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321장(구 351장, 날 대속하신 예수께)
본문의 중심내용 : 아브라함을 의롭게 한 믿음은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는 유대인만 아니라 그의 믿음을 따르는 모든 이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보기]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메시지l]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가 ‘믿음’이라는 단어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말 자체가 바꾸어 말하면 믿음생활입니다. 기독교란 하나님을 믿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믿는다고 말할 때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믿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보통 아브라함을 부를 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전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없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브라함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가장 좋은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신자의 샘플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혈통상으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을 함께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믿음
본문 1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가졌다고 합니까?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즉 눈으로 보는 현실은 전혀 아닌데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하나도 없는 상황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신 네 자손이 이같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은 ‘이와 같으리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원래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현실은 자식 하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시되 큰 민족의 조상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빈정거렸을 것입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거지한테 이름을 갑부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자식하나도 없는 사람이 아브람도 모자라서 아브라함이라고 이름을 바꾸다니 미친 것 아니야? 그런데 현실이야 어떻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니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현실을 보면 전혀 가망성이 없었지만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 나아갑니다. 로마서 4장 18절의 말씀은 아브라함 80세 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 19절 말씀은 20년이 흐른 상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100세가 되는 해에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롬 4:19-20)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말씀합니다. 이제는 뭐라고 말해도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을 알고도’라고 말씀합니다. 인력으로는 도무지 방법이 없다는 것을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웬만하면우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해보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도저히 그럴 가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한지 20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자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모델로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서 그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마지막 절망의 상태까지 가도록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 이상 인간 편에서 어떤 가능한 조건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방법이나 가능성이 다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 가운데서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능히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함
물론 아브라함이 전혀 의심이나, 과연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회의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몇 번씩이나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초조해하고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아브라함에 있어서 오랜 기다림의 과정은 흔들리고 의심하는 시험과 자주 싸워야하는 긴장의 나날이었지만 동시에 강한 믿음, 의심하지 않는 순수한 믿음을 만들어 가는 성숙의 시기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이 좋으면 전혀 의심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의심하니까 믿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 의심을 극복해 가고 해결해 가는 과정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히려 시험 앞에서 진정한 믿음은 더 확실해 지고 굳건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은 견고하고 확신에 찬 믿음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약해지고 의심의 덫에 걸려 고통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해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롬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은 모두다 현실이 된다고 굳게 믿은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은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롬 4: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과 인격을 믿고 그의 전능성을 믿는 그의 믿음 자체를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신앙
특별히 그는 17절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롬 4: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감기를 낫게 하는 것이 쉽습니까? 암을 낫게 하는 것이 쉽습니까? 우리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감기를 낫게 하면 조금 감사하고, 암이 나으면 할렐루야! 하면서 온통 난리가 벌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감기를 낫게 하는 것이나, 암을 낫게 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을 통해서도 일하시고, 자연법칙을 넘어서서도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현실화된다는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결국 아브라함이 순종할 수 있었던 근거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히 11:17-19)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죽인다면 하나님의 약속자체가 폐기되는 모순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실제로 이삭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하여 성경은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이 이전에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죽은 고목나무와 같은 자신을 통해 아들 이삭을 주신 것은 고목나무에 꽃이 피는, 이미 자기 몸이 죽은 것이 되었는데 그를 통해 생명을 생산하는 부활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식을 낳게 하시는 거나, 죽은 자를 살리시는 거나 하나님 편에서는 다를 게 없다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자식을 낳을 때 이미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비록 지금 이삭이 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능히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죽어도 산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시대에는 율법으로 구원을 받았고, 신약시대에는 믿은 혹은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오직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원리에 따라서만 구원의 여부가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후손을 통해 구원자가 나아오고, 모든 열방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희미한 메시야의 계시라 할지라도 그것을 굳게 붙잡고 그 약속의 말씀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가망없는 우리라 할지라도 능히 구원하실 수 있음을 확고하게 믿고 부활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
롬 4:23-2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4:23-24)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믿음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하나님의 권세를 믿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이제는 부활케 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것이 구원의 신앙입니다.
기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창조와 부활의 주를 의지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