌 감형을 청탁하는 뇌물도 많았다.
그렇게 주고받은 뇌물은 보편적으로는 은으로 만든 돈이나 토지문서, 노비 등이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으로 확인해 보면 특이한 뇌물도 있다. 더덕, 문어, 노루나 사슴가죽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개고기나 잡채도 뇌물로 제공되었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뇌물의 종류가 달랐던 것이다.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는 아들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하게 되자 왕과 사돈지간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위세가 등등했던 김안로는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를 안 이팽수(李彭壽)란 사람은 봉상시(奉常寺: 국가제사를 관장하는 관청) 참봉(종9품)으로 있으면서 김안로에게 개고기를 자주 상납했다. 그는 크고 살찐 개를 골라 견적(개고기 구이)을 해서 매번 김안로의 구미를 맞췄다고 한다.
이후 김안로는 그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임금 비서실의 정7품)에 등용시켜 주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팽수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가장(家獐)은 '삶은 개고기(烹炙犬肉)'를 가리킨다. 결국 이팽수는 '개고기로 주서가 된 사람'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조선왕조실록에 남겼다.
이팽수가 개고기 뇌물로 출세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뜬 이가 또 있었다. 바로 진복창(陳復昌)이란 인물이었다. 진복창은 한때 이팽수와 함께 봉상시 주부(정6품)로 근무한 적이 있던 직장동료였다. 그는 이팽수가 한 것처럼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가 하면,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설명했다. 하지만 김안로의 입에는 진복창의 개요리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안로는 ‘이팽수의 개고기보다 맛이 없다’는 질책까지 하며 진복창의 청탁은 들어주지 않았다.
실록에는 광해군 때의 '잡채 판서' 그리고 '더덕 정승'도 기술되어 있다. 광해군에게 잡채를 뇌물로 바친 사람은 이충(李沖)이라는 사람이었다. 이충은 갖은 채소를 볶아 만든 잡채를 광해군에게 올렸는데,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그 덕택에 이충은 호조판서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가 길에 오가면, 삼척동자도 그를 알아보고 '잡채 판서'라고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그를 만나면 너나없이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겼던 것이다.
더덕 정승은 더덕으로 좌의정까지 한 한효순(韓孝純)을 일컫는다. 옛날엔 더덕을 모래밭에서 나는 인삼이라고 해서 사삼(沙蔘)이라고 했다. 한효순은 이 더덕으로 꿀떡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쳐 총애를 입고 정승이 되었다. '사삼 정승의 권세가 처음에 중하더니,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구나'라고 이들을 조롱하는 풍자시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실록에는 세종 때 대사헌이던 신개(申槪)가 강원도 고성 수령 최치(崔値)라는 자로부터 문어 두 마리를 뇌물로 받았다가 구설에 오르자 스스로 사직 상소를 올린 기록도 보인다.
이처럼 뇌물의 종류는 천차만별이지만, 최윤복이 뇌물로 쓴 물건은 노루 및 사슴가죽과 살코기였다. 조선시대 노루와 사슴고기는 왕실의 각종 제의에 중요한 제물(祭物)로 쓰였다. 사슴고기로 만든 것은 건녹포(乾鹿脯)라 하고, 노루고기로 만든 것은 건장포(乾獐脯)라 한다. 최윤복은 이것들을 서울과 지방의 여러 곳에 뇌물로 쓰고, 또 졸곡(卒哭) 전에 포(脯)를 서로 증정하였다는 것이다.
졸곡제사는 사람이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가려서 지내는 것인데, 마침 이때가 태종이 죽고 아직 졸곡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의주목관(義州牧官) 창고에 있던 그 노루와 사슴 고기들은 공물로 받아 둔 것들이었다. 당연히 궁중에 써야할 것들이었는데, 이를 사사로이 뇌물로 제공했으니 사건이 더 커지게 된 것이다.
