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지 않으면
苟學矣(구학의)-진실로 그가 아무리 많이 배웠다 하더라도
不力行(부력행)-그 배움을 실천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雖讀書萬卷(수독서만권)-비록 책을 만 권을 읽었다 하더라도
亦無所用(역무소용)-또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신숙주(申叔舟)
고사성어 말잔치 정치인 “극기복례(克己復禮)”는 모르나?
새정치민주연합이 혁신(革新)을 한다면서 쏟아 내어놓은 고사성어가
대단하다.
신문 기사에는 “정당(政黨)인가 서당(書堂)인가”라고 말할 정도로
역사 속에 회자(膾炙)되는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인용하면서 혁신(革新)을
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새정치민주연합 사람들이 외친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모아 보았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상곤 혁신위원장은
위원장직을 수락한 직후에는
▲우산지목(牛山之木)”이라 했다.
“우산(牛山)의 울창한 숲이 땔감으로 베어져 민둥산이 되었다”는 뜻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을 여러 가지 탓을 하지 말고 본래 면목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사퇴시킨 박근혜 대통령에 대하여
▲가정맹호(苛政猛虎)라고 했다.
“가혹한 정치의 폐해가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박대통령을 평했다.
혁신안에 대한 부정적 관측이 나올 땐 자신의 각오를
▲파부침주(破釜沈舟)에 비유했다.
“솥을 깨고 돌아올 배를 가라앉혀 버릴 정도의 굳은 결의”를 의미한다.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 하였다.
“기본이 바로 서야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백의종군(白衣從軍)
“벼슬이나 계급을 내려놓고 말단 졸병으로 참전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원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빼앗기고
명랑해전에서 今臣戰船 尙有十二(금신전선 상유십이)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를 인용한 것이다.
조국 서울대 교수는
▲이대도강(李代桃僵)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해 넘어지는 것도 필요하다”
며 목적을 위해 희생을 자처 한다는 뜻이다.
문재인 대표는
▲육참골단(肉斬骨斷)
“자신의 살을 떼어주고 상대의 뼈를 자른다”
는 섬찍한 각오로 임하겠다고 했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옛 사람이나 타인(他人)의 글에서 그 형식(形式)이나 내용(內容)을 모방(模倣)하여
자기(自己)의 작품(作品)으로 꾸미는 것”인데
글자대로 해석하여 “뼈를 바꾸고 태를 빼앗는다”뜻으로 잘못 해석한 것 같다.
새정치연합 비상대책위위원장을 두 번 지낸 문희상 의원은
임기를 마친 뒤 의원들에게 직접 쓴 글씨를 선물했는데
▲무신불립(無信不立)이었다.
“믿음이 없으면 일어설 수 없다는 뜻”으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義理)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상에서 본 것같이 마치 서당(書堂) 훈장(訓長)앞에서
학동(學童)들이 배운 내용을 외우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다.
이런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사용하는 것이
그냥 중고등학교 대학교 학생때 고사성어 한 대목을 외운 것인지,
아니면 중국 고전(古典)을 읽고 그 깊은 뜻을 알고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이런 금과옥조(金科玉條)같은 말을 실천하려면 반드시
아래 논어(論語)의 내용을 알지 않으면 마치 수능시험때 외워가지고
답안지를 메우는 것과 같은,
뿌리 없는 “말 장난”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말장난처럼 사용하고 나면
“사람만 우습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사성어를 알아도 쉽게 사용 안하는 것은 “실천”을 못하기 때문이다.
논어(論語) 제12편 안연(顔淵) 1장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 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 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인(仁)을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자기를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감이 인(仁)이니,
하루라도 자기를 이겨서 예(禮)로 돌아가면
천하(天下)가 인(仁)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仁)이 이룩함은 나로부터 비롯함이니라.
남에게 의존(依存)되는 것일까 보냐?”
안연(顔淵)이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요”하자
공자께서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禮)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하니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약삭빠르지 못하고 또한 불민하지만
이 말씀을 받들어 임무(任務)로 삼겠습니다.”
논어(論語)의 이 장(章)은 공자(孔子)의 인(仁)의 사상을 대표 한다고 볼 수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이겨서 예(禮)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정치든 인간의 삶이든, 사욕(私慾)을 극복하여 예(禮)를 실행하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간의 바탕인 인(仁)을 행하는 것이다.
공자는 인(仁)을 행한다는 것은 제 자신의 사욕(私慾)을 극복하고,
사심(私心)에서 해방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도덕 행위이며 자신을 초월(超越)하는 행위다.
타인(他人)의 힘에 의존하여 자기가 도덕적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仁)을 하루 행하면 천하가 인(仁)으로 복귀된다는 것은,
정치 지도자의 위치에서 단 하루라도
“극기복례(克己復禮)”하면 만민이 인(仁)에 감화(感化)한다는 뜻이다.
즉 정치지도자가 하루라도 국민 앞에 진실 된 정치를 하면
온 국민이 감화(感化)된다는 뜻이다.
극기(克己)는 스스로를 극복하는 것으로 인간의 도덕 생활의 첫 시발점이다.
먼저 사욕(私慾)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만 집착에서 해방되며,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사욕(私慾)의 극복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극기(克己)는 자기 구속이 아니라 해방이며,
억제가 아니라 자유이며, 평범(平凡)이 아니라 초월(超越)인 것이다.
사욕(私慾)의 자유를 이기고 더 큰 도덕적 자유를 얻는 길이 극기(克己)이다.
예(禮)는 도덕(道德)의 기본이며,
사회적 약속으로 개인의 동물적(動物的) 사심(私心),
사욕(私慾)을 억제하는 규율(規律)이므로 먼저 자기를 극복해야
예(禮)의 실천이 가능한 것이다.
극기(克己)가 없는 예(禮)는 인간에게 있어 구속이 되지만,
극기(克己)가 있은 뒤에 행(行)하는 예(禮)는 자유로운 해방이다.
이는
불교의 자비(慈悲)와
기독교의 사랑이며
플라톤의 이데아(idea)와 상통되는 것이다.
인(仁)은 본래 마음이 갖고 있는 완전한 덕(本心之全德)이고.
예(禮)는 하늘의 이치(理致)를 나타낸 것(天理之節文)이다.
인간의 마음은 원래 하늘의 이치를 그대로 부여받았으나,
사사로운 욕심(私欲)에 의하여 그 하늘의 이치가 가려지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구약성서 창세기 1장 27장에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다”
와 같은 내용으로 하늘의 이치(理致)를 역행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그 사사로운 욕심을 제거하고(克己),
예로 돌아가면(復禮), 본래 마음이 갖고 있던 하늘의 이치가 그대로 나타나게 되니,
그것이 곧 본래 마음을 온전히 하는 것, 즉 인(仁)을 행하는 것이 된다.
이런 깊은 고사성어(故事成語)의 이치를 생각 안하고
말을 꾸미는 장식용어로 고사성어를 사용하면서
실천을 하지 않으면
지금 우리국민은 대단히 똑똑하기 때문에
금방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므로
오히려 실천 없는 고사성어(故事成語) 사용한 것이
가치 없고 우스운 정치인이 되고
역효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농원