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1545년~1598년)
5.6. 어이없는 파직
"만약 이순신을 병신년과 정유년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선조 실록> 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 사관의 논평
정유년(1597년)이 밝아오자 이순신에게 특이한 일이 두 가지가 발생했다.
첫 번째는 부산 왜영 방화 사건. 이순신이 자신의 부하들인 안위와 김난서 등이 부산 왜영에 숨어들어서 적의 배와 장비들을 불태웠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는데, 이 보고 이후 이조 좌랑이던 김신국이 이순신의 보고를 허위 보고라고 올린 사건이다. 이원익의 추가 보고와 의금부의 조사 결과, 이순신의 보고는 아래 부하들이 허위로 이순신에게 보고를 올림으로써, 이순신이 왕에게 보고를 허위로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게 이후에 이순신이 파직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다만 의금부의 조사 결과와 이원익의 추가 보고만으로 이순신이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를 올렸다고 하기에는 무리인 부분이 많다. 조정에서의 인식은 분명히 이순신의 부하가 이순신에게 허위로 보고를 올려서 이순신이 거짓 보고를 하게 된 것이지 이순신이 단독으로 거짓 보고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근데 정작 부산 왜영 방화 사건의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을 때 고문을 받으러 서울까지 끌려간 사람은 이순신밖에 없다. 만약 정말 부산 왜영 방화사건을 조사하고자 했다면 이순신 뿐만 아니라 그 부하이자 왜영 방화 사건의 관계자인 안위나 김난서까지 같이 고문을 받았어야 하는데 정작 고문 받은 건 이순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 파직이 결정됐을 때 선조는 자기 입으로 직접 부산방화 사건은 안위와 김난서가 행한 일인데 이순신이 공을 가로챈것이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이순신의 부하들이 한 행동임을 인정했다. 다만 이순신이 부하들의 공을 가로챈적은 없으니 선조의 말은 앞은 맞고 뒤는 틀린 부분이다.
두 번째는 가토의 도해. 1597년에 일본의 이중간첩인 요시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 정보가 조정에 보고된 것이 1월 1일. 조정에서는 즉각 비변사에서 회의를 거쳐서 이순신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는데, 문제는 이순신은 1월 6일부터 남해현에 공무차 들어갔다가 풍랑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상태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버리자 이미 가토는 바다를 건너서 부산에 도착해버렸고, 조정도 이를 파악하여 가토를 잡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정은 가토는 놓쳤지만 추가로 있을 상륙 부대에게 압박을 주기 위하여 부산포로 출격을 명했고,이순신은 69척의 함대로 부산포를 타격하고 돌아온다.
하지만 이순신이 가토를 잡지 못했다고 책망하면서 자신이라면 잡을 수 있다고 한 원균의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오고, 이와 더불어 이순신을 숙청하려고 이미 혈안이 되어 있던 선조에 의해서, 이순신이 조정의 명에 따라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을 서울로 압송하였고 원균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후인 3월 4일 감옥에 투옥된 이순신은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은 한 차례의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이순신이 이때 압슬형을 받았다고도 하나 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당시 실록에 나온 선조의 언행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두고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등의 이러한 언행 때문에 고신이 가벼웠다고는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많다. 그전까진 잔병치레도 거의 없었던 이순신이 이 때의 후유증으로 이후 잔병치레가 잦아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백의종군 이전에도 이순신은 며칠 동안 앓았다는 기록도 있고, 거기에다 이순신은 당시 적잖은 나이였으며 게다가 엄청난 주당. 설상가상으로 몇 년 동안이나 미칠듯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온 사람이다. 심한 고신을 받지 않았더라도 저 지경이면 누구든 몸 망가지기 십상이다. 때문에 건강 악화와 고신은 큰 상관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이때 치명적일 만큼의 고신을 받았으면 그로부터 불과 몇 달 뒤에 그 명량 해전을 치를 수 있었겠느냐?는 말도 있다. 고신 과정이 잘 드러나있는 남이의 옥사를 살펴보면, 사극에서 나오는 것처럼 무작위로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문답 과정에서 제대로 된 답변이나 자복을 하지 않으면, 그에 대해 곤장 20대 ~ 40대를 때리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때문에 심한 고신이라고 해도 당장 생명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고신의 목적은 죄인의 자복을 받아내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순신이 받은 고신으로 몸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정탁과 이원익의 필사적인 만류로 고신은 한 차례에 그쳤고, 4월 1일 28일간의 옥중 생활을 마치고 풀려나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로 떠나 그곳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당시 이순신이 어떻게 고문받았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이순신은 한 차례 형신을 받았다고 정탁의 신구차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형신은 정강이를 때리는 고문이다. 물론 고통스러웠겠지만 강한 고신은 결코 아니다.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나온 날 술을 마시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말을 타고 떠난다. 혼자서 말을 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심한 고신은 아니었다는 증거이다. 물론 지금에서 보면 아무 죄없는 수군 최고 사령관을 억지로 잡아가서 고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난중일기에 이순신 본인이 쓴 기록에 의해도 출옥한 4월 1일에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셨고, 이틀 뒤인 4월 3일에 말을 타고 나서 다음 날인 4일에 수원, 다다음 날인 5일 아침에 아산에 도착한다. 도성에서 아산까지는 직선 거리로도 90km 가까이 되고 길을 따라갔다면 못해도 이틀간은 110km는 말타고 달렸다는 말인데 몸이 상할 만큼 심한 고문을 받았다면 이틀 뒤에 이 거리를 말 타고 달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목숨을 바쳐 왜적을 5년 동안 한 번의 패배 없이 막았지만 돌아온 건 모함, 파직과 고문으로 나라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고신으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도 생길 수 있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93화에서는 이때 이순신이 느꼈을 심정을 시적으로 묘사한다.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노엽지 않은가? 그대를 조선군의 수괴라 부르는 적보다
역도라 칭한 군왕이 더 노엽지 않은가?
