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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體)ㆍ상(相)ㆍ용(用) 삼대(三大) >
<대승기신론>은 우리의 마음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마음의 세 가지란
마음의 본체(體), 마음의 양상(相), 마음의 작용(用)을 말한다.
체(體)ㆍ상(相)ㆍ용(用)에 큰 대자를 붙여서 체대(體大)ㆍ상대(相大)ㆍ용대(用大)라 한다.
즉, 삼대란 세 가지 큰 것이라는 뜻인데,
이렇게 대(大)자를 붙인 것은 우리의 마음이 가진 특징과
마음의 작용력이 광대하고 무변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다음은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구절이다.
『所言義者 則有三種 云何爲三. 一者體大 謂一切法眞如
平等不增減故 二者相大 謂如來藏 具足無量性功德故
三者用大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
(소언의자, 즉유삼종. 운하위삼. 일자체대, 위일체법진여.
평등부증감고. 이자상대, 위여래장. 구족무량성공덕고.
삼자용대, 능생일체세간출세간선인과고).
말하는바 뜻(義)에는 세 종류가 있다. 무엇이 셋이 되는가.
첫째는 체대(體大)로서, 일체법의 진여를 말한다.
평등해 증감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대(相大)로서, 여래장을 말한다.
무량한 성공덕(性功德)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용대(用大)로서, 능히 일체 세간ㆍ출세간의
선(善) 인과를 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대를 갖춘 진여는 바로 중생의 일심(一心)이라고 한다.
일심이란 분열돼지지 않는 우리의 본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참되고 한결같은 일심의 본질(體大)과 속성(相大)과
기능(用大)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체대(體大)’는 불법의 본질적 진리인 공성(空性)의 위대성으로서의 법신불(法身佛)을 말하고,
‘상대(相大)’는 불법의 현상적 존재의 위대성으로서의 보신불(報身佛)을 말하는 것이며,
‘용대(用大)’는 공성과 존재의 위대성을 다 활용하는 마음의
위대성으로서의 화신불(化身佛)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는 또한 불교의 진리를 말하는 세 가지의 위대성을 말한다.
우리의 본래마음은 본체(本體)적 측면에서는
‘텅 빈’ 공적한 성품이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현상(現相)적 측면에서는 ‘밝은’ 앎의 성품을 갖고 있다.
이 ‘텅 비고 밝은’ 본래마음의 작용(作用)에 의해,
만상(萬象)이 생겨나고 삶이라는 스토리가 만들어졌으니,
만상은 밝고도 텅 빈 것이며, 삶은 텅 비고도 밝은 것이다.
우리의 삶과 일상이 모두 우리 본래마음의 작용이라는 것과
그것들이 현상적으로는 명백하고 분명한 것(本然覺性)이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텅 비어 있는 성질(本然淸淨)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본연각성(本然覺性)---인생을 살아가면서 돈도 명예도 권력보다
나 자신의 본연의 모습이 무엇인가 깨닫는 것.
※본연청정(本然淸淨)---처음의 깨끗하고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되돌아가고 싶고. 또 그런 마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
체대(體大)와 상대(相大)는 일심(一心),
한마음의 체와 한마음의 상이고, 일심을 대승이라고 한다.
그리고 크다는 것(大)은 상대적 ‘큼’을 벗어난 절대적 ‘큼’을 말하고
존재의 본질이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대승이 바로 일심인데, 이 게 여래장(如來藏)이고 여래법신(如來法身)이다.
그러니 여래장이나 여래법신의 다른 이름이 일심이고,
일심의 다른 이름이 대승이다. 이 대승을 체대와 상대 둘로 나눈다.
‘체(體)’라는 것은 과거에 생긴 것도 아니고 미래에 없어질 것도 아니다.
끝내는 언제나 변함이 없이 본디부터 그 성품이 스스로
모든 공덕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이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텅 비어있는 게 체의 모양인데,
그 일심은 비어 있는 모습(體大)만 있는 게 아니고 상대의 모습도 있다.
그 게 대승이다.
체대(體大)의 본질은 공인데, 상대(相大)는 공에 머물지 않고,
모양이 있기 때문에 공하지 않은[불공(不空)] 모습이요, 무량성공덕(無量性功德)이라 한다.