왕실에서 쓰는 포육(脯肉)은 공물로 받는 것 외에도 왕실의 사냥인 강무(講武) 때 잡은 노루와 사슴으로도 마련하였다. 더러는 음식 조리를 담당하는 별사옹(別司饔)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직접 만들게도 하였다. 녹포로 만들지 않은 고기는 소금에 절여 숙성 시킨 녹해를 만들어서 제례에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윤복이 이것들을 뇌물로 쓸 세종(世宗)대에는 인구가 늘어나 산을 개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노루와 사슴이 매우 귀했다. 그럼에도 중앙의 각 관사(官司)에서는 사용량이 줄지 않아 지방관들에게 공납을 독촉했다. 이를 조달하지 못해 숫자를 감하거나 제외해 달라는 충청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의 문서는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노루와 사슴 건포(乾脯)를 준비하기 위해 사냥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이 산과 들을 덮고 열흘 동안이나 사냥을 해도 잡은 짐승은 두세 마리에 불과했다. 이래서는 도저히 할당량을 조달하지 못하겠으니 공물에서 제외해 달라는 지방수령들의 다급한 상소가 빗발쳤음은 물론이다.
공급이 달렸으므로 궁중의 의료와 시약(施藥)을 관장하는 전의감(典醫監)에 바치는 녹각(鹿角)과 여러 도(道)의 군기(軍器) 장식(粧飾)에 사용되는 사슴뿔 한 척(隻) 값이 면포로는 한 필이 넘었고, 미곡으로는 20여 말(斗)에 달한다고 했다. 이렇게 귀한 노루와 사슴고기가 마침 의주목 관아에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의주목사(義州牧使)는 김을신(金乙辛)이었는데, 그도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 생각은 않고 판관과 똑 같이 권력 있는 집과 호세(豪勢)한 곳에 공공연히 뇌물보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의주는 국경지역에 있었으므로 명나라로 드나드는 고관대작들이 반드시 머물고 가는 곳이었다. 관리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이조(吏曹)의 요직자나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정승들이 주로 사신으로 임명되어 이곳을 지나쳤다.
이 사건에서 뇌물을 받은 사람은 형조판서 이발(李潑)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수(李隨)였다. 이들은 태종(太宗)이 돌아가신 것을 명나라에 알리기 위한 부고사(訃告使)와 부사(副使)가 되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목에 들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목사와 판관이 모두 포수(脯脩: 얇게 잘라서 말린 고기)를 뇌물로 제공했던 것이다.
의금부에서 관리를 파견해서 감찰을 해보니 그동안 김을신이 관청 안의 가죽과 살코기를 뇌물로 쓴 장물(贓物)이 1백 89관이었고, 최윤복이 거들낸 게 13관이나 되었다. 1423년 9월 26일, 의금부에서는 이 사건의 죄책을 물어 김을신을 경상도 안음으로, 최윤복을 경상도 장기현으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그 뇌물로 쓴 물건들은 한성부로 하여금 추징하도록 했다.
하지만 뇌물을 받은 이발(李潑)과 이수(李隨)는 면직되는데 그쳤다. 요즘과 다르게 뇌물을 받는 사람보다도 주는 사람을 더 가혹하게 처벌했던 이상한 시대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언제 자신들도 같은 처지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정자(爲政者)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이때 장기로 유배를 온 최윤복은 1년 4개월이 지난 1425년 1월에야 풀려났지만 바로 사망하였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관료 길에 들어서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지만, 후회와 괴로움을 곱씹다가 인생을 마친 것이다. 사망 후인 1425년 11월 20일에야 사면이 된다. 공신의 아들임이 참작되었기 때문이다.
뇌물과 청탁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한 순간 잘못된 선택들이 후대의 냉혹한 평가를 받고, 역사에 우셋거리로 남아 회자된다는 사실을 이 사건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역사는 미래라고 하지 않았나.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앞날을 예찰(豫察)하라는 귀중한 울림이다.
뇌물, 역사에 기록되다
자고이래로 뇌물이 없는 사회는 없었다. 고려말이나 조선시대에도 뇌물은 성행했다. 실록에 기록된 조선시대 뇌물사건은 무려 3000건이나 된다. 뇌물의 형태는 은자(은으로 만든 돈), 토지문서 외에도 노비, 개고기, 누에고치같은 특이한 뇌물도 있었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뇌물의 종류가 달랐던 것이다.
