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성령의 도유로 성자를 주님이신 그리스도로 세우셨으니
저희도 함께 축성하시어 현세에서 구원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제1독서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기쁨의 기름을 주게 하셨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61,1-3ㄹ.6ㄱㄴ.8ㄷ-9
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6 너희는 ‘주님의 사제들’이라 불리고 ‘우리 하느님의 시종들’이라 일컬어지리라.
8 나는 그들에게 성실히 보상해 주고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어 주리라.
9 그들의 후손은 민족들 사이에, 그들의 자손은 겨레들 가운데에 널리 알려져
그들을 보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제2독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1,5-8
5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6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7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복음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6-21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발씻김과 성찬례는 하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이들과 구분되는 특징 하나가 있다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어?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도 사랑할 줄 아는데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유일한 이유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이 아니면 부모를 사랑할 수 없고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성찬례입니다. 말씀으로는 목욕을 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사랑을 위한 준비를 시킬 수 있지만, 자아와 삼구를 완전히 씻지는 못합니다. 자아와 삼구는 하느님의 피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부모의 피 흘림이 아니면 그것이 씻겨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유튜브에서 앞이 안 보이는 아빠가 아기를 혼자 키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이도 선천성 백내장으로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빠는 혼자 젖 동냥을 해가며 아기를 키웠고 그것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방영되었습니다. 덕분에 후원금이 들어와 아기는 수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는 왼쪽 눈은 잃었지만, 오른쪽 눈은 0.2라는 시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6년이 지난 뒤 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었고 공부도 잘하여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제작진은 아들에게 16년 전에 아버지가 자신을 키우기 위해 고생했던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을 꼭 잡습니다. 마치 나무 토막에 불이 붙으면 그 안에 있는 물과 진액이 빠져나오는 것처럼 아버지의 피는 아들의 자아를 눈물로 빠져나오게 한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바다를 거닐며 바다의 색깔과 파도의 색깔을 설명해줍니다.
먼저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형제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려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이야기에서 아이는 형제가 없습니다. 저는 90cm밖에 크지 못한 ‘대성이’의 예를 들고 싶습니다. 대성이는 선천성 왜소증을 앓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지만, 다섯 살짜리 동생에게 장난감을 빼앗깁니다. 하지만 동생을 용서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를 합니다. 제작진이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대성이는 대답합니다.
“형이니까요!”
자신을 동생의 형으로 만들어준 이가 부모입니다. 대성이는 아빠, 엄마가 자기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압니다. 그래서 아버지 폐지와 폐품을 줍는 것을 고사리손으로 도우려고 합니다. 미안해 하는 아버지를 오히려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자신은 괜찮다며 위로합니다. 자아가 부모의 피로 죽은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아이가 어떻게 형제를 미워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사랑을 받은 동생은 형이 수술을 할 때 눈물을 흘립니다. 동생도 철이 없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성찬례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발씻김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요한은 이미 성찬례에 관한 내용이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대신 그 성찬례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는 발씻김 예식을 넣음으로써 발씻김을 통해 성찬례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한 것입니다.
성찬례의 목적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서 형제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우리가 성찬례 없이 사랑이 가능했다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찬례가 어떻게 우리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발씻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찬례에 참여하나요? 성찬례를 통해 사랑을 방해하는 자아와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이 눈물로 빠져나오나요? 유다는 예수님을 한 번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배반했습니다. 둘 다를 위해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베드로는 유다를 더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서만 이웃 사랑이 가능한 것입니다. 한 부모의 피 흘림이 한 형제를 만들 듯이, 하느님의 피 흘림은 모든 피조물을 형제로 만듭니다.
https://youtu.be/TVbkFpO1rMg
유튜브 묵상 동영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잘 아는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었다면 어떻게 바라볼 것 같습니까? 엄청난 행운아라고 하면서 부러워할까요? 지금 내가 힘드니까 도와달라고 부탁할까요?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하겠습니까? 그의 행운에 배 아파하는 것이 아닐까요?
로또 당첨은 814만 5,060분의 1의 확률이라고 하지요. 불가능한 확률을 뚫고서 당첨된 것은 분명히 엄청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힘든 확률을 극복한 사람은 어떨까요? 더 엄청난 행운아가 분명합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그 엄청난 행운아입니다. 한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남자가 가진 1억 개의 정자 중 단 하나의 정자만이 난자를 만나게 됩니다. 즉, 우리 각자는 1억분의 1의 확률을 뚫고서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로또 당첨보다도 어려운 확률을 극복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부모가 만날 확률을 따져보면 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여러분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날 확률까지 더해보면, 지금 우리의 존재는 거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사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 역시 기적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제가 주님의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 주님의 큰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자기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기적만이 계속 주어지는 삶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자기 삶의 기적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과거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교회는 오늘 우리가 봉헌하는 주님 만찬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성체성사를 이 땅에 새롭게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을 사는 우리도 미사 안에서 커다란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커다란 기적입니다. 혹시 배반한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줄 수 있습니까?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향해 오히려 커다란 선물을 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한 제자가 자기를 팔아넘기고, 가장 믿었던 제자는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끝까지 따르겠다는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히 환호하던 이스라엘 군중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적의 담긴 말을 외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최후 만찬을 통해 성체성사라는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은총에 은총을 계속 더해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며, 주님께 계속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행운아입니다.
그곳을 빠져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을 거쳐 가는 것이다(로버트 프로스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