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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펌하지 마세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 및 인근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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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마지막 날로 기록된 27일,
계엄군의 무력 제압 경고에도
끝까지 도청에서 자리를 지킨 이들의
가족들이 남긴 이야기
끝까지 남은 투지를 존경하고 이해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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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여야 했냐는 슬픔
두 감정이 상충하는 글
본 내용은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5.18기념재단 발간)에 수록된 5.18민중항쟁 참가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구성, 각색되었습니다.
80년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산화한 오월영령 중 확인된 열사만 스물다섯 분(유동운, 김동수, 이정연, 이강수, 박성용, 문재학, 안종필, 민병대, 홍순권, 박진홍, 박병규, 윤상원, 문용동, 서호빈, 박용준, 유영선, 오세현, 김종연, 이금재, 염행열, 권호영, 양동선, 조일기, 김성근, 김명숙) 그밖에 확인되지 못한 수많은 열사들이 존재.
정의를 위해 신념을 지키다
류동운 196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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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20세, 한신대 2학년
목회자인 저는 누군가는 시대의 아픔 앞에 헌신해야 한다고 말해 왔어요. 하지만 그 말이 제 아들의 생명을 데려갈 줄은 상상하지 못했죠. 저는 도청으로 들어가는 아들을 말렸어요. “나가면 죽는다. 제발 가지 마라….” 저의 애원 앞에 아들 동운이는 되물었어요. “아버지, 정의가 죽어갈 때 누군가 헌신해야 한다던 아버지의 설교는 거짓이었습니까? 저는 신념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제가 평생 강단에서 외쳤던 그 말이 아들의 입에서 나왔을 때, 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꽃처럼 피지도 못한 나이에 아들은 “나는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도청을 지켰어요. 그리고 27일 새벽, 결국 아들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어요. 저는 까맣게 변해버린 시신에서 치아를 보고서야 제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동운이는 저의 설교처럼, 역사의 제단 위에 스스로를 바쳤던 거죠. 그날 이후 저는 스스로에게 되물어요. 과연 나는 그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쳤던 것인지, 그리고 내가 그 대가를 감당할 자격이 있는지.
주민등록증을 품은 소년
이강수 19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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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19세, 재수생
강수는 검정고시를 마치고 재수를 하던 학생이었어요. 친구가 계엄군에게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강수는 책상 앞에만 앉아 있을 수 없다며 거리로 뛰쳐나갔어요. 시위를 하면서도 집에 전화를 걸어 밝은 목소리로 농담을 던지곤 했어요. “아버지, 걱정 마세요. 저 주민등록증 가지고 다니니까 시신은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정말 농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농담이 현실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5월 27일 이후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시간이 지나 농담처럼 말하던 주민등록증 덕분에 강수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죠. 제 앞에 돌아온 아들의 몸은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어요. 저는 그 모습을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어요. 아들의 시신을 부패시킨 햇살만큼 따가운 고통만이 저에게 남아 있어요.
피 묻은 붕대를 감고 돌아온 동생
민병대 19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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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20세, 양계장 종업원
제 동생 병대는 진월동 양계장에서 일하며 가난 속에서도 성실하게 살아가던 스무 살 청년이었어요. 5월 20일, 서울 형님 댁으로 가려던 길목이 막히자 병대는 주저 없이 시위대 속으로 들어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5월 23일에 전화가 왔어요. “공수부대가 사람을 막 죽인다. 사태가 심각하니 누나는 절대로 나오지 마라.” 수화기 너머 들리던 다급한 목소리가 동생의 마지막 말이었어요.
그날 이후 우리는 계엄군의 몽둥이에 머리가 깨지는 수모를 겪으며 동생을 찾아 도청 앞을 헤매고 또 헤맸어요. 결국 도청에서 동생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고 망월동 묘지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있는 동생을 마주했어요. 세상은 동생을 ‘폭도’라 불렀어요. 17년이 지난 1997년, 묘를 이장하던 날 우리 가족들은 오열했어요. 햇살에 빛나는 금니, 검은 양복바지, 그리고 오른손에 감긴 채 썩지도 않은 피 묻은 붕대… 목을 관총한 총상의 흔적까지. 병대의 모습은 17년 전 그날 그대로였어요. 가족을 지키려다 폭도가 되어버린 내 동생. 이제 그 아이를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어 편안히 보내주고 싶어요.