그 불의에 맞서지 못하고, 그대의 함대를
사지에 이끌고자 하는 세상의 비겁이 노엽지 않은가?
칼은 살뜰하게 내게 보챘다.
적의 피로 물든 칼을 동족의 심장에 겨누지 마라.
그 무슨 가당찮은 오만인가?
어찌하여 노여움을 참고 있는가?
이 바다에서 수많은 적에게 겨눴던 그 칼을
그대의 노여움에 겨눠라.
'내가 진정 베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내 자신'이라
칼을 달래고자 했으나 그 울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하여, 차라리 육신이 죽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 내 몸은 죽어지지 않았다.
한편 고문 외에도 이 시기는 이순신의 일생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때였다.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올라오던 이순신의 모친 변씨가 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이순신은 엎어져 몸부림을 칠 정도로 슬퍼한다.
여담으로 위에서도 서술된 "1583년 10월, 병마 절도사 발포 만호 시절 이순신을 부당하게 괴롭혔던 전라 좌수사 이용이 함경도로 전근가면서 마침 모함을 받아 파직돼 있던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이 부분이 완전히 재현되었다. 이용을 이원익으로 바꾸고, 발포 만호 시절을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치고, 자기 종사관 부분을 정탁과 만류하고, 사실상 변호하는 모양새로 치면 이순신은 정말로 데자뷰적 군 경력을 지내게 된 셈이다.
5.7. 명량 해전
7월 16일 원균의 지휘 아래 출격에 나선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했다. 이 부분에 대해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시 조선군은 장비에 있어서 일본군보다 크게 뒤쳐지지 않았지만 이를 활용할 교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병사들의 질이 낮아 사기를 담보하기 힘들었기에 이런 대규모 도주가 일어난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장비 활용에 대한 교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망발이다. 임진왜란 5년간 이순신이 지휘해서 벌인 해전만도 20회가 넘는데 운용 교리가 없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병사들의 질이 낮았다는 것도 마찬가지. 5년을 종군한 병사들이면 이미 베테랑 수준이다. 질이 낮았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생각해보자. 차라리 사자가 지휘하는 양떼가, 양이 지휘하는 사자 떼를 이겼다는 속담이 더 잘 들어맞는다. 그만큼 지휘관의 역량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이순신이 힘겹게 모아놓은 300여 척의 함대가 고스란히 사라졌고 이는 다시 말해 조선 수군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전력이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조선 수군의 전력 전체가 소멸한 것. 그나마 배설이 전함 12척을 수습해 장흥으로 퇴각했다. 이 전함들은 이후 명량 해전에 투입되었다. 또 이후에 비정상적인 조선 수군의 전력 회복을 근거로 이때 대부분의 조선 수군 함선들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도주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패전 책임은 분명했다. 그 후 원균의 생사는 불명. 왜군에게 죽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인식이지만 전후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기에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다. 실록에서의 마지막 원균의 목격담은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이후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처참한 패전으로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상실했다.
당황한 조정은 7월 23일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했다. 여담으로 이때 선조는 과인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는 교서를 내릴 정도로 저자세로 굴면서도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훨씬 강등된 절충 장군 품계를 주어 뒤통수를 쳤다. 중장이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 땐 소장이 된 셈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이순신은 다른 수군 절도사와 같은 품계 즉 계급이 되기에 지휘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순신이 지휘할 수군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 통제사였다.
다행히 배설이 칠천량 전장에서 미리 빼놓은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었다. 이순신은 다시 통제사로 제수되자마자 배설을 추궁해 배설이 숨겨놓은 함대의 위치를 알아내 함대를 인수하러 출발한다. 이때 곧바로 남해안으로 가지 않고 초계 -> 하동 -> 구례 -> 곡성 -> 순천 -> 보성 순으로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병사를 모집하고 물자를 다 긁어가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선조의 뜻을 알리는데, 이는 수군을 폐하고 충청도로 올라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어떠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싸우기를 결심하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가 바로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란 전설의 대사로 대표되는 '상유십이' 장계. 남해와 서해 남쪽을 완전히 내주더라도 어떻게든 훗날을 도모해보자고 정부에서 권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싸우기를 결심한다. 그 와중에 배설은 다시 탈영하여 종적을 감춘다.
9월 16일 이순신은 수습한 전함 13척(이후 1척이 더 보강되었다)과 어선 일부를 대동하고 명량에 출격했다. 이때 초반에 전투에 나선(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가늠했던) 왜군 함선만도 133척에 달할 만큼 절망적인 전투였으나, 이순신은 수많은 왜선을 격침하고 결국 승리하여 왜군이 제해권을 잃게 만들었다.
세간에서는 보통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자진을 펼쳐 축차 전술을 펼친 적을 막아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당시 이순신이 탄 대장선을 제외한 12척의 배들은 정오가 지날 때까지 대장선이 패배하는 대로 도망가기 위해 뒤에서 미적거리다, 거제 현령 안위가 먼저 대장선을 구원하러 가는 것을 보고 나머지 배들도 뒤늦게 전투에 동참하였다. 즉, 믿기지 않게도 이순신의 대장선은 단 한 척으로 전투의 중반부까지 왜군의 전선들을 무수히 폭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원인은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과 그에 실린 화포를 비롯한 조선의 장사정 무기들의 압도적인 전투력, 그리고 훨씬 열세였던 왜군의 해전 무기 체계(조총과 일본 활, 칼)와 명량 주변의 지형 및 해류, 마지막으로 이들 요소를 더 굳건하게 만든 이순신의 전투 의지였다.
2011년 4월에 나온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지' 14권에 좀 더 충격적인 연구보고가 있다. 명량 해전이 일어난 날의 조류를 연구한 것으로, 과거 1965년과 1977년에 각각 당시 기준으로 측정했던 조류 측정치와는 달리, 전투 초기엔 오히려 조류의 유리함을 받은 것은 일본군이고, 반대로 통상의 상선은 가장 불리한 시기에 전투 초반을 싸웠다고 한다.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류가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통제사의 상선은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지세까지 거슬러가며 혼자 전반부 전투를 감당했다는 게 된다. 상식적으로 봐도 공격해오는 일본군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류를 타고 방어군이 기다리는 함정속으로 들어올리가 만무하다.