※성공덕(性功德)---모든 중생의 본성에 본디부터 갖추어져 있는
뛰어난 능력, 즉, 분별하지 않는 지혜를 갖춘 뛰어난 능력을 말한다.
그래서 여래장이니 여래법신이니 하는 일심(一心)에는
한량없는 성품(性)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
부처님이 갖고 있는 상대(相大), 부처님의 모습은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늘 들어있어도 색신, 즉 물질적 몸을 나타내서
중생을 구제한다.
소승의 최고 경지는 아라한(阿羅漢)이다. <능가경>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이 환(幻)인데, 아라한은 환이 두려워 열반에 숨어버린다.
그래서 멸진정(滅盡定)에 숨어 나오지 않는 것이 아라한이다.
반면 대승보살은 아라한의 경지인 멸진정에 가서 열반에 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열반에 머물지 않고 다시 나와 중생을 구제한다.
그래서 이 세상이 환일 줄 알고 환이 두려워 피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허깨비 같은 이 세상, 즉 환을 이용해서 중생구제에 나서는 것이다.
그 게 대승이다.
진여의 불공(不空) 측면이 여기서 말하는 상대(相大)의 측면이고,
공(空)의 측면이 체대(體大)의 모습이다.
그래서 불공(不空)은 상대(相大)를 얘기하는데, 모양[相]이 생긴다는 것은,
상호관계 속에서 인연이 돼야만 모양이 생긴다. 공하지 않다[不空]는 것은
자극을 받으면 마음이 일어나듯이 상호관계를 가진다는 말이다.
대승(大乘)의 대(大)를 법(法)의 측면에서 봤을 때는 일심(一心)이 되는 거고,
뜻[義]의 측면에서 봤을 때는 자세하게 체대(體大), 상대(相大), 용대(用大)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래서 법(法)은 일심(一心) 하나로 총괄해서 얘기했지만 그 뜻을 다시 세분해서 보니까
일심의 큰 뜻에는 체(體)의 큰 모습, 상(相)의 큰 모습, 용(用)의 큰 모습, 세 개가 있다는 말이다.
삼대란 일심(一心)을 체, 상, 용의 세 관점에서 본 것이다.
체의 관점에서 일심을 보면, 악마도 신도, 부처도 인간도, 동물도 자연도,
모두 이 일심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 일심에는 무량한 덕상(德相), 무수한 덕상이 구비돼있기 때문에 상대(相大)라고 하며,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용대(用大)라고 한다.
이와 같이 체대, 상대, 용대를 알게 되면
인생이나 자연을 보는 눈이 확 달라진다.
말하자면 인생의 영묘한 작용이 보이기 시작하고, 영성계(靈性界)가
보이기 시작하며, 법계(法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안으로 사물을 볼 때는 보는 곳만 자세히 보이고
그 옆으로는 희미하고 뒤는 전혀 안 보인다.
그런데 심안(心眼)이 열려 있으면 앞을 보는 동시에 상하좌우 뒤까지 다 본다.
빛이 사방을 비추듯이 마음이 그렇게 작용을 하는 것이다.
진여 자체가 그런 작용력을 갖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 무엇을 분석하고 관찰할 때
한 가지 측면으로만 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관찰한다. 그 셋이 체(體)ㆍ상(相)ㆍ용(用)이다.
체(體)는 본질, 본체, 근원, 근본 등을 뜻하고,
상(相)은 나타나 있는 모습을,
용(用)은 작용이나 능력을 가리킨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반드시 체ㆍ상ㆍ용이 있다.
체ㆍ상ㆍ용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체ㆍ상ㆍ용이란 어떠한 것인가. 예를 더 들어보자.
옆에 시계가 있다면 그 시계를 바라보자.
‘나’ 의 눈으로 보는 시계의 모습이 바로 상(相)이다.
그 시계의 용(用)은 우리에게 시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시계의 체(體)는 그와 같은 시계의 모습을 낳게 하고
시간을 알게 하는 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해준 근원이요 근본이다.
바로 시계를 만들어낸 사람의 ‘생각’이다.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작용을 표출시키기 위해 여러 부품들을 조합해
지금의 시계 모양으로 만들어낸 발명가의 생각(마음) 그것이 체이다.