얼굴 한 번 못 보고 너를 묻는다
박성용 196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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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17세, 조대부고 3학년
성용이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조용하고 착한 아이였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정의롭고 배려심 많았던 아이였어요. 엄마에게는 금쪽같이 소중한 아들이었고, 친구들에게도 든든한 존재였죠. 그러다가 5월 20일 광주역에서 시민들이 공수부대에 학살되는 현장을 목격한 후 “대한민국 군인이 어떻게 국민을 이토록 무참히 죽일 수 있냐”며 분노했어요.
그 뒤로 성용이는 친구와 함께 시위하거나 도청과 상무관에서 형, 누나들을 도와 사망자 유가족을 안내하는 일을 했어요. 나중에 듣게 된 사실인데 아버지 친구분은 성용이가 총을 들고 다니는 걸 보고 크게 혼내기도 했대요. 25일 밤 집으로 돌아온 성용이는 광주공원에 갔던 친구가 죽었다며 서럽게 울었어요. 다음 날 자취하는 친구가 걱정된다며 나가서 그날 도청으로 들어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어요. 며칠 뒤, 우리는 망월동에 가매장된 성용이의 시신을 찾았어요. 어머니가 얼굴 확인하고 묻자고 하셨는데 작은 아버지가 얼굴 보면 더 힘들어진다고 그냥 묻어버렸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얼굴도 안 보고 자식을 묻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역정을 내셨어요.
목포에서 온 시민군
박진홍 1958.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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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22세, 표구사
진홍이는 광주 사람이 아니었어요. 목포의 한 표구사에서 일하던 성실한 청년이었죠. 하지만 5월 21일, 광주에서 넘어온 시위대를 본 순간 진홍이는 주저 없이 트럭에 올랐어요. 불의와 억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진 아이였으니까요. 결국 그 마음이 진홍이를 광주로 이끌었어요.
그로부터 며칠 뒤, 진홍이가 도청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정수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어요. 당국은 돈을 줄 테니 묘지를 이장하고 조용히 넘어가자며 회유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비록 내 아들이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차가운 당에 누워있을지 언정, 그 죽음을 돈과 바꿀 수는 없다.”며 단호히 거절하셨어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슬픔보다 더 깊은 단단함이 느껴졌어요.
형님, 이제는 웃으세요
홍순권 19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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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20세, 페인트공
“집으로 가자, 제발 집으로 가!” 저는 도청에 있는 순권이의 팔을 잡아 끌었지만 동생은 요지부동이었어요. 가난한 농촌과 병든 사회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하던 재수생 순권이에게 광주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어요.
5월 27일 새벽, 끝내 동생은 돌아오지 못했어요. 세상은 그를 ‘폭도’라 불렀고 저는 그 말이 너무 무서웠어요. ‘빨갱이 집안’이라는 손가락질이 두려워 1년이 넘도록 동생의 무덤을 찾아가질 못했어요.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컸어요. 뒤늦게 찾아간 묘소 앞에서 저는 오열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사진 속 동생은 아무 말이 없었어요. 그저 “형님, 괜찮아요. 다 잘될 거예요.”라고 말하듯, 맑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죠. 저는 그날 사진 속 동생의 그 미소를 잊지 못해요.
잡초를 뽑으러 간 아들
이정연 196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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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20세, 전남대 2학년
1980년 5월, 광주의 거리는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어요. 전남대 상업교육과 2학년이었던 아들 정연이는 어느 날 제 앞에 앉아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아버지, 잡초가 무서워 방치하면 안 됩니다.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잡초는 뽑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구들이 진압봉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정연이는 5월 25일 ‘한 시간만 있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도청으로 향했어요.
그 말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가 되고 말았죠. 다시 아들을 만난 건 차가운 관 속이었어요. 하얀 셔츠에 한쪽은 운동화, 한쪽은 구두를 신은 처참한 모습… 착하기만 했던 아들을 가슴에 묻은 아내는 정연이가 못다 뽑은 잡초를 대신 뽑기 위해 그날부터 투사가 됐어요. 우리 가족은 모두가 알고 있었어요. 정연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그 아이가 꿈꿨던 세상을 우리가 끝까지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요.