김도련게이트-132명의 노비를
고려말, '김원룡'이라는 사람이 권문세족이었던 '임견미'에게 뇌물을 주고 426명의 양인을 노비로 만든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임견미가 사망한후 불법으로 노비가 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양인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김원룡의 아들 '김도련'이 노비를 되찾으려고 가짜 노비문서를 관청에 제공하고 원하는 판결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고관들에게 뇌물을 뿌린 것이다.
1426년(세종8) 3월4일, 사헌부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전현직 우의정을 비롯하여 병조판서 등 중앙조정의 관료들이 김도련으로부터 뇌물을 받고서, 노비재판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그들이 받았다는 뇌물이 수십명에 달하는 노비들이었다. 행대감찰(사헌부가 각도에 파견하는 감찰) 조사에 따르면 뇌물을 받은자가 늘어났고 김도련은 당시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노비 36명을 뇌물로 바친 것을 포함하여 17명의 관리들에게 132명의 노비를 뇌물로 바친 것이다.
개고기구이는 이팽수
1534년(중종29) '이팽수'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사람의 별명이 '가장주서(家獐注書)'였다. '가장'은 '개고기'를 뜻하고, '주서'는 정7품의 벼슬이었다. 이팽수라는 인물은 개고기요리를 뇌물로 써서 주사로 승진했다는 것이다. 중종과 사돈지간으로 위세등등했던 '김안로'는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팽수가 봉상시(국가제사를 관장하는 관청) 참봉(종9품)으로 있을적에 개고기 애호가였던 당대의 권력가 김안로에게 개요리를 바침으로써 환심을 샀다는 것이다. 이후 김안로는 그를 승정원주서(비서실의정7품)에 등용시켜주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팽수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이팽수가 개고기 뇌물로 출세했다는 소식에 부화뇌동한 자가 '진복창'이란 인물이다. 진복창은 1535년(중종35)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봉상시주부(정6품)라는 하급관리에 임명되었는데 그 역시 개고기구이로 김안로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진복창이 이팽수처럼 높이 발탁되지 못했다.
1536년(중종31) 실록에는 “진복창이 봉상시주부가 돼서도 개고기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하는가 하면, 매번 좌중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떠벌였다. 진복창은 자신이 구운 개고기의 맛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올렸지만 김안로는 오히려 이팽수가 구운 견적의 맛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누에고치는 누구의 뇌물인고
명종대 20년동안 권력을 독점한 척신(戚臣) '윤원형'은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 빈자리에 새로운 사람을 임명해야 했다. 당시 충주부자 '김개'는 윤원형에게 누에고치 200석을 뇌물로 바치고 벼슬을 청탁했으나 벼슬을 얻지 못했다. 워낙 뇌물 바치는 사람이 많아서 뇌물로 받은 누에고치만 생각나고, 김개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벼슬자리는 누에고치와 이름이 같은 고치(高致)라는 사람이 차지하게 되었다. 고치는 영문도 모르고 관리가 되었는데, 나중에 고치가 인사왔을때 윤원형은 자기가 실수한 것을 알았지만 뇌물을 받은 것을 발설할 수도 없어서 임명한 것을 물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분경금지법을 통해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방지하는 한편, 관료들은 공직자가 하지말아야 할 네가지와 거절해야 할 세가지를 일컫는 사불삼거(四不三拒)를 불문율로 삼았다. '사불(四不)'은 부업을 하지 않고, 땅을 사지 않고, 집을 늘리지 않고, 부임지 특산물을 탐하지 않는 것이고, '삼거(三拒)'는 윗사람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고, 청을 들어준 것에 답례하지 않으며, 경조사에 부조를 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주서(家獐注書)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는 말이 있다. 돈으로 관직을 사는 사람들이 늘면서 아무나 벼슬을 하는 세태를 꼬집은 우리 속담이다. '첨지(僉知)’란 조선 시대 중추부의 정3품 고위직을 가리킨다.
멍첨지와 비슷한 뜻을 지닌 말이 '개고기 주사'이다.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가수 김해송은 '개고기 주사'라는 코믹송을 불러 인기를 끌었다. "다 떨어진 중절모자, 빵꾸난 당꼬바지. 꽁초를 먹더래도 내 멋이야. 댁더러 밥 달랬소. 아, 댁더러 옷 달랬소. 쓰디쓴 막걸리나마 권하여 보았건디. 이래 봬도 종로에서는 개고기 주사. 나 몰라, 개고기 주사를."