이순신 본인도 난중일기에서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힘든 싸움이었으나, 어쨌든 명량 해전의 승리로 인해 조선은 칠천량 패전으로 궁지에 몰렸던 정유재란의 국면 전체를 뒤집을 수 있었다.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다시 회복했고 왜군의 서해 우회는 좌절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완전히 좌절시켰던 철벽 방어선 진주성은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정유재란 초반 일본군은 영남 남부 지방의 통로를 무인지경으로 통과해 호남을 싹쓸이했으나, 직산에서 명군의 빠른 진군과 완강한 저항에 직면해 패퇴한 후 충청도 일대에서 퇴각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명량에서 이순신의 경이적인 승전보는 일본군의 뇌리에 서해를 장악당함으로써 보급을 차단당했던 임진년의 악몽을 되살리게 했고 일본군의 북진 의지는 완전히 꺾인 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겨울철임에도 왜성들을 쌓는 등 수성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노량 해전이 벌어질 때까지의 2년간 해전은 3회. 일본 수군은 철저하게 이순신을 피하려고 했다.
명량 해전은 여러모로 뜻 깊은 해전이다. 첫째 신은 12척의 배가 있다는 말은 특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2척의 배로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왜냐면 성웅은 왜군의 전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군 함선이 허술하고 지금까지의 경험상 초기에 왜군의 선봉을 꺾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걸 정확히 파악한 판단력은 가히 환상적이다. 손자병법에서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으리!"라는 말이 여기에 정확하게 맞아들어갔다. 원균처럼 100여척이 넘는 배가 있어도 칠천량에 침몰시켜버린 것과 비교되는 점이다. 둘째 무거운 책임감을 극복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헌신으로 주도적으로 전투를 이끌어서 승리를 이뤄냈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초기 기선 제압을 성웅이 취 함으로써 추후 부하들이 합세해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은 진정한 무인이자 지도자로서의 성웅께서 책임진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셋째 성웅은 패배주의에 빠진 군을 재건하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서 전쟁 수행에 있어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5.7.1. 명량 해전 당시 전과
일반적으로 당시 왜선의 숫자는 난중일기의 133척, 그리고 확실히 격침한 왜선은 대략 31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우선 왜군 전선이 133척이었다는 기록은 실록과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후대에 갈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정조 대에 이르러서는 '500척'까지 불어나는 경향이 있다. 다만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본인이 당대에 남긴 기록인 난중일기의 수치가 대단히 설득력이 크고, 일본 쪽 기록과도 어느 정도 교차 검증이 되는 수치이다. 양측의 주장을 절충한다면, 500여척 중에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전투함의 수가 133척이고 나머지는 보급선, 수송선 등의 비전투함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적선 31척을 격침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충무공의 성격상 확실히 침몰한 적선만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전과는 더 컸겠지만 일종의 축소보고를 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충무공은 도주한 적선이 수리를 받고 병력을 보충해 다시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적선을 단순히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것을 넘어서 가능한한 확실히 격침시키기 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일각에서는 적선 100척을 격파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거의 없고, 다만 명량 해전 자체가 압도적인 숫적 열세속에서 그저 적선이 오는 족족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격침에 신경을 못쓴 결과가 '고작' 31척 격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전투원들이 멀쩡해도 선체에 장군전을 비껴맞고 침수되어 돌격능력을 상실하였거나, 배는 멀쩡해도 전투원 다수가 코 앞에서 조란환에 맞아 죽거나 중상을 입어서 공세능력을 상실한 적선의 수는 배로 많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있다. 그렇다면 대장선이 격침되고 선봉장 구루지마 미치후사까지 죽었으며 후방의 수군 총사령관 도도 다카도라가 활에 맞아 손에 부상을 당했고 도요토미가 보낸 군감 모리 다카마사까지 세키부네에 타고 있다가 급히 빠른 소선으로 옮겨타 도망갔다가 바다에 빠졌으며 '무사히' 돌아간 적선의 수가 10여척 밖에 안된다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교차 검증 부분에서는 애초에 일본 문서에는 명량 해전에 참전한 수군의 척수는 물론, 참전 다이묘도 총지휘관인 도도 다카도라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외에는 참전했는지 참전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만일 진법표에 나와있는 약 8000명의 일본 수군을 토대로 60 x 133해서 비슷하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 수군이 과연 수부 같은 비전투 인원을 계산한 것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비전투 인원을 계산할 경우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 수군만으로도 거진 1만에 가까운 군세가 만들어진다. 더군다나 14일 탐망군관 임준영의 보고에서는 적선 200여 척이 확인되고 있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의 행록의 333척 기록을 믿기 힘들다고 폄하하지만, 행록의 기술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날 피난한 사람들이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선이 쳐들어오는데 300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 이분이 일부러 과장하고 싶어서 과장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피난민의 증언을 충실하게 옮겼을 뿐이다. 더군다나, 500척 기술을 마치 정조 대에 과장한 것처럼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정조 대의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500척 이야기는 정조 대의 사람들이 알아서 부풀린 게 아니라 당시 피난민들의 증언에서 나온 이야기를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그대로 옮겨 썼을 뿐이다.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 해전 참전 전체 왜군 선박수가 133척이라고 분명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명량 해전에서 왜선의 숫자를 완벽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한마디로 당시 왜군의 규모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당시 적의 함대는 100여 척이든 300여 척이든 500여 척이든 새까맣게 쳐들어오는 상황이고, 그런 규모의 적함을 요격하겠다고 나선 아군 함대는 고작 13척에 불과했다.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적함이 몇 척이나 되는지 일일이 세고 있을 여유가 없지 않은가.