발명가의 마음이 시계의 근원이다.
즉, 발명가의 마음이 시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이 체(體)는 보이지 않는다. 상과 용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지만
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
이와 같이 체ㆍ상ㆍ용은 마음의 본체(本體), 양상(樣相), 작용(作用)을
말하는 것이어서, 마음의 체ㆍ상ㆍ용에 대해서 살펴보면,
체(體)는 바탕(근본)이고, 상(相)은 모양(모습, 현상)이며,
용(用)은 작용(쓰임)이라는 뜻이다.
체(體)란 일체제법(온갖 현상. 모든 사물) 그 자체를 말하고,
상(相)은 그 위에 현현된 특질을 말하며, 용(用)은 그 작용을 말한다.
이를 의술에 비유하면,
체는 - 의술이 있게끔 해주는 의학 ― 법신에 해당하고,
상은 - 의학을 배운 의사 자격증 소지자 ― 보신에 해당하며,
용은 - 의술을 펼치는 사람(의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 화신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은 체ㆍ상ㆍ용으로 마음을 분석하면서
유아(有我)와 무아(無我)의 공존을 이해시키고,
왜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수행을 하고
우리의 환경, 우리의 국토를 장엄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인연이란 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체ㆍ상ㆍ용 삼대(三大)가
어우러진 인연으로 생성되고 인연이 다하면 소멸한다.
체ㆍ상ㆍ용 삼대 그것이 업(業)의 힘인 업력(業力)이다.
지구를 예로 들어보자,
지구의 체(體)는 지구의 공전하는 성질이다. 지구 자체의 본성이며, 법칙이다.
상(相)의 근본을 체라고 부른다. 현상의 본성을 체라고 한다.
다양한 현상들의 원인을 체라고 한다.
체는 현상들이 발생하는 원리와 법칙에 해당한다.
지구의 상(相)은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등 자연의 모습이며,
그리고 이러한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있게끔 하는 근원이 체이다.
그리고 지구의 용(用)은 상(相)에서 나오므로 공기, 물, 대지,
나무, 꽃 등의 작용이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모습이 용(用)에 해당한다.
• 체대(體大)는 일심의 본질에 대한 표현이다.
분열되지 않는 우리의 본마음인 일심(一心) 앞에서는
일체의 사물이 다 참되고, 한 결 같이 남과 나의 대립이나 차별이 없고
줄거나 느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질이 크다고 해서 체대(體大)라 한 것이다.
그리고 원효(元曉) 대사는 이것을 불(佛)의 삼신(三身) 중 법신(法身)에 연결시켰다.
「본성 - 진여문」에서 보면, 체(體)는 마음의 본성으로서,
현상(相, 用)의 ‘체’라는 뜻이다. 체(體)는 마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이며,
어지럽게 변화하는 현상들의 바탕이 되는 원리나 법칙에 해당한다.
마음의 모습(相)이 아무리 다양하고 무질서하게 보이더라도
본성으로부터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의 체(體)는 공성(空性)이며, 여래장(如來藏)이고, 일체경계 본래일심(一切境界 本來一心)이다.
인생의 모습들은 복잡하고 다양하지만, 모두 동일한 마음의 본성에서 비롯됐다.
생멸하는 현상계는 진여(體)를 근원으로 일어나지만
진여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상과 용만 작용한다.
여래의 본성이 숨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이치를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
일심이 온전하고 참될 수 있는 씨앗인 여래장으로서
무한한 성(性)과 덕성을 다 갖추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속성이 위대하다고 한 것이다.
※일체경계 본래일심(一切境界 本來一心)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기를
“일체 경계(一切境界)는 본래 일심(本來一心)이어서 상념(想念)을 여의었으나,
중생이 경계를 잘못 보기 때문에 마음에 차별된 경계가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불교의 대명제요, 대승의 유일한 법이며, 진리의 선언이다.
본래 하나의 마음에서 온갖 사상 및 종교가 일어나고,
천차만별한 경계가 눈앞에 전개된다.
따라서 마음 밭에 바른 믿음의 씨앗을 심어야 불성이 성립된다.