개고기주사는 원래 매관매직을 풍자한 말이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1534년 이팽수가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 주사에 해당하는 '승정원 주서'에 올랐다. 9급 말단에서 정 7품으로 벼락 출세를 한 것이다. 출세의 비결은 개고기 뇌물이었다. 이팽수가 당대의 실력자인 김안로에게 맛좋은 개고기 요리를 바쳐 환심을 샀던 것이다. 사람들은 개고기를 의미하는 가장(家獐)을 넣어 그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고 불렀다. 노랫말 속의 개고기 주사는 '가장주서'를 일컫는다.
매관매직은 조선 말기에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나라의 쇠망을 앞당겼다. 조정에선 텅 빈 나라 곳간을 채우기 위해 직접 벼슬을 팔았다. 명성황후의 친족인 민영휘는 매달 5~6차례 이조와 병조의 인사 담당자들을 불러 벼슬을 많이 팔도록 독려했다. 관직에는 공식 가격이 책정됐다. 1866년의 시세로는 감사 2만~5만냥, 부사 2000~5000냥, 군수와 현령 1000~2000냥이었다고 한다.
조정과 권세가들이 경쟁적으로 관직을 팔다 보니 1년 사이에 군수가 5번이나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관직을 산 관료들이 본전을 뽑으려고 백성들을 수탈하면서 백성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란 탓인지 관에서 먼저 관직을 내리고 벼슬 값을 후불로 받기 시작했다.
1910년 망국 후에 음독 자결한 우국지사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당시의 실상을 이렇게 전한다. 충청도 어느 고을에 강씨 성을 가진 과부가 살고 있었다. 집은 부유했으나 자식이 없어 '복구'라는 개를 길렀다. 과부가 "복구야" 하고 불렀는데, 마침 지나가던 관리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복구를 남자로 착각한 관리는 '강복구'에게 토목공사 등을 감독하는 감역관 벼슬을 내리고 과부에게 벼슬 값을 요구했다. 사람들은 개에게 내린 감역 벼슬이라는 뜻으로 복구를 '구감역(狗監役)'으로 불렀다.
이역만리에서 조선의 패망 소식을 접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탄식이다.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그것은 나 자신이오. 내가 왜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국을 팔기를 허용하였소. 망국의 책임자는 바로 나 자신이오.” 망국의 원인을 우리 내부에서 찾은 선각자의 대성(大聲)이 가슴을 울린다.
'맹자'는 매사 남 탓만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런 뇌성(雷聲)을 울렸다. "무릇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후에 남이 업신여기고,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 공격한 뒤에 남이 공격한다." 요즘 땅 투기와 권력형 부패를 일삼는 공직자들이 도처에 즐비하다. 나라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토착왜구들이다. 그들이 바로 '이완용'이다.
▶️ 家(집 가, 여자 고)는 ❶회의문자로 宊(가)와 동자(同字)이고, 姑(시어미 고)와 통한다.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안에서 돼지(豕)를 기른다는 뜻을 합(合)하여 집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家자는 '집'이나 '가족'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家자는 宀(집 면)자와 豕(돼지 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예로부터 소나 돼지와 같은 가축은 집안의 귀중한 재산이었다. 그러니 도둑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곁에 두는 것이 가장 안전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돼지우리를 반지하에 두고 그 위로는 사람이 함께 사는 특이한 구조의 집을 지었었다. 아직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중국의 일부 소수민족은 집안에 돼지를 기르고 있다. 家자는 그러한 가옥의 형태가 반영된 글자이다. 