5.7.2. 철쇄설
역사스페셜에서는 명량의 좁은 해역과 급한 조류를 이용, 명량 쪽에 배의 이동을 묶어두는 함정을 설치해 적의 연쇄충돌과 행동불능 상태를 이용한 뒤에 포격으로 쓸었다고도 하는 거 같지만, 그건 이 믿기지 않는 전적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이끌려 오히려 단견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딱 잘라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가설이다. 전투가 벌어진 울돌목은 현재 진도대교가 건설된 곳으로 건설 당시 현대건설에서 부설한 1300t이 넘는 콘크리트 더미가 유실된 곳이다. 그것도 바닥에 고정시켜놓은 교각하부였다. 헌데 꼴랑 몇 백톤에 안되며(그 이상은 부력을 고려해도 견인 자체가 불가능하다) 접촉 표면적의 합이 더 많았을 쇠사슬은, 철로에 실 묶어놓고 버티길 바라는 것과 같다. 왜선이 충돌할 때마다 걸리는 100t 이상의 힘은 또 별개다. 따라서 현대 기술로 철쇄를 만들어서 울돌목에 깔아도 안 떠내려가게 할 방법이 없다.
우선 당시 왜군의 대선단을 빈약한 쇠사슬 같은 것으로 저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목선이라고 해도 화포를 포함한 각종 무기와 탑승자들의 수를 더하면 수백 톤에 달하는 무게인 데다, 이 정도의 무게를 가진 움직이는 물체를 저지할 쇠사슬을 만드는 건 현대 기술이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데에 쓸 쇠가 있었다면 차라리 화살이나 포환을 하나라도 더 만들었다는 게 정설. 이 철쇄설이 기록된 "호남절의록"이 있는데, 여기에 나온 철쇄설을 믿으려면 김억추가 검강으로 적선을 파쇄해버렸다(...)는 기록도 믿어야한다. 더구나 이 책이 나온 건 1907년. 그런데 철쇄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인데, 이를 통해 이전부터 철쇄설이 해당 지방에 돌았던 것이 사실임은 알 수 있다. 일본 학자 아오야기 쓰나타로의 정한역일한사적에도 일본군의 명량 패전 원인은 이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된 이유로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사실 철쇄는 수로 차단용이 아니라 항만 방어용으로 널리 쓰이던 것이다. 당장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 모두 항만 입구에 철쇄가 설치돼 있었고, 이중 전라좌수영 철쇄는 설치 포인트가 현재도 사적지로 남아 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 용도로 널리 쓰여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도 투르크 함대를 막기 위해 철쇄를 설치하자 메메드 2세가 함대를 통째로 육로 운송하는 것으로 대응한 바 있다. 다만 이 경우 보통 부표와 부표 사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적에게도 뻔히 보이기 때문에 안 걸린다. 애초에 접근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게 목적인 것이다. 이런 항만 방어용 철쇄가 우수영에도 설치돼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고, 우수영은 명량해협 서쪽 끄트머리에 있으므로 우수영 수비용 철쇄가 울돌목 차단용 철쇄로 오인된 것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해석과 연계해서 명량 해전 자체의 결전장이 해협 한가운데가 아니라 우수영 앞 바다라는 견해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이 견해는 이민웅 교수(해군사관학교 교수로 현역 해군 중령)의 저서 임진왜란 해전사(2004년)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를 지지하는 학자는 사실상 없거나, 있더라도 소수이다. 사실은 애초에 관심 가진 학자도 별로 없지만. 이 주장이 지지를 못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울돌목이 지닌 최소한의 지형상의 유리함이 없다는 것이다. 울돌목은 그나마 소수로 길목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우수영 앞바다는 그런 이점도 없는 허허벌판이라서 이런 곳에서 싸웠다가는 수적 열세로 인해 앞뒤로 포위되어 전멸당하기 알맞은 곳이다. 별도의 이야기지만 전쟁 중에 이순신이 부족하다고 한 쇠붙이는 동철, 즉 구리다.
5.8. 전설이 되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가 임진왜란이 평정되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추어 바람같이 스러진 것이었다.
박종화 作 《임진왜란》 中
공이 뛰어나 천하를 뒤덮으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미 왕의 능력을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물을 가만 둘 왕은 없습니다.
한신의 참모 괴통
조선 국왕이 그를 버리려 한다... 이순신... 그가 외롭겠구나. 허나, '결국 조선을 구하는 것은 이순신이 될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 3화 中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비록 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일본군이 동원한 함대는 300척이 넘었기에 얼마 못 가 이순신은 함대를 물린다. 그러나 몇 달 안 되어 이순신은 서해안에서 일본군을 전부 몰아내고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해 수군 재건에 주력했다. 다행히 명량 직후에 승전 소식을 들은 칠천량의 패잔병과 피난민들, 흩어진 전선들이 고금도의 새 통제영에 속속들이 합류하여 얼마 안 가 본래의 위용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 패잔병 및 전선의 합류를 통해 칠천량 해전 당시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칠천량 해전 당시 통념처럼 조선 수군의 상당수가 칠천량 및 춘원포에서 말 그대로 궤멸된 게 아니라, 의외로 적지 않은 함선 및 병력이 지휘 통제를 상실하고 뿔뿔히 흩어진 상태임을 알 수 있다는 뜻.
정작 이순신은 직업적으로는 큰 공을 세웠지만 개인적으로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명량해전 직후에 이순신이 가장 아꼈던 셋째아들 이면이 전사한 것이다. 이순신은 이 소식을 듣고 내가 죽어야했는데 아들이 먼저 죽었다며 슬퍼했다.
그 뒤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합류하였는데, 그는 능력은 있으나 탐욕스런 인물이었지만 이순신은 처음에는 명 수군의 행패를 핑계로 본진에서 백성들과 함께 떠나려는 척을 하여 그에게서 명 수군의 지휘권까지 넘겨받는 한편, 이후 진린에게 자신의 공로를 기탄없이 그냥 넘겨주는 식의 '채찍과 당근'을 병용하여 그를 마음으로 감복하게 하였다.