• 상대(相大)는 일심의 덕성에 대한 표현이다.
「현상 - 생멸문」에서 보면, 상(相)은 마음의 모습(현상)을 말한다.
개인이 가진 성품과 능력 같은 것들이며,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성이 있어야 상(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람의 개성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각자 분명한 차이가 있고,
변하기도 한다.
농사를 잘 지으면서 훌륭한 사람도 있고, 성질이 고약한 사람도 있다.
장사를 잘 하면서 점잖은 사람도 있고, 성격이 급한 사람도 있다.
의로우면서 운전에 능숙한 사람도 있고, 교활하면서도
모든 일에 서툰 사람도 있다.
부처님처럼 모든 것에 뛰어나고 위없는 덕성의 소유자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모습은 다양한 정도가 아니라
무수하게 많음으로 상대(相大)라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상을 삼신 중 보신(報身)에 연결시키고 있다.
• 용대(用大)는 일심의 작용에 대한 표현이다.
용(用)은 현상에 속하며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일심이 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나 초현실적으로 모든 선한 원인과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작용이 크다고 해서 용대(用大)라 한 것이다.
체ㆍ상ㆍ용 삼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대의 기능이다.
내 마음은 중립의 상태에 있다. 그 마음의 기능이나 활용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느냐에 따라 불국토를 장엄할 사람도 되고,
불국토를 부수는 사람도 된다.
용대(用大)는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을 말한다.
화신불은 불법의 본질인 공성(空性)의 도(道)와 그 현상인
존재의 덕(德)을 다 활용해 마음이 어떻게 하면 번뇌의 괴로움에서
열반의 지복에로 건너갈 수 있겠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오셨고(如來), 그렇게 가신(如去) 것처럼 활용의 진리를 말한다.
석가세존은 중생이 어떻게 하면 우주의 도와 덕과 하나가 돼서
마음이 무애한 해탈의 자유와 원융한 연기의 평등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체(體)ㆍ상(相)ㆍ용(用)에 관해서는 많은 용어들이 있다.
본질(本質)이란 진리, 근본, 원인, 근원, 뿌리를 뜻하며,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것(우주)을 만들어 낸
진여의 작용(에너지)을 본질 또는 본성이라 한다.
현상(現相)이란 본질에 의해서 만들어져 세상에 나타나 있는
모든 것을 말하며, 인간의 인식 대상이기도 하다. 즉, 우리들의
오감(눈, 귀, 코, 혀, 몸)으로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다.
본질은 모든 것의 근원을 뜻하기 때문에 ‘체(體)’라 하고,
현상은 체를 바탕으로 세상에 드러난 모습과 그 쓰임새
또는 작용을 의미함으로 ‘상(相)’ 또는 ‘용(用)’이라 한다.
<화엄경>에서 언급하는 이(理)와 사(事)로서 이는 체요, 사는 용이고,
이와 사로 나누어지는 모습이 상(相)이다.
이를 사회적인 언어로 바꾸면, 체 = 근본이고, 용 = 작용이고,
이러한 모습이 현상(現相)이다.
또한 체는 무(無)이고, 용은 유(有)라고 할 수도 있고,
무와 유로 나누어지는 현상이 상(相)이다.
체 = 진공(眞空)이요,
용 = 묘유(妙有)이며,
진공과 묘유가 있음이 상이다.
<법성게>에서는 체 = 일체(一體)이고, 용 = 일체(一切)라 했다.
따라서 일체(一體)와 일체(一切)가 있음이 상(相)이다.
법(法)에서는 체 = 무위법(無爲法)이요, 용 = 유위법(有爲法)이다.
무위법과 유위법이 나누어지는 현상이 상이다.
일반적으로는 체 = 본래면목(本來面目)이고, 용 = 삼라만상이다.
본래면목에서 삼라만상이 나타나는 모습이 상이다.
그리고 체와 용으로 나뉨의 모습(相)이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체는 안 보이는 것(藏)이고, 용은 보이는 것(顯)인데, 결국 하나이다.
체는 시간이고, 용은 공간인데, 결국 시공합일(時空合一)이 된다.
체는 본체이고, 용은 작용인데, 결국 하나이다.