그래서 家(가)는 (1)일부 한자어 명사(名詞) 다음에 붙어 그 방면의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나 또는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 (2)어떤 일에 능하거나 또는 지식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란 뜻을 나타내는 말 (3)어떤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4)성 다음에 붙어, 그 집안을 나타내는 말 (5)호적상, 한 가(家)로 등록된 친족의 단체 등의 뜻으로 ①집 ②자기(自己) 집 ③가족(家族) ④집안 ⑤문벌(門閥) ⑥지체(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⑦조정 ⑧도성(都城) ⑨전문가 ⑩정통한 사람 ⑪용한이 ⑫학자(學者) ⑬학파(學派) ⑭남편(男便) ⑮아내 ⑯마나님(나이가 많은 부인을 높여 이르는 말) ⑰살림살이 ⑱집을 장만하여 살다 그리고 ⓐ여자(女子)(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집 당(堂), 집 우(宇), 집 택(宅), 집 실(室), 집 궁(宮) 등이 있다. 용례로는 부부를 기초로 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을 가족(家族), 한 가족으로서의 집안을 가정(家庭), 집안 살림에 관한 일을 가사(家事), 집에서 나가 돌아오지 않음을 가출(家出),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는 집안의 보물을 가보(家寶), 집안 식구를 가구(家口), 남에게 대하여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을 가친(家親), 남에게 자기 아들을 이르는 말을 가아(家兒), 집안 살림의 수입과 지출의 상태를 가계(家計), 한 집안 사람을 가인(家人), 사람이 들어가 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가옥(家屋), 집안이나 문중을 가문(家門), 집안의 어른을 가장(家長), 집안 어른이 그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을 가훈(家訓),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에게 길들여져 집에서 기르는 짐승을 가축(家畜), 집안 살림에 관한 일을 가사(家事), 한 집안의 대대로 이어 온 계통을 가계(家系),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집집마다 또는 모든 집을 일컫는 말을 가가호호(家家戶戶), 빈한한 집안이라서 아무것도 없고 네 벽만 서 있다는 뜻으로 살림이 심히 구차함을 이르는 말을 가도벽립(家徒壁立), 집안이 네 벽 뿐이라는 뜻으로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도사벽(家徒四壁), 석은 한 항아리고 담은 두 항아리의 뜻으로 집에 조금도 없다는 말로 집에 재물의 여유가 조금도 없음을 이르는 말을 가무담석(家無擔石), 한 집안에 주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군신의 다름을 이르는 말을 가무이주(家無二主), 집에서 먹는 평소의 식사라는 뜻으로 일상사나 당연지사를 이르는 말을 가상다반(家常茶飯), 타국이나 타향에 살 때는 고향 가족의 편지가 더없이 반갑고 그 소식의 값이 황금 만 냥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을 가서만금(家書萬金), 집집마다 알려주어 알아듣게 한다는 뜻으로 누구나 다 아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유호효(家喩戶曉), 집의 닭을 미워하고 들의 물오리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일상 흔한 것을 피하고 새로운 것 진기한 것을 존중함을 비유하는 말을 가계야목(家鷄野鶩), 집의 닭을 미워하고 들의 꿩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아내를 소박하고 첩을 좋아함 또는 흔한 것을 멀리하고 언제나 새롭고 진귀한 것을 중히 여김을 이르는 말을 가계야치(家鷄野雉), 집집마다 살림이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 살기 좋음을 이르는 말을 가급인족(家給人足), 집안이 가난하여 혼백이 땅에 떨어진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뜻을 얻지 못하고 실의에 빠짐을 이르는 말을 가빈낙탁(家貧落魄),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었을 때는 마음에 들지 않은 벼슬자리라도 얻어서 어버이를 봉양해야 한다는 말을 가빈친로(家貧親老) 등에 쓰인다.