실제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순신의 성품에 감복하여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하는가 하면 조선군 장수를 당시 깔보고 무시하던 다른 명군과 달리 이순신 장군을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라는 호칭으로 불렀으며, 자신이 탄 가마가 감히 이순신이 탄 가마보다 먼저 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을 정도이다. 이는 실로 대단한 일인데, 중국어의 노야(라오예)는 '나으리, 주인마님'이란 뜻으로 하인이 집주인에게 쓰는 경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관을 대하는 예로 통상 대인이라고 부른 것도 아니고 '노야'라고 불렀다는건 황제국 원정군의 수장이, 일개 제후국 장수의 부하를 자처했단 말이다! 게다가 진린은 1543년생으로 1545년생인 충무공보다 나이까지 많다.
이에 그치지않고 진린은 이순신에게 자신과 함께 명국으로 가서 살자고 조르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에게 푹 빠져있던 명나라 사람 중 하나였다.
소설가 김경진은 이 부분에 대하여 진린 혹은 다른 명나라 장수에 의하여 이순신의 전공이 명 신종 만력제에게 상주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으나, 명 신종 실록 및 명대의 역대 상주문 중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의문이 있다. 참고로 이순신이 명 신종 실록에 보이는 것은 단 한 차례, 동정군이 명나라에 복귀한 1599년에 전사한 이순신에 대해 포상을 명하는 만력제의 조칙에서일 뿐이다. 그런데 신종 만력제가 이 당시를 전후해서 30년 동안 국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신하들도 만나지 않는 엽기적인 태업을 하고 있던 상황이라(...) 후에 정조실록에서 보면 확실히 명나라 직책으로도 수군 도독으로 된 걸 보면 올라가긴 한 거 같은데 이와 관련된 기록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명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명 황실에서 한 고문 방법이 동시기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된 것을 생각한다면, 당대 양 국가 모두 껄끄럽게 여길 가능성이 높다란 생각을 해야 할 일이다. 전해진 물품이 진린 개인이 만들어 전달했다는 감정을 한 교수 발언도 있긴 하다.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선조의 주장처럼 이이제이를 바라는 것으로 묘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후 왜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명 함대와 합류해 철수하는 적 주력과 노량 앞바다에서 충돌한다. 뒤로는 조정과, 앞으로는 왜군과 싸워야 했던 고독한 영웅은 마지막까지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적선 200여 척이 격침되고 50여 척만이 도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충무공이 쓰러진 이 전투는 충무공의 23전 전적에서 최고 규모의 전과를 올린 전투가 되었다.
도독(진린)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지면서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어졌구나!"라고 하였다. 남도 백성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가족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때 남중의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 와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고을 경계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이항복, <백사집>
노량 해전이야말로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보이는 해전이다. 종전까지는 이순신이 철저한 계획과 철두철미한 전략으로 완승을 거두었지만 노량 해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진린과 유정은 서로 내 손에 피를 안 묻히고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4개로에 있던 왜군은 철병을 결정했고 이에 대응해서 조명 연합군이 추격을 했는데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곳이 바로 노량 해전이다. 다른 곳에서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어설프게 공격하다가 반격을 당해서 피해를 엄청나게 입었다.
고니시는 진린과 협상을 해서 무사히 탈출하려고 했으나 장군의 반대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1척만 포위망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진린을 꼬여서 구원군 요청을 보냈고 왜군은 500여척에 달하는 원병을 파병하게 된다. 조선군과 명군 다 합쳐도 130여척에 불과한 전력인데다가 명군의 함선은 왜선보다 작은 상황, 진린도 조선 판옥선을 타고 있을 정도니... 조명 연합군은 이제 여수와 사천 양쪽의 왜 수군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진린은 당근 그 상황을 회피하고 도망가려고 했겠지만 이순신이 단호하게 죽음을 각오하고 진린과 한판 붙은 끝에 노량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노량 해전은 쉽지 않은 해전이었다. 야간 해전에다 이미 전략적으로 역으로 포위당해 불리한 상황이었고 함선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장은 좁아서 백병전을 하는, 지금까지 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은 이순신이 결코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잘 훈련된 조선 수군과 명의 연합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여서 기어코 승리를 이루어냈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군인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노량 해전은 워낙 치열해서 대장선에 타고 있는 진린과 이순신이 서로 구원하는 상황까지 이를 정도였다. 전략과 전술보다는 평소 훈련이 전투의 핵심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접전끝에 결국 조명 연합군은 승리하고 이순신은 전사했으며 전쟁이 끝났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임진왜란 기간 내내 이순신이 보여준 전략, 전술, 판단력, 철천지 원수 왜군에 대한 단호한 복수심, 민중을 사랑하는 애민정신, 부하들을 이끄는 통솔력, 그 어느 것도 모범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 물론 시대와 상황이 만든 영웅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이순신이 평소에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철저한 준비와 비관적으로 느낄만큼 현실적인 판단력이 결합된 결과였다.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마음가짐이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고,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만나기 이전에 무능한 데다 부패했고 조선군 때리기도 주저하지 않으며 성질 포악한 명나라 도독이었던 진린은 그의 죽음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는 노야(老爺)께서 살아 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라며 통곡했고, 그의 아들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손을 부여잡고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의 지휘 아래에서 대부분의 명군과는 달리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의 유해가 실린 운구가 아산까지 올라가는 길엔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너도나도 운구를 붙들고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공은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오..." 하고 통곡하여 운구가 옮겨지는 데 매우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는 대목에서는 정말 눈물이 날 지경. 한국 역사를 통틀어 이 정도로 민초들의 경애를 받은 위인은 이순신 생전에도, 앞으로 먼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전술
• 빠른 기동과 화포를 이용한 근대적 함대전 사상
그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포격 위주의 전술을 구사하며 일시 집중타로 벽력같이 적선을 분멸하는 전략을 사용하곤 했다. 조선 수군은 당시 아시아에서 널리 쓰이던 해전 전술보다 한 단계 이상 발전한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압도했는데, 여기에는 이순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그 이전의 해전 전술 관련 기록들에서는 이처럼 화력을 중시한 경향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드물잖게 제기되곤 하는 정자전술(丁字戰術)과 학익진의 연관성은 사실무근이다. 이는 해군 전술과 무기 체계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해서 발생한 착각이다. 이순신의 함대 전술이 그 시대로부터 수백 년 앞선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자 전술과 연계시킬 이유와 근거는 전혀 없다. 당시 조선 수군 수준의 함포 사거리 가지고 정자 전술을 시도한다면 트라팔가 해전에서 딱 둘로 쪼개졌던 프랑스 – 스페인 연합 해군 꼴이 날 수도 있다. 당시에도 횡대로 늘어선 프랑스 연합함대를 영국 해군이 종대로 들이쳤다. 정자 전술에 의미가 생긴 것은 함포 사거리가 5km를 넘어선 시대, 즉 19세기 후반 이후였다.