체는 근원이고, 용은 현상인데, 결국 하나이다.
체용은 음양 관계로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일상적인 예로 설명하면 쉽다.
얼굴은 하나인데, 화난 얼굴, 기쁜 얼굴, 아름다운 얼굴 등이 있다.
화나고, 기쁘고, 아름다움은 분명히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얼굴이다.
얼굴 자체는 체(體-공간)고, 화나고 기쁘고 아름다움은 용(用-시간)이 된다. 이러한 현상이 상(相)이다.
체(體)는 하나지만, 용(用)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상(相)이다.
바다(체)는 하나지만, 파도(용)는 성난 파도, 잔잔한 파도 등 다양하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상(相)이다.
눈(체)은 하나지만, 시력(용)은 안 보이거나 잘 안 보이는 눈 등 다양하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상(相)이다.
천지(체)는 하나지만, 우주(용)는 대우주, 소우주 등 다양하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상(相)이다.
글의 주장(체)은 하나이지만, 독자의 이해(용)는 다양하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상(相)이다.
이와 같이 사례가 많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의 합일이기 때문이다.
체ㆍ용은 관점이다.
체ㆍ용은 체(體)의 기준이 어딘가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상(相)이다.
체ㆍ용은 하나의 우주를, 시간, 공간, 여러 가지로 관찰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상(相)이다.
깨달음(종교적)으로 보면,
체(體)는 진여(眞如), 여여(如如), 여래(如來), 원각(圓覺), 일심(一心), 불성(佛性),
청정심(淸淨心), 본래심(本來心)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상ㆍ용은 체의 다른 모습일 뿐, 체ㆍ상ㆍ용은 둘이 아니다(不二),
다르지 않다(不異), 같다(卽化)는 의미에서
이 모두를 법(法)이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을 법계(法界)라 한다.
다시 말한다면, 체는 상ㆍ용 모두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구성하고 있는)
성분 또는 성질을 말한다. 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상과 용은 겉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집착하고 여기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은 상ㆍ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본질과 현상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1) 금(체)으로 반지, 목걸이, 행운의 열쇠(상, 용) 등 어떠한 것을 만들어도 모양은 다르나,
금이라는 본래의 성질은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향나무(체)로 어떠한 것(상, 용)을 조각해도
냄새는 향나무 냄새가 날 것이며, 본질은 향나무라는 성질을 떠날 수 없다.
2) 물과 얼음과 구름은 현상적으로는 다르게 보이나 물이 찬 것을 만나면(인연, 조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다시 더운 것을 만나면 물이 되며, 물이 증발해서
적당한 인연(조건)을 만나면 구름이 되기 때문에
얼음과 구름은 물의 ‘상(相)’과 ‘용(用)’이고, 물은 얼음과 구름의 ‘체(體)’이다.
그런데 이 셋은 물의 본래의 성품인 ‘젖어 들게 하는 성질’은 똑같이 지니고 있다.
3) 바닷물은 본래 고요하나 바람을 만나면 파도를 만든다.
바닷물(體)과 파도(相ㆍ用)는 모양은 다르나, 파도는 바닷물을 떠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상ㆍ용은 체의 다른 모습일 뿐, 체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참나와 가아(에고, 自我)는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것과 같고,
서로 상대적인 모든 것은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행복과 불행이 서로 분리될 수 없듯이.
용(用)은 결과로서 우리에게 보이는 사물의 형상이나 쓰임이므로
사물이나 형상으로 나투기 이전에 체(體)가 그렇게 연기,
즉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불교적으로는 법신(法身)과 화신(化身)의 관계이기 때문에
둘이 아니고, 다르지 않으며, 같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았으므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과학은 수(數)의 논리로 입증해서 실험으로 검증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일본의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1907~1981)는
실험의 검증 없이, 동양의 체ㆍ용(體用)과 수(數)의 논리만으로
중간자(中間子)라는 개념을 밝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체ㆍ용은 과학에서도 공인 받은 개념이다.
중간자이론(中間子理論)이란 양자와 중성자에서 원자핵을 만드는 힘,
즉 핵력(核力)은 서로 중간자(meson)를 교환함으로써
강한 상호 작용(강한 핵력)이 생긴다고 설명하는 이론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