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길면, 때론 웃음이 나온다.
쓴 웃음이고, 허탈한 웃음이다. 예전에 고 이주일씨가 그런 말 한적이 있다.
웃음은 슬픔의 껍질이라고......
내 웃음이 바로 그런 웃음인가?
내 슬픔에 더욱 깊숙히 빠져 버리면 헤어나지 못할 거 같은 그런 두려움 때문에 웃음이 나온다. 내 슬픔을 위장하려는 웃음일 수도 있고, 내 슬픔을 조금이라도 감소시켜보려는 웃음일 수도 있다. 내가 내 슬픔에 너무 깊숙히 빠지면 난 정말 헤어나지 못할 거 같다.
그래서 내 의식은 자꾸 나로 하여금 슬픔에 빠지는 것을 겁내하며, 웃으라 하는 것 같다.
마음 같아선 마음껏 꺼이꺼이 울어보고도 싶다. 2001년 겨울 결국 고시실패로 부모님께 pc방에서 편지를 쓰면서 자판을 두드리던 중 갑자기 엉망진창 울어본적 있었다.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을 못했던 내가 죄스러워 그랬던 거 같다. 그 이후로 제대로 슬픔에 빠져 본적이 없다.
내 의식은 자꾸 나더러 가식적인 웃음 (물론 일정 부분은 진짜 웃음도 있지만) 을 짓게 만든다. 좀더 쿨해 지자고, 그래야 사람들이 널 좋아하고, 넌 무조건 긍정의 화신이고... 등등 이런 평가를 하게 만든다.
만약 내가 외부의 어떤 것을 목표로 추구한다면 반복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으로 능히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영어 토익 900점 이상, 돈을 일정금액 버는 것, 직장에서 출세하는 것 등은 별거 아니다. 반복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으로 능히 달성할 수 있을 거 같애....
그런데, 내 마음은 어떻게 되는거지?
좋은 사람, 긍정적 마인드를 갖춘, 적극적인 태도를 갖춘,어려움 속에서도 낙관적인 면을 찾는.... 등의 평가를 주는 가식적인 웃음에 질식당하고, 숨숙여 사는 내 마음은 누가 챙겨줄까?
내가 마음을 탱탱하게 가꾸었다면, 나는 그 자체로 인정을 받았을텐데....
왜 그 의식적인 노력과 그결과 만으로 인정을 받고자 했을까?
이제 내 몸에 드러나 증상 때문에 뒤늦게 내 마음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만,
왜? 꼭 이런 경우를 닥쳐야 알게 되는지...
내 마음아! 솔직히 말하면 나 아직도 너에게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 너를 감동먹여서 너의 노여움을 풀게 만들고 싶은데, 나의 조급한 욕심인가.
나, 호포하면서 미안해, 용서해, 고마워, 사랑해 등을 너에게 마음을 다해 말하지만, 아직도 낯설어 그만큼 내가 너에게 신경을 안 썼다는 증거지... 집 나간 아빠가 오랜만에 본 자기자식을 낯설어 하듯 말이야...
나 어떻게 하면 너를 그대로 인정해서, 남들로부터 챙피함과 부끄러움을 안느낄까?
일본의 오체불만족 저자의 부모는 오체가 없이 태어난 자기 아들을 보고,
처음으로 한 말이 ' 아이~~ 예쁜 내 애기' 그랬다는데.....
그 부모는 남을 전혀 의식한 것이 아니지...
오체불만족의 아기가 있어 부끄럽다거나 챙피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그럼, 나는 내가 가진 유일한 결점으로 인식하는남들 앞에 손떨며 글씨쓰기 하나를 이쁘고, 귀엽게 봐 줄 수 없는걸까? 평생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하고, 이를 극복해야만 당당한 삶을 살수 있다고 내 마음에 선전포고를 해야 하는 걸까?
오체불만족의 저자의 엄마와 같은 마인드는 불가능한 것인가?
그건 진정 불가능한 일인가?
아니다.
오체불만족의 저자의 어머니가 자기뱃속의 난 자식을 사랑하듯 나도 내 마음을 사랑할 수 있다. 다만, 내가 몇십년간 내가 의식의 노예가 되어 그렇게 하기가 힘들뿐......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은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나는 내 모든 걸 짋어지고 간다
나도 오체불만족의 어머니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손떨림에도 정말 이해의 마음의 담긴 웃음 보여준다.
아이가 엄마의 웃음에 환하게 답하듯이. 나의 마음도 나에게 답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