• 정보 수집과 정찰을 매우 중시
수색 정찰과 첩보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의 병법상 진리이지만, 부대 전체에 일정 수준의 피로를 상시 강요하기 때문에 의외로 게을리하게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순신은 철저한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고, 이길 수 있는 작전과 전장만을 택해,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적의 피해를 높이며, 이겼을 때 가장 큰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투만을 벌였다. 그 덕에 전략적으로는 해로를 차단하여 왜 선봉군 병참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진격을 멈추게 하고, 결과적으로 왜군이 육로로 이어진 보급로에만 의존하게 되어 각지의 산발적 의병 활동이 효과적으로 왜군 보급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육지에서 싸우는 모든 왜군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꺾을 수 있었다. 이순신의 공로가 바다에서만 이기고 그친 게 아니라 그로 인해서 조선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100% 승리의 확신이 없었던 전장(부산포)에서 선조가 요구한 대로 무리하게 싸웠다면 이와 같은 결과는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정보 수집을 통해 단 한 번도 왜군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았고, 징비록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서 기습이 있을 것 같으니 준비해라"라고 하자 얼마 안 있어 진짜로 왔다는 일화까지 있다. 휘하 장수들은 이순신이 귀신이 아닌가 했다지만, 실제로는 왜군의 성향과 일기 등을 판단해 미리 대비했던 것.
김탁환을 비롯한 기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라는 이유로 이순신을 까곤 한다. 하지만 이길 수 있는 전장을 택하는 것 또한 지휘관에게 필요한 덕목이므로, 이 말은 지휘관에게 있어 최고의 칭찬이 될 것이다. 무식함 때문에 까려다 도리어 칭찬을 하게 된 꼴. 전장은 지리와 기상 등 수많은 변수 덕분에 유불리가 시시각각 바뀌는 곳이고, 완벽히 유리한 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적장이 지도도 볼 줄 모르는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곳에 가 줄 이유가 없다. 일본 지휘관들은 전국시대 동안 무수한 전투를 경험했고 수십년간 해적질도 해 온 베테랑들이다. 이런 장수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하는 것" 자체가 이순신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일 "이길 수 없는 전장에서 싸움을 택했다면" 이기더라도 그 손해가 막심했을 것이고, 설사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명량해전이다. 울돌목은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칠지만 열세인 조선군 입장에서는 포위를 피하고 조류를 활용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이순신을 무시하고 지나가기도 힘들었던 것이, 울돌목은 통과하면 바로 서해이므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명량 해전에 참전한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출신지인 구루시마 해협은 울돌목처럼 조류가 빨랐고, 일본군도 전투 초반에 조류를 타고 올라오는 등 나름의 전술적 판단 하에서 울돌목에 진입했다.
• 규정에 입각한 엄격한 군율, 솔선수범과 공정함을 바탕으로 한 신뢰, 실전을 가장한 철저한 훈련
또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은 유독 엄격한 군율을 가진 걸로도 유명했다. 어느 정도냐면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보다 이순신을 더 두려워했으며 전사자보다 군율에 의한 처형자 숫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결과 이순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침몰선은 0척, 사상자(死傷者)를 합하여 100여 명밖에 안 되고, 군율에 의한 처형자는 몰라도 역병으로 죽은 병사자보다 전사자가 적다. 아무리 좋은 계획과 기민한 전장 판단력이 있더라도 휘하 병력을 자기 손발처럼 부리지 못한다면 아무리 유리한 전장에서도 패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엄격한 군율에 의해 쌓인 신뢰와 전술적 능력이, 전장에서 깃발만으로 수십~백여 척의 함대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물론 이 군율은 단순한 똥군기가 아니다. 이순신이 평소 사익을 챙기거나,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거나,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곡해하는 상관이었다면 그가 명량 해전처럼 누가 보아도 도박과도 같은 무모해 보이는 승부수를 띄웠을 때 부하들은 '일본군에게 죽으나 이순신에게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기꺼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을 것이다. 당시 조선 수군은 폐지령이 고려되고 있고, 수군 장수들은 합류는커녕 은둔해 있으며, 병력 차이는 1:10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의 돌격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런 미친 명령을 받아들인 병사들이 그만큼 이순신을 존경하고 믿었다는 것밖에는 해석할 방법이 없다. 이순신이 단순히 혹독한 군율만을 강조했다면 장비처럼 부하에게 목이 따이거나, 루쿨루스처럼 병사들이 싸우길 거부했을 것이다. 사실 이 쪽이 평범한 케이스고, 오히려 이순신의 케이스가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통틀어 꽤 드문 경우다.
이순신의 엄격한 군율은 명나라 군사들에게도 적용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군율을 어긴 명군을 직접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진린으로부터 위임받았는데 이로 인해 명나라 수군만큼은 다른 명군에 비해 철저히 군율을 지키게된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에 못지 않은 신망 역시 얻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진린은 물론이고 타국인 명나라 수군들까지 통곡을 하는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인품이 외국인들까지 감명시킨 것.
