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열의 수필세계
이동민
하재열은 경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서 초, 중, 고의 학교를 경주에서 다녔다. 나는 여러 수필가님의 수필을 읽으면서 시골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과, 성장기의 학교생활이 그 사람의 인간됨과 정서의 바탕이 되어 있음을 많이 읽었다. 더구나 작가의 초창기 작품은 감성적으로 표현한 글이 많았다. 하재열도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성 위주의 수필과는 내용이 조금 달랐다. 어쩌면 이처럼 다름이 그의 수필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까.
그가 대학에 진학한 다음 해에 아버지는 경주의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대구로 이사를 왔다. 자식들을 공부시키려면------, 하는 것이 이유였다. 그의 글에 의하면 대구로 옮긴 후의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웠었나 보다. 그의 글에는 가정을 꾸리려 고생하신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읽을 수 있다.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추억 대신에 아버지 이야기, 할머니 이야기로 대신하는 것 같았다. 그때의 이야기도 회상 속에 아름답게 담아내기보다는 사실적으로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대학 진학을 영남대 국문과로 함으로, 청년시절에 문학에 대한 꿈을 지녔던 것이 아닐까. 국문과라면 국어를 전공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표현하지 않았고(그의 수필에서 피력한 내용을 찾지 못하였어), 졸업 후의 문학 활동 흔적이 잘 보이지 않아서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수필을 읽다 보면 수필가님들이 정식으로 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하신 분은 아주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하재열의 작품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수필작가의 작품 읽기에서, 그가 태어난 고향을 주요 요소로 본다. 내 경험으로는 시골 출신과 도시에서 자란 사람의 정서 표현이 조금 다르게 느꼈기 때문이다. 시골이 고향인 사람이 고향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시골 출신인 하재열도 유년기를 보낸 시골 마을 이야기가 많으리라 생각했지만 생각만큼 많지는 않았다. 친구 이야기보다는 가족 이야기. 즉 할머니와 아버지 이야기가 많았다. 할머니와 아버지와는 정서적 유대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골 출신답게 그의 수필에도 향수 심리가 표현되어 있었다.
고향의 지명인 ‘사랑메기’는 사춘기를 보낼 때 지명에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감으로, 자신의 사춘기적 감정과 결부되어서 가슴앓이를 하였음을 표현하였다. 사춘기를 보내는 남자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일임으로 특이한 것은 아니다. 물을 길어 와서 부엌 앞에 놓여 있는 물독에 물을 채우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그의 향수 의식에 강하게 메달려 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단순히 그립다는 것을 넘어서서 종교적인 느낌마저 가지도록 한다. ‘아버지의 물건’은 그가 보낸 유년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였다. ‘어머니의 이삿짐’도 고향 이야기라기보다는 여섯 번이나 이사를 하였던 대구에서의 생활을 말하였다. 하재열 작가에게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바로 고향이다.
그는 고향인 시골 마을을 대학에 다닐 때 떠나왔다. 많은 수필가처럼 그에게도 시골의 고향 마을은 글쓰기에서 감성적 요소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만큼 절실하지는 않아 보인다. 고향을 떠난 오랜 후에 유년을 보낸 고향 마을을 찾아갔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느꼈을까.
회귀할 수 없는 강어귀에 나는 늘 걸려있었다. 생을 얻은 곳으로 목숨걸고 내달리는 연어가 부럽다. 망설임 없는 그 끝 행진이. 세상의 바다를 멋들어지게, 때론 힘겹게 유영하면서도 내 눈은 이따금 강어귀 쪽을 힐끔거렸다. 다시 자리할 수 없고, 가 봐야 허망하다는 영리한 어림을 하면서도 강 안쪽 산천엔 꽃 채색을 해왔다. 하지만 오늘 보았다. 그루터기 위쪽의 사라진 둥치 따라 이미 고향은 정녕 떠나고 없었다. 부서지고 있었다.
-‘그래도 에는 땅이라니’에서.
그에게도 유년을 보낸 고향의 시골 마을이 있었다. 장년이 되어서 찾아갔을 때는 유년기의 고향 마을이 아니었다. 부서져버리고 없었다. 자신의 감성도 부서졌는지 모르겠다. 그래선지 그의 글에는 유년의 추억보다는, 할머니, 아버지의 이야기로 고향을 표현하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정서의 뿌리로 남아있는 건 틀림없지만, 다른 작가와 비교하여 그렇게 절실한 것은 아닌 듯하였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오랜 공무원 생활이다. 30년 이상을 공무원으로 살았고, 고위직에 올랐다. 졸업 후에, 그리고 공직을 떠날 때까지의 문학활동이 뚜렷하지 않다. 2011년에 퇴직하고, 2012년에 수필과 비평지에 등단한 것으로 보아서는 펜을 놓고 지냈던 것은 아니다, 즉 문학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눈에 뜨이도록 활발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싶다.
오랜 공무원 생활이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30년 이상을 공무원으로 봉직했고, 고위직까지 올랐다. 공무원 사회의 기강이랄까. 질서 의식이 부지불식간에 그의 수필에 나타났을 것이다. 이런 것들도 그의 수필세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경력에서 특이한 점이라면 초등학교 시절에 미술전에 참여하여 입상한 일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문학보다는 미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나 싶었다. 은퇴 후에 아마추어 미술인 동호회에도 참여하여 그룹전의 전시회에 작품을 걸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미술 경력이나, 대학 진학 등을 생각해 보면 예술의 바탕이 되는 감성적 요소들은 유년기부터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고 보인다.
그가 살아온 날을 요약하면, 2011년에 대구 지하철 공사의 전무이사를 마지막으로 공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2012년에 수필과 비평지에 수필로 등단하였음으로 수필문단에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2012년의 등단이라면 훨씬 이전부터 수필쓰기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2015년에 첫 수필집을 발간하였다.
그의 수필세계를 알아보기 위해 그가 살아온 지난날을 살펴보면 그림 그리기 그리고 국문학과에 진학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것들이 그가 수필작가로서의 소양을 쌓아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첫댓글 저는 수필에 회의를 느끼게 된 이유가 글과 사람이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데 있습니다. 한글을 겨우 깨친 어느 할머니가 쓴 글에 큰 감동을 받는 것은 진실함 때문입니다. 진실이 빠진 글에 과연 누가 공감하며 감동할까 의심합니다.
어제(3.18), 공부에서 우리의 기억은 환상과 거짓이 섞여 있으므로, 순수한 사실은 없다고 했습니다.
회상을 통해서, 기억을 불러내어 쓰는 수필이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조샘의 말대로, 진실을 나타냄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글이 수필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