아버지가 찾아준 이름
김동수 195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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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22세, 조선대 3학년
동수는 가난하지만 누구보다 성실했던 아들이었어요. 동수는 계엄군에 짓밟히는 시민들을 두고 돌아설 수 없었나 봐요. “아버지, 내일 아침 일찍 광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아들을 말리고 싶었지만 아들의 목소리는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 마지막 전화를 끝으로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장성에서 광주까지 찾아 헤맨 끝에 마주한 건, 도청에서 산화한 아들이 남긴 차갑게 멈춰버린 시계와 동전 하나뿐이었어요.
세상은 정의를 위해 나선 아들을 ‘폭도’라 불렀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남긴 그 작은 물건들을 손에 쥐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끝까지 버텼어요. 유족회 문을 두드리고 진실을 하나씩 밝히며 아들의 이름을 끝내 되찾았어요. 동수는 폭도가 아니었어요. 동수는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가장 먼저 쓰러진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이었고, 이 나라가 기억해야 할 용기였어요.
도청의 화약고를 지킨 전도사
문용동 19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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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28세, 호남신학대 4학년, 전도사
모두가 빠져나가던 5월 26일 밤에도 용동이는 도청 지하실에 남아 있었어요. 저는 함께 나가자고, 나가서 살아야 한다고 용동이를 여러 번 붙잡았지만 용동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요. “내가 가면 여기는 누가 지킵니까? 여기서 터지면 광주 시민들이 다 죽습니다.” 그곳은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이 가득한 화약고였어요. 용동이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다이너마이트 뇌관과 폭약을 관리하며 화약고를 지켰어요. 용동이는 무기를 들고 싸우기 보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기도하며 자리를 지킨 전도사였어요.
투항 권유를 받고 밖으로 나올 때 저는 용동이가 살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용동이가 화약고를 나와 민원실 방향으로 가던 중에 총탄이 쏟아졌고 용동이의 가슴을 뚫었어요. 17년 뒤 용동이의 유골을 이장하던 날 멈춰버린 손목시계가 나왔어요. 비록 시계는 멈춰 있지만 그날 용동이의 숭고한 희생은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기억될 거예요.
아버지는 죄인이 아닙니다
서호빈 19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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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20세, 전남대 2학년
전남대 학생이었던 호빈이는 여자친구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도청을 떠나지 않았어요. “조국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던 호빈이는 결국 27일 새벽 복부에 총상을 입고 산화했어요. 하지만 비극은 아들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남편에게 당국은 끊임없이 협박을 해왔어요.
교사였던 남편은 끈질긴 협박을 견뎌야 했죠. “묘를 이장하지 않으면 다른 자식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에 결국 남편은 한밤중에 도둑처럼 아들의 묘를 파냈어요. 평생 올곧게 살아온 남편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도, 그 무덤마저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내가 죄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하지만 저는 알아요. 남편은 결코 죄인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잘못은 시대에 있지 제 아들과 남편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요.
마지막 거짓말
박병규 196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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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19세, 동국대 1학년
어느 날 밤, 전화벨이 울렸어요. 수화기 너머 들려온 건 둘째 아들 병규의 밝은 목소리였죠. “엄마, 나 도청이야! 내일 아침 먹으러 갈 테니까 밥해줘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안도했어요. 그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나중에야 알았어요. 병규가 이미 계엄군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걱정할 저를 위해 거짓말했다는 것을…….
다음날, 저는 아침밥 대신 싸늘한 주검이 된 아들을 맞이해야 했어요. 형의 밤색 바지를 입고 가슴에는 총탄이 뚫고 지나간 커다란 구멍이 난 채 누워있는 아들의 모습을 말이죠. 내 손으로 다시 따뜻한 밥을 먹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한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에 서럽게 맺혀 있어요. 비록 병규는 떠났지만 그날 밤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그 목소리만은 지금도 귓가에 선명히 살아 있어요.
너를 보낸 후 엄마는 멈추지 않았다
안종필 1964.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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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16세, 광주상고 1학년
종필이는 어릴 때부터 엄마랑 둘이 살면서 힘든 친구들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고 도와주는 착한 아이였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친구들 신문 배달을 같이 해 주고, 시장에서 구두 닦는 친구들을 도와주고, 할머니 짐도 들어주고, 교회 일도 열심히 했어요. 종필이는 “기술을 배워서 빨리 돈 벌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학교도 열심히 다녔고, 친구들이랑도 잘 지냈었죠.