이러한 신뢰와 군율이야말로 선진적인 화포 및 조선 기술과 함께 조선 수군의 승리를 보장한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용인 전투나 칠천량 해전에서 보듯이 조선군은 사기가 낮아서 뛰어난 지휘관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있지 않으면 이길 만한 싸움에서도 셀프 멘붕해서 부대가 와해되고 마는 고질적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이순신에 대한 신뢰와 엄정한 군율로 이것이 방지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순신은 위대한 지휘관, 위대한 전술가로서 가져야만 하는 모든 덕목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우월한 정보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싸웠다. 일단 전투에 들어서면 아군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적의 장점은 무력화시키는 전술로 적의 피해를 극대화했다. 명장들이 종종 보이곤 하는 호전성이나 아집, 전공 욕심도 없어 항상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또한 이런 전략전술을 실제로 실행한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직접 만들어내다시피한 군대였다. 그 외에도 원하는 전장으로 적을 유인할 때까지의 계략, 육지에서도 하기 힘든 전술 기동을 바다 위에서 완벽하게 해내는 기동 능력, 전투 개시의 시점, 전황에 따라 적을 이길 수 있는 포진, 특히 압도적인 수적 열세 상황에서 발휘된 뛰어난 통솔 능력, 전쟁 내내 발목을 잡았던 원균과 조정의 트롤링까지 고려한다면, 가히 인류 역사상 최고의 수군 지휘관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경상 우수사로 미리 부임해 있었다면 임진왜란이 임진왜변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의 전투 지휘 능력, 전략 / 전술은 절대적이었다. 비록 여러 부분에 있어 욕을 먹는 선조지만 적어도 북방 수비를 맡던 이순신을 반대를 무릅쓰고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수군의 중책을 맡긴 전쟁 초기까지의 인사 행정만큼은 아주 적절했다고 해야 하는데, 선조의 이순신 발탁이 무작정 선조의 안목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근거가 이일 등의 사례다. 그리고 제일 심각한 근거로 경상 우수사에 원균을 임명했다. 당시 전라도 수군이 좌수영, 우수영 모두 합쳐 함선이 최대 50척에 불과했는데, 경상 우수영은 단독으로 최소 75척 ~ 최대 100척 가량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는 경상도가 일본에 접해 있는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1년 만에 정5품 호조 정랑에서 정3품 광주 목사로 발탁된 권율도 특기할 만한 선조의 인사 행정이라 하겠지만, 앞서 원균과 이일 등의 사례 때문에 선조의 권력욕이 만든 작품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즉, 선조의 혜안이나 지혜를 운운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반쪽만 맞는 것이다.
물론 전국 시대의 일본의 주요 전장이 육상이었고 돈이 많이 드는 해군 전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하지 못해서 왜군은 육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해전에는 어려움이 있기는 했다. 물론 왜군 쪽도 바보가 아니라서 해전에는 왜구 출신이거나 나름대로 정예 해상전력을 보냈지만 이전까지 통일된 체계를 갖춘 수군을 운영한 경험이 부족해서 손발이 안맞는 문제가 있었고 판옥선과 달리 순수한 싸움배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예 해상전력은 빠른 배와 항해에 능숙한 선원들과 도선 및 백병전을 장기로 하는 전투병력을 갖췄기에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고 왜군도 이순신한테 처맞으면서(...) 조선 수군에 대한 대응법을 발전시켰다.
왜군의 전술인 도선 접전 또는 등선 육박전은 보편적인 수상전의 형태였고 조류와 바람을 타고 빠르게 기동하는 부분에서 왜군이 뛰어난 실력을 보인건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은 그 문제를 파훼하고자 기동을 기동으로 대응하지 않고 '등선' 자체를 거부하는 형태로 전투선을 개량하고 화포를 탑재한 것이고 우선 화포와 궁시를 이용한 원거리 전투로 왜군의 전력을 깎은 다음 근접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근접전에 들어가기 전에 충분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면 왜 수군은 빠르게 접근하여 붙은 다음 마치 적성에 오르듯 판옥선을 기어 올라가 접전을 벌였고 이억기, 최호의 함대와 김완의 함선도 그렇게 불타버렸다.
또한 전술했듯 왜군도 이순신에게 처맞아가면서 조선수군에 대한 대응수단을 발전시켰고 조선 수군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그 자리를 빼앗아 무리하게 공격에 나섰고 그동안 왜군이 더 발전시킨 등선백병전과 포위협격술에 제대로 당하면서 칠천량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이억기와 최호 등이 휘하 판옥선들을 부려 진형을 짜고 대응하였으나 상황이 너무 나빠서 왜군에게 당하고 말았다. 병력의 피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왜군이 야간에 기습해서 근접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원거리 전투로 적을 충분히 줄이지 못했다. 조선군이 자신들의 장점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왜군이 자신들의 장점을 원없이 발휘하는데다 조선군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이런 상황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전근대의 해전에서는 함선의 체급이 크다고 무조건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체급이 컸지만 그만큼 기동성이 낮았다. 오히려 숫적 우위를 활용하여 빠르게 접근해 포위하고 도선하려면 세키부네가 더 적합하였다. 그렇다고 함선의 체급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게 세키부네를 주력으로 굴린 왜군도 조선측 판옥선을 복제해보거나 덩치를 키운 안택선을 건조해서 대응했다. 여하튼 함선의 경우 조선 측이 무조건 유리했다기보다는 판옥선과 세키부네/안택선의 장단점이 갈리는 것에 가깝고 이순신은 판옥선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술을 잘 활용해서 기적같은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잘 보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내내 철저하게 왜군의 등선할 기회를 주지 않도록 전투를 지휘했다. 병법상 아군의 이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최대한 감추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순신은 그렇게 했다. 거기에 더하여 이순신은 중과부적의 왜군을 맞아 포격전과 함께 등선하는 왜군과 난전까지 벌였다.(정확하게는 기록상 안위의 배에 왜군이 다수 올라갔고, 다수가 전사하여 상황이 위급해지자 이순신이 적선 세 척을 부수고 구원했다고 되어 있다.) 이순신은 멀찍이 뒷걸음질친 열 척의 전선은 내버려두고 응전하여 온 안위와 김응함까지 해서 고작 세 척의 판옥선으로 역류하는 물살을 견디며 몇 시간 동안 수십 척의 세키부네를 막았다. 최대한 적의 등선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던 이순신이 왜군에게 유리한 해류 상황에서 격군들이 빠르게 지쳐 기동성이 저하되었을 것인데도 부순 적선만 31척이라고 장계에 올렸다. 그렇다고 조선 수군이 백병전을 무작정 기피한 건 이니다. 근거리에서 조란환과 화살을 퍼부어서 왜군의 숫자를 줄인 다음 그대로 왜선에 등선해서 포로를 구출하거나 중요한 물품을 노획하는 등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등선백병전을 수행했다.