▶️ 獐(노루 장)은 형성문자로 麞(장)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개사슴록변(犭=犬; 개)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章(장)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獐(노루 장)은 노루(사슴과의 포유류)를 뜻하는 말이다. 용례로는 노루의 새끼를 장고(獐羔), 노루의 굳은 뿔을 장각(獐角), 노루의 털을 장모(獐毛), 노루의 가죽을 장피(獐皮), 노루의 피를 장혈(獐血), 노루의 간을 장간(獐肝), 노루고기로 만든 포를 장포(獐脯), 노루의 앞다리가 몸뚱이에 붙어 있는 안쪽의 오목한 곳에 난 털을 장액(獐腋), 돋아 나와서 채 다 굳지 아니한 노루의 뿔을 장용(獐茸), 과녁에 박힌 화살을 뽑는 제구를 장족(獐足), 열병을 일으킬 만한 독기 있는 숲을 장림(獐林), 말린 노루 고기를 건장(乾獐), 살아 있는 노루를 생장(生獐), 털 빛이 온통 흰 노루를 백장(白獐), 자줏빛의 노루를 자장(紫獐), 고라니를 이르는 말을 보장(甫獐), 꼬리가 짧은 개를 이르는 말을 장자구(獐子狗), 털이 붙은 노루 가죽을 모장피(毛獐皮), 다뤄서 녹신녹신하게 만든 노루 가죽을 숙장피(熟獐皮), 노루 친 막대기라는 뜻으로 한 번 우연히 물건을 주우면 항상 요행을 바라게 된다는 뜻의 속담을 타장장(打獐杖), 노루잠에 개꿈이라는 뜻으로 같잖은 꿈 이야기를 늘어 놓는 것을 야유하여 이르는 말을 장수견몽(獐睡犬夢), 궁노루 즉 사향노루는 사납고 날쌔므로 단단히 묶어야 한다는 뜻으로 아랫사람을 지나치게 부드럽게 대해 주면 버릇 없이 굴게 되므로 단단히 단속해야 한다를 이르는 말을 여박궁장(如縛宮獐), 노루를 쫓다가 토끼를 잃는다는 뜻으로 먼 데 있는 것을 가지려고 하다가 이미 가진 것조차도 잃어 버린다를 이르는 말을 주장낙토(走獐落兔), 노루를 피하려다가 범을 만난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작은 해를 피하려다가 도리어 큰 화를 당함을 이르는 말을 피장봉호(避獐逢虎) 등에 쓰인다.
▶️ 注(부을 주/주를 달 주)는 ❶형성문자로 註(주)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主(주)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主(주)는 등불의 중심, 물건이 한군데 집중(集中)하는 것을 나타낸다. 注(주)는 물이 한군데로 흐르는 일, 또 물을 붓듯이 어려운 말을 쉽게 설명하는 일을 말하는데, 나중에 써놓다, 설명하다의 뜻에는 註(주)라고도 썼으나 지금은 그 뜻에도 注(주)를 쓴다. ❷형성문자로 注자는 '붓다'나 '(물을)대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注자는 水(물 수)자와 主(주인 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主자는 '주인'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무언가를 들이부어 채우는 것을 '주입(注入)하다'라고 한다. 注자는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집어넣음을 뜻하는 글자이다. 사전상으로는 注자를 '물댈 주'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물을 대다'라는 것은 무언가를 '채워 넣다'나 '주입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注(주)는 ①붓다(액체나 가루 따위를 다른 곳에 담다) ②물을 대다 ③뜻을 두다 ④흐르다 ⑤끼우다 ⑥모으다 ⑦비가 내리다 ⑧치다 ⑨주를 달다 ⑩적다, 기록하다 ⑪별의 이름 ⑫그릇 ⑬부리 ⑭주석(註釋) ⑮흐름 ⑯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떤 사물을 주의해서 봄을 주목(注目), 부탁하여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맞추는 일 또는 그 조건을 주문(注文), 자세히 눈여겨 봄을 주시(注視), 몸에 약을 바늘로 찔러 넣음을 주사(注射), 자동차 등에 휘발유를 넣음을 주유(注油), 흘러 들어가게 쏟아서 넣음을 주입(注入), 힘을 기울임을 주력(注力), 사물을 기록하는 일을 주기(注記), 술 따위를 담아서 잔에 따르게 만든 주전자를 주자(注子), 외부 또는 외국에 주문함을 외주(外注), 기울여 쏟음으로 한 곳으로 주의나 힘을 기울여 모음을 경주(傾注), 물건을 주문함을 발주(發注), 주문을 받음을 수주(受注), 노름꾼이 남이 있는 돈을 다 걸고 승패를 단번에 작정함을 고주(孤注), 언어와 동작을 그대로 기록함을 기주(記注), 인물을 심사하여 적당한 벼슬 자리를 배정함을 전주(銓注), 조사하여 기록함 또는 그 문서를 감주(勘注), 물이 흘러 들어감을 관주(灌注), 비가 갑작스럽게 많이 쏟아짐을 폭주(暴注), 미리 뜻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일을 일컫는 말을 고의주의(故意注意), 노름꾼이 남은 돈을 한 번에 다 걸고 마지막 승패를 겨룬다는 뜻으로 전력을 기울여 어떤 일에 모험을 거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고주일척(孤注一擲) 등에 쓰인다.