5.18 때는 가족의 만류에도 시위를 나갔어요. 야단치는 엄마에게 “엄마, 지금 이 상황에서 죽는 건 개죽음이 아니에요.”라고 말했어요. 그날 밤 제가 도청에서 뭐 했냐고 하니까 미확인된 시체 앞을 지키는 일을 했대요. 제가 무섭지 않냐고 하니까, 종필이는 “뭐가 무서워? 우리가 지금 포기하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죽음이 헛되게 되는 거야.”라고 했어요.
그렇게 22일 도청으로 나간 종필이의 모습이 마지막이 됐어요. 막내를 잃는 그날 이후로 엄마는 식당을 접고 5.18 진상규명 운동에 뛰어들었고, 저도 유족회의 총무로 활동하며 종필이의 명예 회복을 위해 싸웠어요. 이제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가끔 종필이를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이런 투쟁이 있었기에 5.18민주화운동이 역사에 당당히 기록될 수 있었다고 자부해요.
내 아들은 폭도가 아니었습니다
문재학 19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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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17세, 광주상고 1학년
재학이는 가난하지만 밝고 착한 아이였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도 항상 엄마를 도와주고, 친구들도 잘 챙겼죠. 5.18 때 도청으로 간 재학이는 친구가 죽은 것을 목격하고 도청으로 들어가 결국 집에 돌아오지 못했어요. 26일에 도청으로 재학이를 데리러 갔는데, 못 데리고 나온 게 천추의 한이 될 줄 몰랐어요. 다음 날 재학이의 소식을 알 수 없었고 결국 시신으로 만나게 됐어요.
재학이가 죽은 뒤 저는 큰 충격에 빠졌어요. 아들을 잃은 슬픔에 미칠 것 같았지만, 아들이 억울하게 ‘폭도’로 불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전국을 다니며 진상규명 운동을 했어요. 머리도 깎고, 삭발도 하고, “우리 재학이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였다. 폭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억울함을 풀기 위해 애썼죠.
그때 당시 재학이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왔으면 목숨이라도 건졌을 텐데 그러지 못한 죄책감이 들어요. 그래서 나는 나를 꼭 재학이 어머니라고 불러달라고 해요. 우리 재학이 이름 석 자 안 잊히게. 더 나이 들어 재학이 만나면 “재학아, 엄마 안 보고 싶었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 19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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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이 29세, 시민군 대변인
1980년 5월 26일 밤, 전남도청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렸어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상원이 형의 마지막 말이 기억나요.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패배하더라도, 너희가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어다오.” 상원이 형의 말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우리들을 살리기 위한 절박한 명령이었어요. 상원이 형은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했어요.
도청을 나오던 그날, 죽음이 기다리는 도청 안으로 들어가는 상원이 형의 뒷모습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어요. 나중에 상원이 형이 도청을 사수하다 복부의 총상을 입고 서른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서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하고, 훗날 영혼결혼식으로 맺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상원이 형의 육신은 산화했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을 때면 그날 상원이 형의 눈빛이 떠올라요. 저는 그날 살아남은 학생 중 한 명이에요. 그날 상원이 형의 부탁대로 저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그날 밤을 잊지 않고 있어요.
윤상원은 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 자격으로
브래들리 마틴기자, AP통신 테리 앤더슨 기자,
뉴욕타임즈 헨드 스콧-스톡스 특파원 등
1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였다.
기자회견장에서 브래들리 마틴은 계속 저항한다면
인명피해만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하자
윤상원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탱크를 동원해 진압하겠다면
우리는 어차피 질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그 같은 강경 진압이
오늘의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그것이 윤상원이 대변인으로 활동한 마지막 기자회견이 되었다.
오후 7시, 대학생 시민군에게 총기를 지급한 윤상원은
광주YMCA에 대기중인 예비군과 고등학생에게 가서
나이 어린 고등학생이나 여학생의 귀가를 강하게 권하였다.
“학생들의 충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어른들이 해야 합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부디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목격한 이 장면을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들려줘야 합니다.”
사랑하는 시민 여러분 .ᐟ
우리 광주의 5월을 잊지 맙시다.
이웃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어
자신의 죽음을 견딘 이들을 잊지 맙시다.
1980년 광주의 시위 물결이 지키고자 한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잊지 맙시다.
첫댓글 재학아, 엄마 안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