이순신의 전공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전공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조선군 전체는 물론이고 이순신 개인이 겪은 이전의 전쟁 경험은 모두 여진족이나 왜구와 맞붙는 소규모 비대칭 전투의 형태였지 국가 간의 전면전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순신은 처음부터 수군에서의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았다.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기 전에 이순신이 수군에서 복무한 시기는 36살(1580년) 때 전라도의 발포 만호로 1년 6개월 남짓 복무한 게 사실상 전부였다. 그 외에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조산 만호 등 육군에서 주로 활동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제해권을 놓고 해전이 벌어진 것은 임진왜란이 처음이었기에 제해권의 중요도를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 양군 수뇌부를 통틀어 거의 없었다. 당장 이순신 덕에 계속 이겨왔던 조선조차도 명량 해전의 승리 이전까지 수군 폐지령을 내리려 했을 정도로 제해권과 그로 인한 이득에 대해 무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칠천량의 초대형 참사 이후에도 제해권을 지키기 위해 단 한 척의 전선으로라도 싸우려 한 것은 단지 용기와 결단력의 문제가 아니라 전황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이라 하면 보통 거듭되는 전란을 겪으며 수많은 전투 경험이 쌓이고, 그렇게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중요한 전투에서 모범답안을 들고 나와 대승을 거두는 식으로 배출되곤 했는데, 200년간의 평화기를 겪은 조선에서 단지 소규모 교전만을 겪어 보고 그 이외엔 병법서를 탐독하며 독자적으로 전략 전술을 연구했을 뿐인 이순신이 첫 해전부터 마지막 해전까지 사소한 실책조차 보기 힘들었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모범적인 군인이 아니라 그야말로 천재적인 명장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일례로 최후의 작전의 대가인 만슈타인도 1차 대전 참전과 라팔로 조약 기간의 연습 등의 경험을 토대로 2차 대전의 활약을 펼칠 수 있었으며, 나폴레옹도 사관학교와 1차 대불동맹과의 교전 등을 통해서 성장해 나갔으며, 칭기즈칸도 초창기 시절의 군사적 패배와 경험 등으로 육지에서 승전을 이어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부친 필리포스 2세가 이룩한 군사혁신과 유리한 정치구도를 발판으로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 육군에서 타 군으로 이전하여 전공을 거둔 헨리 햅 아놀드나 밀히도 직전 시기의 신 병과인 공군을 직접 경험하고 공군으로 간 사람들이다. 직전 시대에 자신이 신 병과나 군사혁신의 단초와 관련된 전투에 참가하지도 못하고, 체계적인 군사교리 교습과 연구 없이 이룬 충무공의 성과를 요약하며 다른 군사적 천재와 비교하는 것은 독자에게 맡긴다.
1. 대전략적 구도부터 통찰하고, 그로 인해 제해권 개념을 인지하고 수뇌부에 강조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뇌부로부터 온갖 음해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조국과 백성(국민)에 대한 충절을 다하며 휘하 장졸에게 불변의 사회적 자본으로 기능한 점
2. 전략적 고찰로 군사 운용의 기초를 잡고 소모전에 휘말리지 않으며 지속적 작전을 위해 민심을 얻었으며,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현존함대전략의 요소를 활용하고 이후 한산도로 통제영을 이동시켜 견내량 이서 지역의 해상요새화로 전략적 변모를 꾀하며, 수급보다도 적선 완파를 통한 적 전력의 효율적 감쇄를 이룩한 점
3. 작전적 운용을 극대화하여 아군의 능력을 극대화해서 유지시키고 적의 장점을 거부한 점(기습, 정찰중시, 화포 운용 적극성, 전장선택, 정찰강화 및 아군전투전력 보존 등)
4. 전술적으로 기본적 틀은 있으나 상황에 맞게 운용을 기하면서 항상 솔선수범을 한 점(일자진, 학익진, 장사진으로 순환타격 등 진법의 다채로운 구현, 수급에 연연하지 않으나 사기 고취를 위해서는 활용하기도 한 점, 진두지휘로 조직력 강화 밑 통솔 극대화, 시간적-공간적 이점을 순간적으로 활용하는 즉각대처능력 등.)
참고로 이 점 모두가 임금의 질시와 말 안 듣는 원균이란 희대의 트롤을 끼고 이룩한 가시적 성과이다.
전쟁 초기에 조선군은 장군과 사졸 가릴 것 없이 도망치기에 바빴다. 평소에 그 역량을 준비한 성웅은 그 면모를 실시간으로 선보이며, 200년 전란을 경험했다는 왜군에게 지옥을 선보였다. 돕기는커녕, 녹둔도 사건처럼 실상은 인맥을 통해 전문가로 포장된 인간들한테 시달렸음에도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노량해전을 마쳤을 때,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 존재는 실로 절대적이었다. 거기에 수백년 전 성웅은 그 치명적인 트롤을 아군한테 당하면서도 천재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그 역량을 펼쳐 주었고, 오늘날 그 후손들은 그 역량을 다시금 흉내내기 위한 노력으로 성웅께 경의를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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