▶️ 書(글 서)는 ❶회의문자로 书(서)는 간자(簡字)이다. 성인의 말씀(曰)을 붓(聿)으로 적은 것이라는 뜻이 합(合)하여 글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書자는 '글'이나 '글씨', '글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書자는 聿(붓 율)자와 曰(가로 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聿자는 손에 붓을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붓'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 '말씀'을 뜻하는 曰자가 더해진 書자는 말을 글로 적어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曰자가 먹물이 담긴 벼루를 표현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書(서)는 성(姓)의 하나로 ①글, 글씨 ②글자 ③문장(文章) ④기록(記錄) ⑤서류 ⑥편지(便紙) ⑦장부(帳簿) ⑧쓰다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 책(冊), 글월 문(文), 글 장(章), 문서 적(籍)이다. 용례로는 책 또는 경서와 사기를 서사(書史), 편지를 서신(書信), 글 가운데를 서중(書中), 남이 하는 말이나 읽는 글을 들으면서 그대로 옮겨 씀을 서취(書取), 책을 넣는 상자 또는 편지를 넣는 통을 서함(書函), 글씨를 아주 잘 쓰는 사람을 서가(書家), 글방을 서당(書堂), 글씨와 그림을 서도(書圖), 책의 이름을 서명(書名), 대서나 필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서사(書士), 글자를 써 넣음을 서전(書塡), 책을 보관하여 두는 곳을 서고(書庫), 남편의 낮은 말서방(書房), 책을 팔거나 사는 가게서점(書店), 이름난 사람의 글씨나 명필을 모아 꾸민 책을 서첩(書帖), 글씨 쓰는 법을 서법(書法), 유학을 닦는 사람을 서생(書生), 글방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를 서동(書童), 글씨와 그림을 서화(書畫), 문서를 맡아보거나 단체나 회의 등에서 기록을 맡아보는 사람을 서기(書記), 글씨 쓰는 법을 배우는 일을 서도(書道), 책 내용에 대한 평을 서평(書評), 글자로 기록한 문서를 서류(書類), 책을 갖추어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을 서재(書齋), 문자의 체제를 서체(書體), 참을 인 백 자를 쓴다는 뜻으로 가정의 화목은 서로가 인내하는데 있다는 말을 서인자일백(書忍字一百), 책은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다는 말을 서불차인(書不借人), 편지로 전하는 소식이 오고 간다는 말을 서신왕래(書信往來), 희고 고운 얼굴에 글만 읽는 사람이란 뜻으로 세상일에 조금도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백면서생(白面書生), 뚜렷이 드러나게 큰 글씨로 쓰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알게 크게 여론화함을 이르는 말을 대서특필(大書特筆), 책을 빌리면 술 한 병이라는 뜻으로 옛날에 책을 빌릴 때와 돌려보낼 때의 사례로 술 한 병을 보낸 것을 이르는 말을 차서일치(借書一瓻), 영 땅 사람의 글을 연나라 사람이 설명한다는 뜻으로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끌어대어 도리에 닿도록 함을 이르는 말을 영서연설(郢書燕說), 책을 읽느라 양을 잃어버렸다는 뜻으로 마음이 밖에 있어 도리를 잃어버리는 것 또는 다른 일에 정신을 뺏겨 중요한 일이 소홀하게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독서망양(讀書亡羊),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책읽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상태 또는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독서삼매(讀書三昧), 글 읽기를 백 번 한다는 뜻으로 되풀이하여 몇 번이고 숙독하면 뜻이 통하지 않던 것도 저절로 알게 됨을 이르는 말을 독서백편(讀書百遍), 소의 뿔에 책을 걸어 놓는다는 뜻으로 소를 타고 독서함을 이르는 말로 시간을 아껴 오로지 공부하는 데 힘쓰는 태도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우각괘서(牛角掛書), 눈 빛에 비쳐 책을 읽는다는 뜻으로 가난을 무릅쓰고 학문함을 이르는 말을 영설독서(映雪讀書), 저지른 죄가 너무 많아 이루 다 적을 수 없다는 말을 경죽난서(磬竹難書)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